〈 140화 〉생각해보세용
“옵션 중 하나지.”
“….”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너무나도 담백한 태도였다.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함.
“아니. 하지만 레이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고….”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간신히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아용이는 이 또한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어깨를 으쓱이며 넘길 뿐이었다.
“이 몸의 계약자가 설마 그 정도로 천치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만, 정말 진지하게 그 인간 계집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물론. 내가 그 정도까지 병신은 아니었다.
그야 처음 레이디를 만나고 마을을 떠났을 시기까지는 나도 내 일로 벅차고 혼란스러웠기에 정말 그녀를 대상으로 이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그 이후로 많은 일을 겪고, 이렇게 다시 그녀와 만나 기억을 되살리니.
확실히 이 ‘레이디 필드’라는 소녀가 나에게어느 정도의 호감은 느끼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마에 닿았던 그 손길과 온기. 향기만 봐도….
“…하지만 레이디는 그냥 이제 막 시골에 나와서 그런 거잖아. 주변에 별다른 남자조차 없는 생활이었고 계속 언니들이랑 함께 살다 처음본 남자가 나였던 거뿐인걸.”
“맙소사. 이 몸의 계약자가 이 정도로 등신이라니. 아니…. 사실알고는 있었다만, 직접 귀로 들으려니 더 환장하겠군.”
“야. 너 말이 너무 심….”
“심하다고? 미안하다만, 지금은 진지하게 그대 뱃가죽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면 이 몸도 그대가 늙어 죽을 때까지 거미줄이나 치고 있었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구나. 나의 계약자여….”
아용이가 정말 질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후우…. 그러니까…. 그대는 지금 나이도 찰 만큼 찬 인간 계집애가 그저 그런 호기심이나 흥미 본위 따위로 홀딱 벗고 있는 남정네의 방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고 싶은 거군? 제 의지로 의자까지 끌어와 앉아가며 말이지. 이거 고소해도 될 수준 아닌가?”
“아니. 그건….”
“시끄럽다!”
아용이가 거칠게 나의 말을 잘라 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답답한! …아니. 그래. 상대는 인간 계집애. 물론 인간적 관점에서도 이해가 안 가지만, 딱 천만보 정도만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주마. 그럼…다른 이는 어떤가?”
“다른?”
“그래. 다른. 의심 가는 다음 픽이 없다고 말하면 내 지금 당장 가서 그대의 불알을 차버릴 것이다. 바른대로 고하도록!”
“….”
피곤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거친 행위의 직후라 그런 것인가.
상당히 진노하신 모양이었다.
“역시 너 아까 뿔 잡고 안에다 싼 것 때문에 화난….”
“집중!”
“….”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 마음에 떠오른 여성을 생각해보았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의 영향일까?
막히는 것도 없이 스무스하게 바로 두 명의 여성이 연상되었다.
그중 하나는 이번에 생각했던 레이디 필드였고. 다른 하나는….
“….”
“…음?”
조용히 입술을 훑은 나의 행동에 아용이가 무언가를 파악하고 눈썹을 치켜떴다.
“꼴을 보아하니. 이 몸이 잠든 사이 뭐가 또 있었군? …이미 내뱉은 마당에 따질 생각은 없다만, 제발 그 순록은 아니라고 해다오.”
“아, 물론. 걔는 확실히 아니고….”
내가 지금 암만 양심 버리고 생각하고 있다지만, 이데노아로 이런 생각은 좀 선 넘었지.
그 녀석은 오히려 나를 싫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말은 마음에 드니 뭐니 하지만, 매번 날 볼 때마다 은은한 독기를 내뿜는 여자가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니 대체 그녀와의 관계는 뭐가 문제였지?
역시 팬티 입혀 줄 때 너무 대놓고 본 게 문제였을까?
“아니. 그러면 뭐지? …그 금발?”
“그…. 응? 생각해보니까 그분…이름이 뭐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
“뭐 그래. 하여튼 기사님도 아니고….”
“그런가? 그럼 그렇게 된 거군.”
그리 말한 아용이는 더는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뭐야 마저 안 들어줘?”
“그렇게 빼면 이미 답 나왔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관심 없다. 왜 이 몸의 계약자가 다른 잡년이랑 썸타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거냐. 성욕을 덜라했지. 이 몸의 앞에서 서로 없어서 못 죽는 꼴을 보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
아니. 네가 생각하라며 그러면 끝까지 들어줘야 할 거 아냐….
내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묵하자 아용이는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쉬고는 조용히 무릎을 털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 이상하지는 않은 선택이라고는 생각한다. 확실히 그 뒤로는 대놓고 호의를 보이니…의식을 안 하기가 어려웠겠지. 이 몸도 그 아해라면 그나마 나쁘지는 않고….”
“……그런 것치고는 어째 영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별로…. 그저…언제나 이 몸이 아닌 다른 용을 선택하지 않길 바랐는데. 이제 와 종용하고 있으니…꼬락서니가 우습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응?”
잠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랬다.
아용이는 언제나 다른 용을견제하고 질투했을 뿐. 내가 인간 여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조금 섭섭하게 표현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말리지 않았었다.
“근데 다른 용은 왜 그렇게 싫어해?”
“솔직히…그대가 계속 인간으로 살았으면 하는 것도…있었지만….”
참지 못하고 묻자.
아용이는 잠시 커다란 황금색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로 솔직하면 이 몸은 가짜니까…. 만약 그대가 진짜 용과 유대를 쌓는다면 이 몸은 언젠가 버려지지 않을까 하고…생각했었다.”
“….”
“뭐, 뭐냐 그 눈은….”
“…진짜 딱 한 번 더 하면 안 돼?”
내 진솔한 부탁에 아용이는 경악하며 말했다.
“뭐라? 자, 잠깐! 허락 안 했다! 안 했어! 다가오지 마라! 이 몸은 이미 거기가 얼얼할 정도란 말이다! 그대는 이 몸의 그곳이 이렇게 붉게 부어오른 것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아용이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치마를 걷어 안쪽을 보여줬다.
흠…. 확실히 겉보기에도 붉은 것이 조금 안쓰럽긴 했다.
충동이 쌓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일 또 해야 하니까.
여기서는 참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참 아쉽네.”
“그러면서 더 세우지 마라! 확 물어뜯기 전에!”
아용이가 얼굴을 붉히며 으르렁거렸기에 진짜로 참아야 했다.
근데 정말 뭐지? 계속해서 이 쥬지가 간지럽고 가슴이 따끔거리는 느낌은?
“그대…왜, 왜 그러지? 얼굴이 조금 붉다만….”
“…그래?”
잘 모르겠다.
다만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에 그녀가 한 제안은 조금 더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대? 정말 바보처럼 용이 감기에 걸렸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냥….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용이 너를…너만을 제일로 생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뭣?”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아용이가 당황한 듯 입을 벌리고 얼굴을 붉혔다.
“흐, 흐응…. 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을 뭘 말로 표현하고있는 것인지….”
“…그렇지?”
맞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불변이었다.
나는 이 앞으로 누구를 만나도, 그 어떤 여자를 안더라도 이러한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 누구도 그녀만큼 생각하고 그녀처럼 대하여 줄 수 없으리라.
“암만 생각해도 그래….”
하지만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누군가를 품에 두는 일이 용서되는 일인지를….
그것도 정말 자신의 의지로 호의를 품은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대를 말이다.
“….”
나는 조용히 오른손의 손목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전 프레이야가 새겨준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붉은 문양이…새롭게 새겨져 있었다.
입에서 나는 소금 맛.
차갑게 식어 가라앉는 몸.
물에 빠진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깜짝 놀라, 물에 빠진 순간 몸 안에 저장된 공기를 남김없이 뱉어내고 말았던 탓이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나는 수영을 잘 못 했다.
완전 맥주병인 것은 아니지만, 수영장에서도 잘 뜨지 못하는데.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던져졌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흐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황한 내 몸은 발버둥을 칠 때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짙은심해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고 이내 나는 저항을 그만두었다.
푸욱─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온 소리는….
마치 무언가를 찌르는 푸른 창처럼, 물을 가르며 퍼져나가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나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 빠지기 직전 누군가가 나를 향해 외치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인님!’
…하고.
나는 잠시 그게 누구였지? 생각하다가 용기를 내어 눈을 떠보기로 하였다.
바닷가지만, 물속에서 눈을 떠 본 적은 없어 조금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어 하면 분명 어렵지 않을 터였다.
“….”
그렇게 결심하여 마침내 눈을 뜬 순간이었다.
따가운 감각을 참으며 계속해서 뜬 눈을 유지하자,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마치 인어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헤엄쳐오는 존재가 보였다.
투명하리만치 푸른 하늘색을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짙은 심해와도 같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
다가온 그녀는 표정은 무언가 다급해 보였다.
마침내 힘껏 바닷물을 차며 나를 따라잡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 얼굴을 잡고는….
“….”
입이 열리고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호흡이 느껴졌다.
따듯하고 말랑거리는 연한 핑크빛 입술이 주는 감촉.
어쩐지 떨리는 듯 서툰 입맞춤.
새로운 것이분명해야 했는데….
“….”
입을 맞추고 있는 이 순간.
왠지 모르게 나는…이것이 두 번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끔찍하군. 이 방은…아니. 그냥 배째로 태워 소독하는 게 빠르겠다.”
나중에 우리의 방을 찾아온 이데노아가 남긴 평이었다.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너희들은 항상 이 정도야? 뭔가 문제가 있지 않아?”
“아니.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내 말에 이데노아는 정색하였다.
“….”
흔적이 가득한 방. 그것도 내가 먼저 부른 것이다 보니 할 말은 없었다.
그냥 찌그러져 있을 수밖에….
“하아….”
“내일 도착 예정이니. 처, 청소를 부탁드릴 거긴 한데….”
“그렇다면 팁을 많이 줘야겠네. 그것도 아주 많이….”
“….”
왜. 어째서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인가.
“피유─ 피유─”
저 멀리, 우리가 뒹굴던 침대와는 또 다른 침대에서 배를 까뒤집고 자는 작아용을 보였다.
평소처럼 귀엽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오늘만큼은 순순히 귀엽다고 생각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혼자 도망치다니….”
“뭐라고?”
“혼잣말이야….”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하아.”
이데노아는 밀려오는 정사의 냄새에 코를 막으며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프레이야의 이름을 걸고 오래 운영한 큰 배니 알아서 잘해주겠지만, 네가 부탁한 대로…나머지는 전부 우리 방에서 묵게 하는 게 좋겠다.”
“미안….”
“뭐 됐어. 어차피 5인 실이니까.”
기왕 레이디 일행과 합류한 거 괜찮으면 우리 쪽 방을 써서 같이 가자는 말이 나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와 아용이 필라피스가 같은 방에 묵을 예정이었지만….
결국, 방이 이런 상태였고….
아마 한 번 정도는 더 이런 상태가 될지도 모르기에 나는 이데노아를 불러 사정을 설명하던 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피스는…?”
“울다가 잠들었어.”
“…뭐?”
이데노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인간. 네가 물에 빠졌을 때 잠시나마 숨을 안 쉬었다고 하더라고. 전에 기억이 상당히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야.”
“….”
가슴이 옥죄이는 갑갑한 마음이 들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으로는필라피스가 눈물을 흘리며, 홀로 몸을 말고 잠을 자는 모습이 떠올랐다.
딱─
“아야….”
갑자기 느껴지는 이마의 통증에 고개를 올려보니 이데노아의 손바닥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겨 나의 이마를 때린 것이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 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미안.”
“하아…. 뭐 들어보니 정말 정말 불행한 사고였고 이번 여행을 부탁한 건 나와 프레이야니 이걸로 넘어가겠지만….”
이데노아는 그리 말하며 돌아섰다.
“…이제는 정말 울리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말을 남긴 채….
홀로 남은 나는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에 기대어 다시금 푸른 바다와 같은 소녀를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