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1화 〉생각해보세용 (141/190)



〈 141화 〉생각해보세용

“후우….”

그날 새벽.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어버린 나는 다시 아무도 없는 갑판에 나와, 난간에 매달리듯 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다를 보았다.
귓가에 닿는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흔들리는 큰 배가 흔들거리는 것이 묘하게 기분 좋다.

낮에 난간에서 떨어져 물에 빠진 놈이 밤에 이렇게 있는 것을 알면 선원 아저씨들이 좋아라 하시겠다만, 뭐…나름 VIP지 않은가.
들킨다고 바로 바닷속으로 던져버리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뀨!”
“그래. 작아용. 너도 답답한 방에만 있다가 밖에 나오니까. 좋지?”
“쪼아! 띠원해!”
“그래? 난 좀 쌀쌀한데.”
“노올래! 노라쪼!”
“안 돼. 바다 위라 위험해. 얌전히 있어.”
“히잉….”

나는 연신 날개를 파닥이다 내 품을  빠져나가자 삐진 듯, 축 늘어진 작아용에게 낮에  안의 작은 상점에서 구매한 과자를 내밀어 보였다.

“이거 마시써! 햐구햐구!”
“넌 그냥 그 식감이 좋은 거 아냐?”
“시…깜?”
“아냐. 맛있게 먹어.”
“응! 마시써!”

예전에 본 벌꿀 과자 비슷한 과자였지만, 배 위라 그런지 훨씬 딱딱하게 구운 스틱형 과자였다. 내가 잠깐 씹어 봤을 때는 맛은 있어도 이빨이 아플 수준이라 포기했는데.
작아용은 이를 보자 시무룩해졌던 것도 잊고 마치 며칠 굶은 햄스터처럼 과자의 끝부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근데 먹으면서도 발은 쉴  없이 꼼지락거리네. 야행성이라 밤에  활기찬 건가?

솔직히 자게 놔두면 밤낮 가릴  없이 잘 자는 작아용이기에 야행성이니 뭐니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목소리 톤을 들어봐도 낮보다는 밤에  활발한  같았기에 내 멋대로 야행성이라 생각 중이던 참이었다.

“야! 야만인! 너 거기서 뭐 해?”
“…응?”

그때였다. 아무도 없어야 할 새벽의 갑판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어딘지 익숙한 랜턴을 쥐고 선 핑크빛의 머리의 수녀 아가씨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 잠이  와서…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응? 벼, 별거 아냐! 나도 잠깐 잠이 안 와서 나왔는데….”

레이디는 그 말에 잠시 하늘을 보며 허둥거리다 심호흡을 하며, 한 박자 쉬더니….
이내 다시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 우연히 마주친 선원 아저씨가 네가 또 뛰어들까 봐 불안하니까. 제발 옆자리  지켜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길래 왔지!”
“….”

나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조금 집중하니 확실히.
저 멀리서 어두운 인영이 걸어 다니는 것이 스멀스멀 보이는 듯했다.

 들킨 게 아니고 모른 척해준 거였나?

그런 사고가 있었으니 화를 내도 그러려니 할 텐데, 역시 성녀님이 직접 구해주신 티켓이라 그런지 꽤 강력하다 싶었다.

“그래서 결국 뭐…으앗! 너, 너너너 그, 그건 뭐야?”
“아, 이거? 수도에서 유행하는 마계견. 코카우져 비글리우스라고….”
“마시쪄!”
“마, 말하는데?”
“…얘는 아용이라고 해.”
“아, 아용?”

레이디가 신기한 듯 고개를 내밀어 품속에 있는 작아용을 보았다.
 일수 자체는 짧지만,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고….
적어도 이번 여행하는 동안은 계속 같이 다닐  같으니.
내가 편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말은 전해둬야지 생각하던 차였다.

“뀨?”
“조,  귀엽…나? 위, 위험한 건 아니지?”
“어. 나랑 함께 한지 엄청나게 오래됐어. 안전해 이 상태는….”
“이, 이 상태?”

사실. 대충 둘러댈 생각을 하고 있었기는 한데….
이렇게 막상 들키고 나니 별건 없다 싶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대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녀님 주제 나와 같이 살아 있는 흡혈귀도 놔주지 않았던가.

“마, 만져봐도 괜찮아?”
“어.”

가볍게 대답하며, 스틱 하나를 아용이에게 더 물리자.
근처에 다가와 앉은 레이디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용이를 쓰다듬었다.

“마싯…햐규햐규! …마시쪄!”
“귀, 귀여워….”

작아용은 원래도 상당히 얌전하지만, 딱딱한 과자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오늘은 특히나 누군가가 자기를 쓰다듬는 데도 피하지 않고 과자를 오도독오도독 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문뜩 필라피스가 나왔으면 좋아했을 텐데…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필…피스는 괜찮아?”
“읏….”

 말에 쭈그려 앉아 행복한 얼굴로 아용이를 쓰다듬던 레이디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피스씨는 괜찮아. 평소보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하셨지만, 결국 잠드셔서….”
“그렇군.”
“저, 저기….”

옆을 보니 레이디는 이런 말해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두, 둘이 무슨 관계야?”
“관계?”
“평범하지 않은 건 알고 있는데…. 피스씨가 주, 주인님이라 부르니까….”
“그건….”
“시, 시치미 떼려고 하지 말고 너도 피스…씨를 부를 때는 엄청 부드럽게 부르잖아.”

레이디는 여기서 쐐기를 박으면 지금이라도 울음보가 터트리지 않을까 싶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쩍.”
“….”

아니면 벌써 눈물이 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뭐 잘 모르겠다고 해둘게.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도 최근이고.”
“…뭐? 계기나 그런 것도 없이?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계기가 없던 거는 아닌데….”

‘너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냐? 징그럽게….’
‘지, 징그럽다고 하지 말라는 거다! 상처받는 거다! 어, 어쩔 수 없는 거다! 인…주인님이 이 몸의 영혼의 주인님이 되어버린 거다!’

“…이걸 어찌 설명하기가 미묘하네.”
“뭔데? 아까 낮에 상태가 괜찮아지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주겠다며!”
“음?”

확실히 내 입으로 그리 말하긴 했…나?

“…범위가 좀 다르지 않아?”
“맞거든? 서서, 설마! 그, 그런 짓까지 한 주제! 발뺌할 생각이야? 빨리 다 토해내라고!”

그런가?

아니. 하지만 암만 레이디가 작은 가슴치고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믿음의 근간이 흔들리는 이야기를 쉽사리  수는 없었다.
이전 프레이야가 말한 걸 토대로 생각해보면, 믿음이 흔들려 신성력을 더는 못 쓰게 될 수도 있을 테니….
스스로 신성력의 천재라 주장하는 레이디이기에 더욱 그런  바라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음…. 그냥 어쩌다 구해준 일이 있었는데….  뒤로 그렇게 부르는 거라서….”
“…뭐? 뭔 소리야?”
“나도 잘 몰라. 종족…아니. 부족적인 전통인가 봐.”
“흠….”

레이디가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듯한 푸른 머리를 가진 필라피스는 서양인 같은 외모에 가까웠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꽤 이국적인 외모이기도 했다.

“전통이라….”
“별로 큰 의미는 없는 거 같아.”
“흠…. 그래?”

덕분에 레이디는 이런 서툰 변명에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 주나 싶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뒤이어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  왜 렐카로 가냐? 기사님이 성화교에서 배움을 얻으러 간다고 말씀하시던데. 결국, 창천교에서는 견습 딱지를  떼겠다고 판단해서 성화교로 전향하기로  거야?”
“누, 누누누가 아직도 만년 견습이야! 긴장만 안 하면 그까짓 것 껌이거든!”
“아…역시 아직 견습이긴 하구나….”
“읏….”

실수했다. 이야기 방향을 틀려고 급하게 얘기한 것이었는데….
아차! …싶은 순간 레이디는 이미 고개를 낮게 숙이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야, 야만인 주제…나,  그대로 버리고 가서는….”
“아니. 다시 말하지만, 그건 사정이 있어서….”
“거짓말! 사정은 뭔 사정! 너 지금까지 탈리아 언니랑 지내는 거 보면 날 방해라고 생각해서…으앗! 너, 너너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왜 또 벗고 그래!”
“…아니. 말보다는 이게 빠를 거 같아서.”
“뭐? 너, 너너넛….”

나는 눈을 가리는 척 손바닥 사이로 끈적하게 연보랏빛 시선을 보내오는 레이디의 새된 비명을 무시하고 상의를 탈의하여 등의…목 바로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보이지?”
“아니. 말했잖아요! 나, 나는 혼전 순결을 필라피스님께 약속드린 몸이라고…! 이런 건 적어도 야, 약속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알겠으니까.  봐봐.”
“으…읏? 너, 너너…어?”

 뒤를 보여주고 레이디는 눈동자가 크게 뜨여 흔들리는 걸 확인한 나는 다시금 옷을 입는다.

“….”

이어 레이디는 들고 있던 랜턴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수녀 베일을 양손으로 끌어당기듯 잡았기에 나는 과자를 다 먹고 무릎에 앉아 골골 되는 작아용을 한  쓰다듬고 조금씩 바닥을 구르는 랜턴을 대신 잡아 주어야 했다.

“…워, 원래부터?”
“어. 그때부터 이랬어.”
“…언니들도 알아?”
“응.  다.”
“그래….”

레이디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에게 되도록 진실하여지자 생각하여 보여준 것이었으나 그 모습을 보니 조금 후회가 되었다. 필라피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그녀 또한 항상 밝은 것만 봤으면 했으니까.

“뭐…사실은 범법자라 이거지.”
“범법자라니….”

레이디는 무언가 말을 해주려 고개를 들다 말끝을 흐리고는 다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 관련 법률상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섭지 않아?”
“피…네가? 전혀…우스우면모를까….”

그나마 그렇게 살짝이라도 웃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나도 그녀의 연한 미소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마을에서 나에 관련된 소문이 퍼졌거든. 제인이 말해줘서 그대로 새벽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

사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가려고 고민을 했었다만, 굳이 잠든 사이 탈리아씨에게 납치당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랬…구나….”

레이디는 자신의 가슴 쪽에 손을 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난 정말 버려진 줄 알고…나중에 만나면 그대로 갚아 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
“번개는  번 정도 잠수는 다섯  정도 지팡이로는  대 정도 때려주고….”
“…오전에 밀어 버린  진짜 고의 아니었지?”
“후후…. 그걸로도 훨씬 모자라거든? 여자 맘에 그런 상처를 주고 괜찮을 줄 알았어?”

슬며시 웃는 레이디의 미소가 무서웠다.
벌어진 가슴 쪽의 주머니 사이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금속류? 십자가일까?  수는 없지만…그녀는 그것을 꽉 쥐었다.

“뭐…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용서한 건 아냐. 어쨌거나 네가 우리 언니랑은 함께하면서 날 버리고  건 맞잖아?”
“….”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나는 침묵했다.

“우리 언니랑 함께하기 위해 내가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고…그냥 순수하게 위험할 때 거치적거릴까 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 진짜 그런 건….”
“그럼 뭐?”
“아니. 아니야….”

이미 탈리아씨에게 납치당했던 사실을 넘기고 설명하기도 어려웠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호를 포기했다.

“뭐, 그래도 아주 살짝은…용서해줄게.”
“응?”

레이디는 그 모습을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다시 한번 작게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주 살짝만…너 때문에 기회를 잡자고 생각한 거니까.”
“…기회라고?”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다.
오전에 맡았던, 레이디의 손목에서 풍기던 이름 모를 꽃의 향기가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새벽의 바닷바람을 타고도 은은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번에 언니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만약 너를 만나지 않은 나였다면 그냥 안 간다고 했을지도 몰라.  홀로 집에 틀어박혀. 변하지 않는 안정적인 하루를 시작하고…겉으로는 툴툴거리며, 속으로는 만족했을지도 몰라.”
“….”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언니에게 허락해달라고 말하기는커녕, 기사님에게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는 것조차 못했을지도 몰라.”
“….”
“그날 일어나서 네가 침대에 없는 걸 확인하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너는 죽어도 모를 거야. 인생에서 처음 내본 용기가 그런 형태로 거절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해봤으니까. 그러고 보면 정말 이 야만인은 처음 만났을 때도 거짓말을 하고 나를 버리고 갔었지. …그렇게 생각했었어. 원래 그런 녀석이라고 원망이나 하려고 그리고  혼자서 울었어.”

이번에도  말이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흐읍─”

레이디는 마치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듯 잠시 눈을 감고 묘하게 씁쓸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자신의 얼굴로 불러오는 소금기 가득한 공기를 크게 호흡하듯 소리를 내 마셨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완전히 용서할  없지만, 그래도 네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 …그건 고맙다고 하려고.”

일어선 핑크빛의 소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은 내가 봤던 언젠가의 어린아이랑은 전혀 다른…틀림없는 한 사람의 성숙한 숙녀의 모습이었다.

“아─춥다! 바보야! 너도 괜히 새벽에 감기 걸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자!”

레이디는 마지막에 그런 말을 던지며, 객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나는 다시 편히 자는 아용이를 쓰다듬었다.
이름 모를 꽃의 잔향이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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