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우리 잠깐 쉬어가용
나는 이마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축축하고 차가운 감촉에 눈을 떴다.
젖은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검은색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까지는 조금 맑아지나 싶었더니….
이제는 다시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하늘을 보며 푸르름을 생각하였다.
맑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지 이제 겨우 하루가 되었을 뿐인데….
나는 벌써 이 마을에서 처음 보았던 푸른 창천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있었다.
“….”
…그건 그렇고 시야가 대체 왜 이렇담?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다 깨닫는다.
나는 분명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을 터였다.
조금 더 정신을 차리니, 바닥이 조금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아래 깔린 건 뭐지?아까 앉을 때 쓴 담요?
“으읏~! 하아. 하아. 끄응…!”
“…너 뭐하냐?”
“꺄, 꺄악!”
내 목소리에 담요를 잡고 끌고 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레이디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야…! 이, 일어났으면 마, 말을 하란 말이야! 노, 놀랐잖아!”
“나도 지금 방금 일어났지….”
좀 억울했다.
“으….”
쑤셔오는 허리를 일으키자 내 몸 위로 올려져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떨어져 내렸다.
어깨 사이로 감겨 있는 담요.
아무래도 쓰러진 내 몸을 질질 끌고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까지고 쓸릴 내 등이나 다리를 생각 안 한 건 둘째치고 짐까지 다하면 무게가 제 두 배는 가볍게 넘을 텐데 말이다.
“하….”
“그, 그렇게 보지 마! 나, 난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한 거뿐이라고!”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레이디도 자신의 무리한 계획에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얼굴을 잔뜩 붉히며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큭…. 그, 그래…. 그래도 일어나서 다행이다.”
“뭐…눈 감기 전이랑 위치 변화가 거의 그대로인 걸 보면 다행이긴 하네.”
“야아!”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나를 끌고 가려고 고사리 같은 손이 퉁퉁 부을 때까지 노력한 레이디를 생각하자면 안쓰럽기 짝이 없어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애초에 기절한 성인 남성을 끌고 와서 이렇게 눕혀 놓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아! 그러고 보니 아용이는? 우리 작아용!”
“깜짝이야…. 그, 그렇게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찾아서 여, 여기 메고 있으니까….”
“우웅….”
레이디가 가방의 끈을 들여 아용이를 보여주었다.
가방 위쪽에는 쭈뼛한 표정으로 볼을 빵빵하게 하고서 얼굴만 드러낸 작아용이 있었다.
“걔는 왜 그렇게 화났어? 뭐 했어?”
“내가 한 거 아냐.”
“…응?”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던져졌다던데?”
“….”
“던져써!삥글삥글해써! 나뺘!”
아무래도 자신을 던진 것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가방 안쪽에서 꼬리를 흔드는…퍽퍽! 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생했어. 이제 내가 데리고 있을게.”
“으, 응….”
“흥! 흥이야! 흥!”
나는 괜찮아도 레이디는 꼬리가 살에 맞을 때마다 상당히 아프게 보여 바로 가방을 받아 들었더니, 내 품으로 온 작아용이 상당히 화가 난 지 볼을 더 빵빵하게 부풀렸다.
“아이고 미안해라. 가자마자 맛있는 고기 사줄게. 큼지막한 통구이로.”
“뺩! 꼬기! 쿤 꼬기! 지쨔?”
“어. 진짜 진짜. 용서해 줄래?”
“응! 쪼아! 뺩! 쪼아!”
“거기선 오빠가 좋다고 해야지….”
나는 다리에 걸린 한 손 검을 보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수수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공을 써서 만든 듯한 흔적이 보이는 칼집과 손잡이가 보였다.
칼날도 제법 예리했었지.
정확한 가치는 모르겠으나, 척 봐도 내가 잡아본 장비 중에서는 가장 비싸 보이는 상등품이리라.
“흠….”
다시 돌려달라고는 안 하겠지?
일은 꼬였지만, 이렇게 괜찮은 물건을 얻었으니….
이것저것 포함해 보수를 넘어서는 금액을 탕진하더라도 괜찮겠다 싶었다.
“근데 그 칼은 어디서 난 거야?”
“아, 지나가던 사람이 잠깐 도와줘서 말이야. 고맙게도 가지라더라.”
“…여기를?”
“뭐…필라피스님 제단이라도 찾아왔나 보지….”
“아, 그러면 제단의 몬스터를 치워준 답례품인 건가? 잘됐네!”
“그러게.”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레이디.
정확한 설명은 너무 길고 애매한 부분 있어, 대충 그리 생각하도록 두어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쑤셔오던 감각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졌다.
“으…. 죽겠다….”
“괜찮겠어? 기적이라도 걸어줄까?”
“아니. 너 신성력 너무 써서 기절했잖아. 너야말로 괜찮아?”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마법처럼 신성력도 정신력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많이 써서 기절해버린 것은 이번에 처음 봤지만, 말이다.
별생각없이 그 사실을 지적했더니 레이디는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야! 펴, 평소에는 겨우 그 정도로 기절하거나 하지 않는걸!”
“…걸?”
“아니. 그게…하지…않아요.”
레이디가 부끄러운지 다시 자신의 모자를 꾹 눌러 쓰며 말을 이었다.
“하, 하여튼! 어쩐지 이상했다고!”
“응? 내가?”
“그래! 나 말고! 네가! 계속 축복을 걸어주는데…. 이상하게 흩어진다고 해야 하나…그래! 마치피스 씨처럼!”
“아….”
“아, 라니…. 둘 다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어?”
“…우리 둘 다 무교라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또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고….”
싸우는 와중에 계속 이것저것 걸어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뭐…그렇게 몇 번 시도했더니. 역류 현상이 일어나서…. 평소에는 그 정도 횟수 기적은 여유니까!”
“아니. 그것도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듣기로는 이제 막 모험을 떠난 사제들이 사용하는 기적도 일 평균 4~5회가 한계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고 그녀가 날리는 기적이 의외로 중급의 영역에 속하는 기적임을 생각하면, 본인의 말마따나 그녀는 확실히 천재였다.
“여튼 고생했어.”
“꺅! 머, 머리 누르지 말라고!”
“아야. 아파요. 아파.”
나는 지팡이로 내 허리를 툭툭 치는 레이디를 피해 도망가듯 걸었다.
“피, 필라피스님의…?”
“응. 제단.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좀 보고 갈까 하고. 아, 낙석이 있었으니까. 너는 멀리 떨어져 있어.”
“너, 너도 조심해!”
“응.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무너진 사당의 잔해를 살펴보았다.
거의 내 몸만 한 돌이 떨어져서 그런지. 건질만 한 것이 거의 없이 산산조각이 나긴 했지만….
“응? 조각상 날개가…4장이었나? 시장에 피스 인형은 분명 2장이지 않았나?”
어쩐지 녀석과 관련된 일이라 생각하니 관심이 동했다.
그 뒤로 우리는 무난하게 산에서 내려왔다.
“으…나, 난 여관 가서 먼저 씻을래….”
“그럴래?”
“…너도 대충 물은 끼얹고 가는 게 좋을걸?”
킁킁.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던 레이디가 코를 막으며 말했다.
확실히 물을 좀 끼얹기는 했다만 트롤의 피를 온몸으로 받아 내었던지라, 역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피 냄새는 내가 다 어질할 정도였다.
“아, 그래도 교회가 바로 코앞이니까. 난 들렀다가 갈게. 설마 이렇게 고생했는데 내치진 않겠지.”
“그, 그래?”
“응.”
보수와 비교해 말도 안 되는 일의 강도를 항의하고자 하는 뜻도 있고, 무엇보다 이대로 여관에 갔다가 다시 걸어 나올 자신도 없었다.
“아, 알겠어…. 미안하지만, 그러면 먼저 들어가 있을게….”
“미안할 게 뭐 있어? 오늘 고생 많이 했는데.”
“헤, 헤헤…. 그, 그래?”
“그럼. 내가 같이 일해본성직자 중…아니. 그냥 같이 일해본 사람 중 최고였어.”
“흐, 흥! 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 고맙네….”
새침하게 말하면서도 제대로 감사하는 부분이 참으로 레이디 답다고 생각하며 걷다 보니. 저 멀리서 푸른 창천의 십자가가 새겨진 푸른 지붕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난 저기로…그럼 먼저 들어가서 푹 쉬고 있어.”
“그래…으, 오늘은 좀 편히 잘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응? 왜? 계속 편히 못 잤어?”
“응? 넌 못 들었어? 같은 여관에 숙박하고 있는 사람들이…. 헛! 아, 아냐! 아, 아무것도 아냐!”
레이디는 말을 이어가다 얼굴을 붉히고 허둥지둥 움직여 자리를 벗어났다.
…뭐지?
“…수녀님?”
여전히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교회에 들어가니 저 멀리서 아이들이 공놀이하다 말고 나를 보며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으…애들이 있을 줄 알면 그냥 씻고 올걸….
호기롭게 따지자 결심하고 교회의 앞까지 왔으나, 괴물의 피와 살 찌꺼기가 달라붙은 몸으로 애들이 노는 교회 안쪽에 들어가려니….
생각보다 조금 죄악감이 들었다.
“….”
“젊은 총각! 어서 들어오지 않고 거기서 뭐 하는가?”
“귀도 좋으셔….”
“뭐라고?”
“아뇨. 수녀님 정정하시다고요! 지금 갑니다!”
역시 다음에 올까 잠시 고민했더니….
이번에도 안쪽 마당에서 앉아 계시던 수녀님이 나를 발견하여 큰소리로 외치시어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래. 자네 냄새가 상당히 고약하네만…. 부탁을 들어준 게로군? 고맙네. 그래 제단은 무사하던가?”
“괴물은 잡았습니다만, 제단은 낙석이 떨어져서요.”
나는 증거물 대신 주머니에 넣어온 필라피스상의 조각 보이며 말했다.
“어이구 이런…. 다시 세우려면 젊은이들이 고생 좀 하겠군.”
마치. 남 일처럼 말하는 수녀님이었지만, 다시 세울 수 있다면 좋았다.
나도 필라피스의 제단이 망가져 있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수녀님. 토벌대상이 트롤이었어요. 트롤.”
“트, 트롤?”
“네. 그나마 다행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 올려보냈으면 그대로 송장 치를 뻔하셨어요.”
“그게 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잘 몰라.”
“….”
뭐…. 일은 언제나 모험가가 선택하는 것이고 잘못된 의뢰에 대한 부담도 모두 모험가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맞았다.
괜히 로덴에서 모험가들이 죽기 살기로 좋은 일거리를 찾아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번 일은 오히려 악의 없이 오해로 발생한 일이기에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저…. 수녀님. 제 말 잘 들으세요?”
그래서 내가 수녀님의 손을 잡으며 다시금 경고를 드리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저…혹시 무슨 일이시지요?”
옆쪽에서 나긋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올려보니.
수녀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연륜이 있으신 목사님이 나오셔서 물으셨다.
“….”
등 뒤에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수녀님께 무슨 짓을 한다고 생각한아이들이 쪼르르 달려가 목사님을 불러온 것이지 싶었다.
“야, 야만인이 우리를 지목했어!
“꺄! 도망가! 피부를 벗길 거야!”
“가, 같이 가!”
다 오해라는 뜻으로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었는데.
아이들은 되려 꺅꺅 소리를 치며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죄송합니다.아이들이 개구쟁이들이라 진심은 아닐 겁니다.”
“네….”
나는 씁쓸히 대답했다.
멀리서는 여전히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일이…이거 참 죄송합니다.”
나와 같은 복장을 한 신부님은 내 설명을 듣고 바로 고개를 숙이시며 말씀하셨다.
“저희 수녀님이 모르고 부탁하신 것이라고는 하나, 심각한 일이 발생할 뻔했군요. 도움을 주신 분이 자용님처럼 강한 모험가분이어서 다행입니다.”
“아뇨….”
듣자 하니. 이번 일은 교회에 상관없이 수녀님이 개인적으로 맡기신 의뢰였던 것 같다.
“수녀님은 제가 목사가 되기 전부터 이곳을 지켜오신 제 어머니 같으신 분인데. 요즘에는 옛날 일을 자주 착각하셔서요. 축제 시기에 맞춰 제단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축제요?”
“네. 아주예전 이 시기에는 저희 창천교에서도 제법 큰 축제를 열고는 했답니다. 지금은 사라진 전통이지만, 마을 사람들 다 같이 산에 올라가 간단하게 필라피스님께 인사를 올리고는 축제였지요.”
“….”
지금은 내 허리 근처까지 오는 잡초가 자란….
최소 몇 년은 관리하지 않았을 길이 떠올리며 수녀님께 확인차 보여드리던,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아마 다시 만들어지지 않을 조각상의 조각을 더듬거렸다.
“그건…제단에 있던 패러닉스님의 조각상이군요?”
“패러닉스?”
“네. 여기 깃털 조각의 형태가 일자로 펴지지 않고 접혀 있지 않습니까.”
“….”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저도 본교나 섬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고 성서에는 쓰여 있지 않은 부분이라는 걸 자주 깜빡하고는 한답니다.”
내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이자 신부님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시며 입을 여셨다.
“패러닉스님은…. 필라피스님의 언니이자 드넓은 창해를 상징하는 여신님이십니다.”
“언니요?”
“네. 전설에 의하면 세상을 위협하는 검은 마신의 창을 심장에 맞은 패러닉스님은 그 상태로 이 섬에 와 어린 동생 필라피스님을 키우시고 그녀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본 뒤 만족하고 녹아내려 바다가 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창해와 창천은 서로 마주 보고 마찬가지로 푸른 것이라고요.”
“…그렇군요.”
‘아니. 다 죽었으니까. …딱히 복잡한 건 없는 거다.’
문득 가족에 관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필라피스가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가볍게 넘겼지만, 이 섬에 와서 할 게 있다고 사라진 필라피스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쯤 녀석은 돌아왔을까?
나는 문뜩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천천히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