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6화 〉성화국이에용 (176/190)



〈 176화 〉성화국이에용

“….”

그냥 이렇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몇  전까지만 해도 죽을 만큼 괴로웠던 그 모든 추위와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

있는 것이라고는 푹신함과 따듯함에서 오는 안락함 뿐.
악몽의 흔적이라고 해봐야 식은땀으로 이마가 살짝 젖은 것이 끝이었다.

“으….”

고통받은 그 기억은 이토록 선명한데….
 그대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에 속이 매스꺼워진다.

“아니. 그냥 꿈을 꾼 것이 맞긴 하지만….”

너무나도 어이없어서  혼잣말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목에 걸리는 느낌조차 없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꿈속이지만, 현실보다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지던 추위와 고통.
분명 이대로 꿈에서 깨어나면 육체에도 영향이 가 있어 꿈처럼 온몸이 만신창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건 또 아닌가 보다 싶어  위로 손을 올렸다.

“음냥냥.”
“아야….”

…물렸다.
 위를 점령하여 단잠을 자던 녀석 짓이었다.

“잉! 쿠왕왕”
“아야야.”

괘씸하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하는 녀석의 통통하고 매끄러운 배를 살짝 간지럽혀 주자, 배를 까뒤집고 자고 있던 녀석이 요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 팔에 덤벼와 손목을 물고는 토끼같이 커다란 뒷발을 움직여 손바닥을 마구 긁어 대었다.

“항복. 항복.”
“잘꼬야!”
“그래. 내가 잘 못 했어. 계속 자.”
“음…잘…꼬….”

잠에서 금방 깬 탓인지.
반대 손으로 손목을 살짝 물고 있는 턱을 쓱쓱 긁어주자,  포악한 생명체인 작아용은 점점 매달리듯 안고 있던 앞발과 턱에서 힘을 빼고는 “음냐냐….” 소리를 내며 다시 잠에 빠졌다.

“…으아. 다 긁혔네.”

이불속에서 뺀 손목은 붉게 긁힌 상처가 몇 개나 되어서 아용이가 완벽하게 잠들어 작아용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꿈속에 납치당한  아용이가 전혀 몰랐다는 뜻일까?

“캬뱌뱌….”
“이건 또 뭔 소리야? 너 지금 잠꼬대하는 거니?”
“아냥….”
“아니기는….”

…상태를 보니 완전히 몰랐던 것 같다.
만약 내게 특별한 일이 있다면 작아용 상태에서도 알아챘음이 분명할 텐데 말이다.

그 정도로 피곤했던 것일까?

아니. 직전에 쓰러지듯 잠든 것도 아니고.
아용이는 언제나 자신이 깊게 잠들어 정말로 무방비 상태가  것 같으면 미리 경고해주고는 했었다.

“…보통 꿈에서도 함께였는데.”

모르겠다.
 혼자 고민해봐야 의미도 없겠지.

“음냐아….”
“미안. 잠깐만….”

나는 조용히 내 배 위에서 잠을 자던 아용이를 침대로 내려 이불 속에 덮어 놓고.
슬그머니 이불 밖으로 나와 침대에 걸쳐지듯 앉은 후, 눈을 감고 그 위에 두 손바닥을 덮었다.

“혹시 지금 눈을 뜨면 나는 현실에 있을까? 아니면 꿈속?”
“….”

이번에는 혼잣말이 아니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뭘 기대 하겠어.

“….”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슬며시 눈을 떠 보였다.
손바닥 사이에서 스며드는 빛은 여전히 내가 현실에 있다는 증거.

그렇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지금  방에는 단 하나, 내가 알던 현실과는 다른 것이 있었으니까.

“후우….”

나는 깊게 호흡하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다른 누군가를 보았다.

“혹시 아직 꿈인가?”
“….”
“꿈이 아니라면…넌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지?”
“….”
“아, 뭐라고 한 게 아니고 단순히 질문이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진 말고.”
“….”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보는 이의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푸른 시선을 보내올 뿐이었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과 똑같이 하나도 달라진 점 없이….

“….”
“….”

아니. 사실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

“차라리 정말로 하나도 달라진 점 나왔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

나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눈앞에 소녀가 투명한 존재감을 넘어, 정말로 흐릿흐릿진 상태로 두둥실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후령 같은 건가?”
“….”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 아니 용…. 아니. 유령?

“아니. 아무것도 아냐….”
“….”
“…혹시 아까 내가 눈 뜨자마자  보고 기겁했다고 화난 건 아니지?”
“….”

아….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거 말이 통하고 있긴한 건가?

“…일단 우리 둘 다 현실에 있는  맞는 거야? 지금 이거 현실인가?”
“….”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답을 모른다기보다는 질문의 의미를  모르는 듯한 그러한 느낌이었기에 나는 해답을 포기하고 고개를 떨구며 슬쩍,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속눈썹이 기네….
가슴이나 키는…. 아용이의 가장 큰 버전과 작은 버전의 중간쯤 되는 크기일까?

여름에나 입을 법한 어깨가 그대로 드러난 하얀색 캐미솔 형 원피스를 입었으나, 꿈속의 그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도 같은 옷을 입고 추운 기색은커녕, 입김 하나 내지 않고 태연했던 존재답게 전반적으로 겨울이  어울리는 인상을 주는 외모였다.

“….”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소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찔하면서도 목은 움직이지 않고 뻣뻣이 유지하여, 계속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손을 기다려 주었다.

“….”

직전에 잠시 멈칫.
어딜 만질까 고민하던 나는 그녀의푸르른 쪽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에 피스의 생각이나, 그냥 머리 위로 손을 얹어 보기로 하지만….

“역시….”

천천히 내려앉은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고 나의 손을 그저 허공을 휘젓듯, 그녀의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몸이 투명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안되네.”
“….”

그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이군. 대화는 일단 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나는 내 옷에 손가락을 걸어 안쪽을 보았다.
많은 상처가 보이긴 하지만, 전부 용이 되기 전이나 죽기 직전에 생긴 상처들이었다.

배는 물론, 가슴에도 꿈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듯,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

나는 조용히 주머니속에 넣어 놨던 목걸이를 찾아 꺼내어 들었다.
평범했던 은색의 체인 줄은 그사이에 녹슬기라도 한 것인지 군데군데 검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끝은 누가 거칠게 뜯기라도 한 것처럼 끊겨 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항상 매달려있던 아용이의 뿔 조각은 눈을 떴을 때부터 사라진뒤였다.
그 꿈속에서 그녀가 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있었던 일은 진짜 일어난 거지?”
“….”

꿈이 진짜냐. 이것이 꿈이냐. 같은 모호한 질문 말고 그 일이 진짜냐 아니냐를 묻자 얼음으로 조각하여 만든 듯한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을 긍정해 주었다.

좋아 다시 한 걸음 다가갔군.

“그럼, 여기 달려 있던 검은 조각은 지금  몸속에 있는 거야?”
“….”

다시 한번 내렸다 올라온 고개.
나는 어쩐지 따끔한 기분을 느껴 아랫배 쪽으로 손을 넣어 가슴의 중앙을 긁었지만, 당연하게도 손가락에 만져지는 느낌은 없었다.

“날 살려주려고…꿈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거 맞지?”
“….”

당연히 끄덕일 줄 알았는데.
여기서 고개를 갸웃하는 소녀.

“…그냥 괴로워 보여서?”
“….”

그녀가 발로 나의 배를 얼린  주춤했던 동작을 생각해 그리 말하자, 그녀는 다시금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고맙네…. 어쨌거나 덕분에 살았어.”
“….”

이번에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저 나를 봐올 뿐이었다.
뭐지? 내가 고맙다고 인사한 게 의외인가?
좀 늦긴 했지만….

“….”
“에흠….”

계속 빤히 봐오는  어쩐지 부끄러워졌기 때문에 나는 애써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뿔이 뭔지 알고 있었던 거야?”
“….”

그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말을 부정했다.

“…대충이라도?”

여기서 잠시 정지.

“….”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던 소녀는 정적에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을 때쯤.

“….”

자신이 있는 건 아닌지, 묘하게 느리게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해주었다.

어쩐지 억지로 답을 얻어낸 기분이군.

보자마자 행동하였으니 어쨌거나 알고는 있었겠다 싶었던 거뿐이었지만….
그렇군. 잘은 모르는 건가?

“혹시 사용법은 아는데, 그 물건이 뭐 하는 물건인지 정체는 모른다는 뜻?”
“….”
“역시 그랬구나.”

대충 정리한 생각이 들어맞았는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기에 나는 조용히 이불을 걷어 안쪽에서 고이 자는 작아용의 머리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거  뿔이야.”
“….”

놀란 건가?
잠시 나와 작아용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과눈동자를 그대로 유지한 채, 양손을 자신의 입술위로 올려 보였다.

“목소리가…안 나오는  알겠는데. 혹시 다른 용들처럼 머릿속으로 말을 흘려보내는 건 불가능해? 너도 질문이 있다면 해도좋은데.”
“….”
“그렇구나….”

여기서 갸웃거리는가.
아무래도 하는 방법을모르는 모양이었다.

“…계속 질문해도 될까?”
“….”

나만 질문하는 것이 미안해 물었더니.
그녀는 두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긍정해 주었다.

“네가 ‘렐카’의  번째 용이야?”
“….”
“음…. 여기서 갸웃거린다는 건…혹시 성화국이라거나 렐카가 뭔지 모른다는 뜻?”
“….”
“아, 역시 그랬구나. 그럼….”

뭐, 그냥 용도 아니고 유령 용이니 인간 세상의 지명 정도는 모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해 다음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와 나는 벌렸던 입술을 닫고 문 쪽을 한  바라본 뒤 다시금 흐릿한 형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그 희미하게 보이는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볼  있을까? 만약 남들이 본다면 어찌 생각할까?

“…들어간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지키며 고민하는데.
문 앞에 선 누군가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 왔다.

“응?”
“….”
“뭐, 뭐야 그 눈은…반갑지도 않은 거야?”
“아니…. 대답도 안 했는데.”
“흥! 노크는 한걸?”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하며 들어 온 것은 푸른 수녀복 위로 코트를 걸친 핑크빛 머리의 소녀, 레이디 필드였다.

“괜찮아? 기사님 옆에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응. 어쩐지 계속 걱정하시던 죄를 용서받으셨다고 하시는 것 같아서…그 뒤로 멀미도 좀 나아지셔서 이렇게 잠깐 허락받고 온 거야.”

아 볼리도라한테 부탁한 일이 제대로 처리된 모양이군.
전날 슬쩍  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여윈 모습이셨기에 빠르게 회복하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그래서 계속 질문.”
“…응?”
“내가 반갑지도 않은 거야?”
“무, 물론 반갑지.”
“흐응….”

레이디는  말이 진정성이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방문을 넘어왔다.
표정은 어두워도 발걸음은 경쾌하다.

“그런 것치고는 한 번도 안 찾고, 말이지?”
“미, 미안…좀 바빠서….”
“바빠? …배 위에서?”
“뭐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정확히 말하면 여자들을 만나느냐 바빴다만, 그리 말하면 왠지 머리 위로 벼락이 칠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근데 이 방 뭔가 이상한  없어?”
“…이상한 거라니?”
“아니. 뭐…달라진 거라거나?”
“지금 처음 들어왔는데?”
“아니면 그냥  방이랑 다른 거라도.”
“…응?”

레이디는 조금 의심쩍은 눈초리로 보면서도 일단 방 주변을 꼼꼼히 살펴 주었다.

“잘 모르겠는데? 구조는 일단 다 똑같은걸?”
“….”
“….”

그리고 ‘우리’는 눈을 마주했다.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용의 뿔이나 꼬리는 못 보더라도 신성력에 재능이 있는 성직자인 만큼, 그녀의 존재를 느끼거나   알았는데….

“거기 뭐가 있어?”
“아니 아무것도….”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나는 그리 둘러대며 레이디의 얼굴에 시선을 맞추었다.

“….”
“흠….”

레이디와 나를 번갈아 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한 소녀와 보이진 않지만 그런 소녀가 있는 자리와 나를 번갈아 보며 신음하는 레이디.

“….”

나의 어색한 침묵으로 인해 묘한 흐름이 계속되는 와중에 먼저 다른 행동을 보인 것은 유령 용 쪽이었다.

“앗!”
“꺅! 노, 놀랐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니. 아무것도 아냐.”
“….”

말없이 일어난 움직이기 시작한 녀석은 그대로 레이디의 몸을 통과하더니 뒤에 있는 벽을 그대로 통과해 밖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

나는 잠시 침묵하며 기다렸으나, 마치 진짜 유령처럼 아무런 막힘도 없이 밖으로 나간 그녀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의 방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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