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8화 〉성화국이에용 (178/190)



〈 178화 〉성화국이에용

섬 전체를 잠시 들어서 뒤집은 후에 다시 원래 대로 돌려놓으면 마치 스노 글로브 같을 거란 생각이 드는 도시였다.

제법 높게 쌓여 있는 눈도 눈이지만, 크고 작은 건물들이 추위 때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기자기한 장식품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저 녀석은 안 내려?”

처음 배에 오른 날처럼 불투명한 창가에 슬쩍 모습을 비치고 있는 불그스름한 인영을 보며 말했더니, 이데노아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덤덤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후…. 나중에 내리겠지. 저렇게 보여도 꽤 존경받는 성녀 전하니까.”
“흠….”

그러고 보니 알데나도 안 보이네? 둘이 같이 내리려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이지….”
“나, 나중에 물어보도록 해. 분명 다시 만날 테니까.”
“….”

생각보다도 떨리는 목소리.
다시 보니 그 이데노아가 팔짱을 끼고 어깨를 올려, 몸을 힘껏 움츠린 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추워?”
“훌쩍…그,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하나도 안 추워 보이지?”
“아니…. 물론 나도 추운데. 뭔가 배에 있을 때가  춥지 않았어? 어제 새벽이라던가.”
“그럴 리가…. 너…너무 추운 나머지 어디 고장이라도 난 거 아냐?”

이데노아가 사뭇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추위는 이곳에서 바닷가로 흐르고 있는 걸…. 찬 바람이 부는 바닷가임을 가정해도 중심부로 가면 갈수록 더 추워야 정상이야. 이곳만 해도 어제보다 두 배는 추운 거 같은데….”
“두 배까지는 오바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확실히 아무렇지도 않은  아니었다. 손가락과 귀는 얼어붙어 떨어질  같고 찬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피부가 베일 것 같은 추위를 느끼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엄청 추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싶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원래에 세상의 겨울과도 같은 날씨?

배 위에서 벌벌 떨며, 남극이나 북극 수준의 강추위를 상상했던 나에게는 이 정도면 그럭저럭 버틸만한 느낌이라 생각되는 추위였던 것이다.

“흐응…. 과, 과연 내가…훌쩍. 으…. 과장하는 걸까?”
“응? 피, 피스?”

이데노아가 부들부들 떨며 가리킨 방향을 보니 먼저 뛰어 내려온 필라피스가 눈 덮인 바닥에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평소처럼 유연하던 꼬리는 축 늘어트린 채….

“피스! 너 괜찮아?”
“으…훌쩍…흐힌님….”

바로 달려가 끌어안고 몸을 올렸더니….
차가운 눈을 묻힌 채, 붉어진 얼굴로 코를 훌쩍이며 눈을 감은 피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인님…이, 이 몸…더, 더는 무리인 거다…. 섬으로…섬으로 돌아가는 거다….”
“피스야! 그건 무리야! 피스야!”
“흑…넘흐해….”

몸이 상당히 차다.
 정로도 말할 수 있는 거 보면 괜찮겠지만….

“그러니까 왜 눈 위에 넘어져 있어?”
“흑…바, 발이 제대로 안 움직…훌쩍…꼬여서 결국 너, 넘어졌는데에…모,못 이러…나겠는 거다아…흑.”
“음….”

서럽게 우는 눈물방울이 피스의 볼을 타고 흐르며, 얼어붙어 떨어졌다.

바로 저렇게 된다고? 피스 얼굴에 서리도 좀 붙어 있고…진짜 그렇게 춥나?

“일단 내 목도리랑 코트 한 벌 벗어 줄 테니까. 참아….”
“흑…아,  돼…. 그러면 주, 주인님…어러셔…주, 주혀 버리는 거다아….”

낮에 안 깨워주고 혼자  먹으러 간  핑계로 삼아 괴롭혀 주려고 했더니 불쌍해서 못하겠다.

“…일단 너 걱정이나 하세요.”

나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을 살살 털어낸 후, 입고 있던 목도리와 옷을 벗어 필라피스에게 입혀 주었다.

“좀 괜찮아?”
“아니…훌쩍. 귀가 아파…흑….”

중증이군. 이번 일이 전투와 관련 없는 일이라 천만다행이었다.

“가는 길에 방한용 귀마개 파는 거 있으면 사자….”

아무리 그래도 섬에서는 안 팔았지만, 1년 내내 추위가 한창인 이곳에는 팔지 싶었다.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 보니 귀와 머리를 동시에 보호하는 모자도 많이들 쓰고 다니고 있고….

뿔이 문제겠지만, 지금 그녀의 꼬리 보호대처럼 모자에 구멍을 뚫어 바느질  하는 식의 수선은 나에게도 가능하니까.

“아,  푹신한 머리카락이 이렇게 뻣뻣해지고…네가 춥긴 꽤 춥구나.”
“으…훌쩍. 추운 거다아…그, 근데 주인님 진짜 괜찮은 거다?”
“….”

두꺼운 겨울옷을 두 겹이나 껴입고도 여전히 벌벌 떠는 필라피스가 물었다.

“나도 춥긴 춥지….”

물론, 이 또한 진심. 하지만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지금은 입고 있던 코트까지 벗어 주었음에도 추위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훌쩍…흥미롭군.”
“음?  뭐가….”
“그, 그녀의 힘이…추, 추위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도움을 주고 있는 거 아닌가? 그, 그렇지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느새 다가온 이데노아가 벌벌 떨며 말했다.

 정도인가?

“힘이라….”

물론 집히는  있었지만…아용이의 힘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

나는 슬쩍 옆쪽을 돌아보며, 조용히 심장을 만졌다.
평소와 같은 용의 심장이 힘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데노아 나 지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안된다.”

즉답. 혹시 내가 하려던 질문을 알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올려 보니,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뚫어지게 향하고 있는 장소가 보인다.

“추, 추워서 가게에 들어가 있어야겠으니…묻고 싶은  있으면 따라오던가.”

작은 음식집이었다.
아마 디저트나 따듯한 차 같은 후식 위주의….

“그래…. 필라피스도 데려가 그럼….”
“주…인님은?”

쓰러져 있는 필라피스를 어떻게든 일으켜 이데노아에게 건네주자, 피스가 코를 훌쩍이며 다시금 나에게 물었다.

“난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들한테도 제대로 인사하고 오려고 정리하느냐고 제대로 인사 못 드렸거든.”
“…끝났지? 어서, 어서 가자.”

상당히 급해 보이는 이데노아가 마치 상처 입은 동료를 짊어진 패잔병처럼 절뚝거리며 가게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
“지금 반응으로 보면…. 넌 용들도 못 보는  맞겠지?”
“….”

배에서 내려온 순간부터 다시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그 뒤로 그냥 없어진  줄 알았어.”
“….”
“어디 다녀온 거야?”
“….”

안 되겠다. 여전히 말도 없고 무표정해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여전히 발도떠 있는 상태고….”
“….”
“아니. 딱히 바닥에 붙이고 있으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이 얼음으로 빗은 듯한 유령용은 나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쉴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봐도 흥미진진해 보이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혹시 여기가 신기해?”
“….”
“보는 건 처음?”
“….”
“진짜? 멀리서 본 적도 없고?”

세 질문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반응만 보면 마치 진짜 이 도시를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두 번째 용이…아닌가?

홀로 떨어져 산다 해도 도시를 모르진 않을 거 같은데.
여기 같은 용도 있고….

아니 애초에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짜 죽은 용이랑 대화하고 있는 거면 어쩌지?

“자용님? 거기 괜찮으십니까?”

깜짝이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를 돌았다.
생각이 통했는지 어느새 배에서 내린 금발의 여기사님이  곁으로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전 멀쩡합니다.”
“옷도 너무 얇으시고…멍하니 서 계셔서 괜찮은가 싶었습니다.”
“아, 옷은 필라피스에게 벗어 줘서요.”
“그렇군요. 그런데 춥진 않으신가요? 오늘은 저도  쌀쌀할 정도로 추운 것 같습니다만….”
“제, 제가 추위에 강해서….”
“이 시기에 이 정도면 현지인에게도 꽤 추운 날씨인데….역시 굉장하시군요.”

딱히 설명할 방법도 없어 그렇게 말하자,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씀 주셨다.

“하여튼 다시 만나 뵈어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같이 못 내리는 점을 사과드리고 싶었는데요. 사정은 아마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네. 원래라면 3박 4일은 걸을 예정이셨다면서요?”

내 말에 기사님은 얼굴을 긁적이시며 멋쩍은 웃음을 보이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네…목적지가 산에 있다 보니. 그 아래에 있는 해로로 가면 훨씬 시간이 줄긴 하거든요. 특히나 이번에는 함께 가는 손님이 있어서….”
“아, 물론이죠.  그래도 체력이 약한 애라서 그렇게 올라갔으면 진짜 죽었을걸요?”
“하하….”
“전 괜찮으니까 레이디가 편한 쪽으로 해주세요.”

기사님은 내 말에 꾸벅 고개를 숙이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예전에 필드가에 묵은 적이 있어서요. 그때 제인과 함께 신세  많이 졌었지요.”
“설마…. 그녀가 돌봐주었다던 강아지가…?”
“네?”
“아니. 아닙니다. 역시 생각이 지나친 거 같아요. 죄송하군요.”
“….”

갑자기 볼을 긁적이며 사과해오는 기사님은 이어  어깨를 잡으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자용님….”
“네, 네?”
“이전 말씀드린 대로 제가 멋대로 관여 드릴 만한 내용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파멸을 부를 수 있는 관계는 정리하시어 바르고 건전한 관계를 구축하시는걸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 네….”
“그리고 피스님 잘 부탁드리고요.”
“….”

다시 한번 피스로 경고를 받았다.
정말 이전 수준으로 그녀를 울리게 되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칼들이 날아오겠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또 있어요?”
“레이디 양이랑은 정말 그런 관계가 아니신 거겠지요?”
“그, 그건 정말 아니라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미 연인이 둘이나 있는 나로서는 쉬이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흠….”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한참을 내 눈동자를 마주한 기사님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아무리 봐도  분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요.”
“….”
“그래도 자용님의 레이디양을 생각해주시는 마음이 그러한 것이 아닌 순수한 호의라 안심했습니다.”
“말씀하신 관계적 의미로요?”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자용님의 순수한 호의를 느끼고 싶었다…말해두지요.”
“네?”
“자용님의 저희의 은인이시지 않습니까. 이래 보여도  자용님을 꽤 존경하고 있거든요. 존경하는 자의 존경하는 일부분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

이건 또…갑작스럽고 직설적인 호의였다.
여태까지 받아온 애정과는 다른 것이지만….
충분히 과분할 정도의 것이기는 하여,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렸다.

“후후. 그러면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은 없지만, 성녀 전하가 내리시는 즉시 출발 예정이라고 하니까요.”
“네. 그동안 감사….”
“야, 야만인!”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마지막 인사를 끝내려던 차에 들려온 목소리.

“저 녀석?”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배에서 내려 나를 향해 뛰어오는 녀석이 보였다.

“자, 자용!”
“엇, 야!”

나를 향해 번쩍 뛰어드는 작은 수녀 아가씨.
최근 필라피스에 의해 단련 아닌 단련이 되었던 나는 이 정도 추진력은 여유롭게 받아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아 주었다.

“야, 너 위험하게….”

습관적으로 마치 필라피스에게 그러하듯 허리와 엉덩이를 강하게 감싸 안고 말하자, 뺨과 턱에 올려진 손바닥이 나의 얼굴을 돌렸다.

“….”

그리고 다른 뺨에 느껴지는 따스한 숨결….
이어지는 귀엽고도 부드러운 살과 살이 닿는 감각이 퍼져나갔다.

“너…이거 나중에 후회할걸?”
“후회는 진작하고 있어 바보야. 나중에 언니한테 뭐라 말하겠어?”
“그럼….”
“한 달!”

당황하는 내게 레이디가 말했다.

“응?”
“아니. 이주 안에 배울 테니까!”

힘껏 무리하느냐 빨개진 얼굴로.

“전에 말했던 거…알겠지?”

다시 한번 약속을 받기 위해서였다.
작은 몸이 살짝 떨렸다.

“…알았어.”

이렇게 대답해 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레이디는 다 팔을 벌려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추위는 덜 느껴지지만, 온기는 그대로 느껴져 다행이었다.

“….”

기사님의 눈빛도 조금 덜 따갑게 느껴지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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