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에필리아 vs 에르딘 - (4) (74/94)



〈 74화 〉에필리아 vs 에르딘 - (4)

몸을 완전히 회복한 나는 곧장 마을로 나가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최우선적으로 카잔과 치프의 무덤을 만들어 장례를 치러줬다.
이미 폭발로 인해 녀석들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기에 작은 흙 무덤을 만들고, 녀석들의 유품을 그 위에 올려주었다. 카잔의 무덤엔 트롤왕의 징표인 뼈 목걸이를, 치프의 무덤엔 깃털 장식모자를 올려둠으로써 충직한 두 부하의 유지를 기렸다.

다른 트롤들은 장례라는 개념을 잘 모르는 듯했다.
전투에서 죽는 것 자체가 명예롭고 의미 있는 일이었기에, 장렬히 전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장례의 의미가 되는 것이었다. 대부분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슬퍼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는 듯 했다. 한 녀석만 빼고…….

“카잔은 바보인 츄럴……. 나를 그토록 좋아했다면 살아 돌아왔어야 하는 츄럴! 식물녀석의 꽃잎이라도 괜찮으니 제대로 된 청혼만 했더라면…….”

취락 내 최고미녀 티키만이 그의 무덤 위에 엎어져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마음 같아선 나도 카잔의 무덤에 큰절을 두 번 올리며 질질 짜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며 참았다. 그리곤 속으로 홍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

에필리아와 에르딘도 이순간만큼은 정숙한 모습을 보였다.
평소의 에르딘이었다면 뭣 하러 트롤들의 장례까지 치러주냐며 이종족 혐오를 선보였겠지만, 그녀도 이젠 많은 것을 깨달은 것 같아 보였다.

원래대로의 계획이었다면 녀석들의 죽음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갈 길을 갔을 텐데, 뜻밖의 희생으로 목숨을 빚졌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록 지금의 나는 카잔 정도의 상남자가 되진 못했지만, 목숨을 구해준 자의 은혜까지 저버릴 정도의 무뢰배도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들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내 자신 스스로가 용납이 안됐다.
그랬기에 굳이 트롤들의 마을로 돌아와 그들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이다.

‘내가 인정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비내츄럴이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라.’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 뒤 트롤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떠날 채비를 위해 살라만더와 여분의 식량, 필요한 물자를 챙기도록 지시했다.

몇몇 녀석들은 어딜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저 맨드레이크 잔당을 토벌하러 가노라고 답했다.

“츄, 츄럴……. 츄럴왕이 자리를 비우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츄럴?”
“음……. 대리자를 뽑아 둬야겠군. 다들 집합!”

너무 대책 없이 떠나는 것도 녀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 나는 모든 트롤들을 집합시켰다.

집합시킨 이유는 새로운 트롤왕을 뽑기 위함이었다.

“오늘 체력 시험을 통해 가장 강한 츄럴 전사를 뽑겠다!”
“츄, 츄럴??”
“가장 강한 츄럴! 목숨을 건 전투! 살아남는 게 강한 전사가 아닌 츄럴?”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들 목숨을 소중히 해라!”

급한 대로 녀석들을 모아 체력 검정 시험을 진행했다.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오래 달리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3대 측정을 통해 가장 강한 트롤 전사를 선별했다.

어디까지나 체력에 국한 된 선별과정이었지만 아무렴 어떠하리.
나는 대충 선별된 녀석에게 내가 없을 동안 나를 대신해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매일매일 내가 지시한 체력단련을 게을리 하지 말 것도 신신당부했다.

“튜럴왕 내츄럴! 진정한 수컷의 말! 존명한다!”
“그래. 나대신 잘 좀 부탁한다. 체력단련도 꾸준히 하고!”

나는 카잔에 비하면 한없이 온순해 보이는 녀석을 대리자로 뽑았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 뒤론 준비된 살라만더를 타고서 길을 나섰다.
녀석들은 내가 이곳을 떠나는 건 줄 몰랐기에 딱히 배웅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저 티키만이 내가 마을을 나설 때 뒤에서 조용히 손만 흔들어 보였다.

‘잘 있어라. 나의 작은 헬스왕국이여.’

아무튼 예상치 못한 체류로 많은 시간을 소비해버렸다.
이곳에서 인간의 마을로 가려면 이틀 안에 도착한다고 했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저녁쯤 이곳을 벗어나 부지런히 인간의 마을로 향했다.

“드디어 트롤들의 마을에서 벗어났네요.”
“그러게 에필리아. 망할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진짜 큰일날 뻔 했어.”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왜 망할 주인님인 건데?”
“또 싸우신다면 이동을 멈추겠어요. 그리고 절대로 제 가슴 만질 생각 따윈 하지 마세요!”
“아앗, 미안 에필리아…….”
“나도 미안… 싸우려던 게 아니라 내 호칭이 이상해서…….”

살라만더의 고삐는 에필리아가 쥐고서 몰고 있었다.
자연과의 교감능력이 뛰어난 에필리아가 자유자재로 살라만더를 몰 수 있었기에 그녀가 운전대를 잡은 것이었다.

그녀의 운전실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마차 보다 살라만더의 움직임이 부드럽고 안정적이었던 건지 멀미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주인님아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뭐야? 또 시비를 걸 거면 대답하지 않을 거야.”
“그런 게 아니고… 나하고 에필리아 중에 누가 더 좋냐는 말…….”
“아니, 그거 끝난 얘기 아니었어?!”

대뜸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꺼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 분명 그런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쿨하게 넘어가지 않았는가?

“다른 의미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하달까……? 나보다 에필리아를 더 좋아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냥 직접 주인님의 입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은 거야.”

나는 그녀가 말은 이렇게 하고서 행동은 다를 수 있었기에 눈치를 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올 경우 돌변하여 나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돼.”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의 태도는 진실돼 보였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냥 궁금할 뿐이야. 나보다 에필리아가 더 좋다면 나를 더 좋아하도록 노력하고 바뀌면 되니까…….”

으음…….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
에르딘은 노력을 한다 해서 바뀔 수 있는 결함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슴의 유무차이가 극심한데, 이것은 마력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문제임이 분명했다.

“그럼 나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나는 분명히 너희 둘을 똑같이 좋아한다고 말했지? 그런데 믿지를 않았잖아?”
“그렇지?”
“그래서 결국 너희들 멋대로 먼저 가게 만드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걸로 하자고 하고선 달려 들었지?”
“맞아.”
“혹시 결과 기억해?”

그날 분명 나는 필사적으로 사정을 참다가 결국 두 엘프들의 얼굴에 사정을 해버렸었다.

“나는 가버리고 난 뒤에 기억이 없어서 잘…….”

맞다. 이 녀석 제대로 절정을 느끼고선 기절을 했었지.

“에필리아!”
“넵?!”
“그저께 아침에 했던 일 기억나?”
“에엑? 그… 그날 일은 갑자기 왜요?”

에필리아 녀석 지금껏 다 듣고 있었으면서 모른척한다.
에르딘에게 그때 이야길 꺼냈을 때부터 이미 귀를 붉히고 있었으면서…….

“그날 내가 마지막에 어떻게 사정을 했는지 기억나?”
“그… 그야 물론 얼굴에…….”
“누구의 얼굴이었지?”
“저와… 에르딘님의 얼굴에 동시에…….”

그 말을 끝으로 에필리아는 말없이 고삐를 꽉 쥐고선 열심히 살라만더를 몰았다.
이게 그렇게나 부끄러운 질문이었나?

“어때? 들었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아직도 모르겠어? 먼저 나를 가버리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승부에서 너희 둘이 동시에 날 사정시키도록 만들었어. 그 말은 즉, 너희 둘 모두 똑같이 좋아한다는 뜻이야.”

솔로몬도 나의 논리를 들으면 분명 부랄을 탁 치고 감탄할 것이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그래! 이렇게 하려고 얼마나 내가 힘들었는지 알아?”
“흐음… 설득력 없지만 노력이 가상하니 봐줄게.”
“안 봐줬으면 뭐, 때리려고 했어?”

에르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냐, 이제 주먹부터 나가는 버릇은 고치려고. 말했잖아? 이제 주인님이 싫어하는 그런 행동들 하지 않겠다고.”
“정말인 거냐……?”
“그래. 아무튼 나도 에필리아만큼 좋아해줘서 고마워, 난 주인님이 진심으로 좋아.”
“어… 어. 그, 그래. 나도 좋아해. 크흠!”

대뜸 상냥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해버리니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후 우리들은 서로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밤이 늦도록 계속 전진했다.
잠을 덜 자는 경우가 있더라도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했었다.

“이쯤에서 야영을 하도록 할까요?”
“좋아. 주, 주인님은?”
“어… 그래. 나도 좋아…….”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우린 계속 함께해야만 한다.

대충 텐트를 치고 말없이 식사까지 마쳤다.
트롤 마을에서 닭고기들을 꽤나 챙겨온 터라 단백질 수급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저기, 두 분… 무슨 일 있으세요?”

어색한 기류를 눈치 챈 에필리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래 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한 것 같았다.

“아, 아니야! 우리 아주 사이 좋아. 하하하!”
“맞아 에필리아! 그나저나 오늘 불침번은 어떻게 할까?”
“…….”

둘 다 굉장히 어색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누가 봐도 어색한 티를 다 내고 있었다.

“오늘 살라만더를 모느라 고생했는데, 차라리 불침번까지 쭉 선 다음에 푹 잠드는 게 어때, 에필리아?”
“음, 좋은 생각이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에르딘님이 불침번을 서시면 되겠어요.”
“좋아. 주인님은 어때? 불만 없지?”

나는 발언권도 없이 순서가 정해졌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중간에 일어났다가 자는 경우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ㅡ끄덕

나는 고개만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먼저 자볼게. 무슨 일이 생기면 깨워줘, 에필리아!”
“고생해라.”
“좋은 밤 되세요! 부디 두 분끼리만 재미보지 마시구요.”
“뭐, 뭣?!”

에필리아도 이제 못하는 말이 없었다.
최음초를 섭취하고 나서 조금 성격이 대담해졌다 해야 하나?
나의 놀란 표정을 보고서도 그저 베시시 웃어 보였다.

“주인님, 오늘은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냥 자자.”
“무슨 소리야. 애초에 잘 때 무슨 짓을 했다고…….”
“다, 닥쳐! 잘래.”

텐트에 들어와 누운 에르딘이 김칫국을 마시더니 등을 돌리고 눕는다.
그러고 한참을 누워있었을까…….

“에르딘, 자냐?”
“…아, 아니.”

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왔던 터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깊은 밤도 아니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뭔데?”

잠도 안 오는데 노가리나 까다가 잠들어야겠다.

“그… 얘기 안 해줘도 되는 거긴 한데…….”
“응?”
“듣고서 화내지 않는다고 하면 얘기할게.”
“아,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화 안내.”

지금 꺼내려는 얘기는 높은 확률로 에르딘이 발작하며 화를 낼 가능성이 컸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첫 경험 썰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어?”
“뭐?!”

등지고 누워있던 그녀가 거칠게 반응하며 나를 마주 본다.

“아, 아니… 그냥 너무 궁금해서……. 이런 기회가 오면 말해준다고도 했었고, 나 말고 누가 너같이 아…리따운 엘프와 정이 통했나 궁금해서…….”

혹시나 쳐맞을까 봐 저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듣기 좋게 말을 포장하긴 했지만…….

“후우……. 그래! 말해주기로 했던 거니까 말해줄게.”
“진짜?!”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는데…….”
“뭔데! 누구야 도대체? 말해줘!”

에르딘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이 절벽가슴과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물론 매력이 있는 엘프긴 했지만 누가 나보다 먼저 그녀를 차지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이니까… 솔직하게 말해주는 거야.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해선 안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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