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69화
상대가 강자이니만큼 모든 아바타를 소환한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정도로 헌터의 등급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음.”
하지만 상대는 싸우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지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방법이 없으므로 나는 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일행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선글라스를 쓴 눈으로 내 뒤를 바라본다.
그 모션이 역시나 싸우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자기보다 약한 헌터라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테니 싸우려고 하면 내 기선을 제압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에게서는 그런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남자가 양손을 들어 파닥파닥 저으면서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거니까요.”
나는 그의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연신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 경계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쓰레기 게이트’를 이용한 것은 처음이라, 이곳 시스템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사업이니까, 상대는 고객을 대하듯 나를 대할 것이다.
돈을 지불한 것은 내가 아니지만 어쨌든 이용요금을 내고 여길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여기는 공기가 탁하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남자가 제안했다.
나 역시 일 초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으니까 그의 제안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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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에서 밖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즉 컨테이너 안에서 남자는 내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이동구랑 처음 여기 들어왔을때는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곳은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한쪽에는 정수기까지 있었다.
‘응?’
저건 커피 메이커인가?
왜 이런 불법적인 장소가 이렇게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 그런 것이겠지.
필요한 경우 고객과 직원 간의대화가 있을 수 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나는 빨리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함께 게이트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가 어디에 있다고 설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상대는 아마도 A급 헌터일 것이고, 그 하나만 상대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 조직이 얼마나 거대할지, 얼마나 많은 실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커넥션이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편하게 계십시오. 커피는 어떻게 드십니까? 아메리카오? 아니면 라떼?”
남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로 미루어 꽤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전형적인 접객용 미소를 띠고 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라떼요.”
아닌 게 아니라 이세계에 건너가서 못 볼 꼴을 보고 와서 속이 좀 매스껍기는 했다.
‘쓰레기 게이트’ 안에서 마신 공기도 깨끗하지 않았고.
“좋은 결정이십니다. 제가 라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거든요.”
거짓말이 아닌 듯, 남자는 능숙하게 머피 메이커를 조작했다.
정수기에서 뽑아낸 물을 넣고, 기계 안에서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곧 컨테이너 안에 커피의 향기로운 향이 가득 차고, 거품 많은 우유가 쏟아져 나오면서 증기가 일어났다.
어울리지 않지만 마음이 안정되었다.
뭔가 능숙한 상대에게 심리가 조작되고 있다는 불편한 기분도 있었지만, 뭐 이 상황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남자는 자기 몫의 커피와 함께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 맞은 편에 앉으면서 친절한 미소와 함께-그랬을 것이다- 말했다.
“드시죠.”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자기가 먼저 커피를 마셨다.
이유는 이 커피에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이 상황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남자를 따라 커피를 마셨다.
“음.......”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얼굴에 쓴 불법 조직에 가담한 자가 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맛있는 커피였다.
얄궂게도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대접받았다는 사실에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크게 허물어졌다.
“괜찮죠?”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만큼만 마스크를 내린 남자가 말했다.
“얼굴을 가린 것은 이해해주십시오. 제가 하는 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서요.”
“네, 괜찮습니다.”
“고객님은......”
남자는 내 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말했다.
“이곳을 이용하는 게처음이시죠?”
“네.”
“일행분은 30분만큼의 이용요금만 결제했습니다. 추가요금이 발생했는데, 저희는 30분씩 연장하는 시스템이라......”
“알겠습니다.”
나는 결국 돈 얘기인 건가 싶어서 안심하고 제깍 대답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남자가 웃음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요금을 치르십사 해서 이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의심 많은 기색을 보이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아마도안에서 사고가 난 모양인데, 이런 경우 보안을 위한 추가요금이 발생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요금을 치르시라고 이런 말씀을드리는 것은 아니고요.”
남자가 자꾸 돈 이야기를 하면서 요금을 치를 필요가 없다고 하니까 헷갈렸다.
대체 뭐 때문에 나를 잡아두고 있는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고객님은 이곳이 처음이시니까 신규가입을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허공에 손을 뻗더니 태블릿 PC를 꺼냈다.
화면을 몇 번 조작하여 내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익숙한, 인터넷 사이트 가입 양식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그것보다 훨씬 간소한 양식이기는 했다.
실명이나 주민번호 같은 것도 필요 없는 듯, 개인정보는 핸드폰 번호와헌터등록번호 정도만 제공하면 되는 것 같았다.
물론 헌터등록번호만 알면 결과적으로 중요한 개인정보를 대부분 제공한 것이 되겠지만.
“혹시 이번 한 번만 이용하는 것으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가입 고객과 동행한 것으로는 가능한 말씀입니다만 이렇게 되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남자가 정말로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물론 그것도 전부 고객 접대용이라는 느낌이 물씬 났지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서 한 사람만 밖으로 나왔는데,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겠지.
나는 뭔가세게 덜미를 잡힌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해서 더 그렇다.
그만큼 내가 헌터계의 불법적인 영역에 무지하다는 증거겠지.
이동구를 이세계에 떨어뜨리고 왔지만, 현실에서의 문제는 다 해결된 게 아니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가입 양식을 작성했다.
“처음이라 꺼림칙한 기분이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업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요. 전국에 지점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정상적인 루트로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나 유흥 쪽의 제공도 해드리고 있습니다. 뭐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확실히불법적인 것이기는 해도 시스템은 정상적인 사업의 틀을 갖추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불법이기 때문에 더 조심성이 많을 것이다.
“이름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희 고객분들 중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희에게 일을 맡기면 뒷일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기야, 이런 세상이니까 오히려 불법 조직이 합법적으로 사업하는 기업들보다 더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었다.
남자가 말했듯 마음만 먹으면 금단의 경험들을 할 수 있을 거니까.
그것들을 원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방금 두 사람이 게이트에 들어가서 한 명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하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살인조차도 별일이 아닌 것이다.
이 바닥에서는.
나는 끝내 거부하고자 했던 세계에 결국은 발을 딛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저항감은 없었다.
방금 이세계에 남자 하나를 금단의 영역에 떨구고 온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지만.
간단한 양식 작성을 마친 나를 보고 남자가 웃었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는 가슴이 싸해졌다.
이 사람도 나를 알고 있구나.
그 출처는 당연히 <코리아헌터즈>일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운영하는 길드가 주목을 받고 승승장구하길 바랐지만,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지기를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동구 일도 그렇고, 불법 조직의 조직원이 알아본 것도 그렇고.
반갑지 않은 방식으로 그 일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도 아닌가?’
이연화가 나를 찾아온 것이나 김소희가 가입하게 된 상황을 놓고 보면 반드시 그게 안 좋은 결과만 만들어낸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쓰레기 게이트’ 관리 업체에 고객으로 가입하게 된 것도 꼭 나쁜일이라고만 보기 어려울 것이다.
“신규가입고객에게는 첫 회 이용을 무료로 해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보안과 관련된 부분까지 무료서비스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특별한 고객이신만큼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슨 특별한 고객이라는 것인지.
차라리 요금을 받았으면 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