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70화
나는 여전히 내 앞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조직과 인연을 맺느니 차라리 돈을 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 하나를 없앤 것인데 어쩌면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구린 분위기를 풍기고 있긴 하지만 내가 상황을 무마하는 것보다 이 조직이 이동구가 사라진 일에 대해 보안을 책임지는 편히 훨씬 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조직에 맡기고 난 뒤에 나는 이동구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
다시 이동구를 찾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한번 들여다 보았던 금단의 구역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고,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이동구가 살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는 내가 가입한 사실에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이렇게 저희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기쁜 일인데, 혹시 따로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나는 최대한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더 이상 이 남자와 이 남자가 속한 조직에 깊숙이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의뢰하고 싶은 일 같은 건 없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났다.
"혹시 사람 뒷조사 같은 것도 해 주시나요?"
"자랑은 아니지만 그거야말로 저희 주특기이라고 할 수 있죠. 캐내고 싶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남자가 상체를 기울이면서 물었다.
굉장히 흥미가 동하는 기색이다.
나를 이미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특별한 고객이라고 하는 것도, 뭔가 필요 이상으로 나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최근 들어 나만큼 화제를 모은 헌터도 없으니까.
<코리아헌터즈>와 했던 인터뷰, 내가 술김에 단 댓글, 온리갓이라는 창피한 파티 이름.
그런 것들을 떠나서 C등급의 헌터 혼자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이 게이트에 들어간 것 자체가 기록적이었다.
나를 조롱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조금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이게 상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런 종류의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단순 호기심에 불과한 관심이었으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기도 했다.
"기자...... 뒷조사도 되나요?"
"하하하."
내가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남자는 즉시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코리아 헌터즈’ 김수연 기자 말씀이신지요?"
나는 뜨끔했다.
기자라는 말 하나에 여기까지 꿰뚫어 보다니.
내가 최근 겪었던 일을 아는 입장이라면 당연한 유추일 수도 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한 번 던져나 본다는 기분으로 물은 것이었다.
<코리아 헌터즈>는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헌터 언론기관인 만큼, 아무리 규모가 있는 불법 조직이라고해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이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C등급 헌터에 이제 막 새로 파티를 등록한 내가 의뢰한다고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이죠. 이미 우리 쪽에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쪽 기자들은 원한을 많이 사니까요. 의뢰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너무도 쉬운 반응이돌아왔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남자가 속한 조직이 대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의뢰하겠습니다."
비용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이런 식의 의뢰를 해 보는 게 처음이니까.
'쓰레기 게이트'에 들어간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내 등에 비수를꽂은 버르장머리 없는 놈에게 복수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제까지는 인연이 없던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감정에 발을 디뎠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기분이 어떠냐 하면......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신규가입 서비스는 받으셨으니까 이번 의뢰는 비용이 좀 듭니다만, 괜찮으시겠어요?"
"일단 가격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비용이 달라집니다. 저희가 정한 등급과 기준이있거든요. 음...... <코리아헌터즈> 기자라면 직급에 따라서 A부터 C등급까지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김수연 기자 정도면......"
나는 그녀가 B 등급은 되지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뱉어진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C등급이지요."
"네?"
"사실 그 아래 등급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코리아헌터즈>라는 배경이 있으니까요."
"......"
나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C등급으로 분류된 사람의 뒤를 캐달라고 하는 거면 당연히 의뢰비가 적게 들 것이다.
그 점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있지만, 나를 그토록 힘든 상황에 몰아넣은 것이 고작 C등급 기자였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농락당할정도의인생이라니, 사실 이동구도 이제 막 파티를 만들어 순위권의 끝자락에 오른 헌터일 뿐이었다.
나는 이 정도 인간들에게도 농락당하는 수준인 것이다.
요즘 현실과 이세계로 오가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겪느라 내 실질적인 처지를 자각하지 못했다.
아니,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오히려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입니까?"
"여기서도 정보의 질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집니다. 어느 정도 수준의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정보의 수준......
다소 문답이 길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시스템이 세분화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뢰감을 자아냈다.
나는 금단의 영역에 떨어진 이동구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 여자를 끝장낼 수 있는, 다시는 저를 못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의 정보를 원합니다."
"음......"
남자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헌터님은 그렇게 심성이 고약한 분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그는라떼를 마시느라 살짝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올렸다.
"최근에 헌터님께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군요."
그의 말은 내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조직이 내게 진지한 관심을 갖고 캐고 들면 알리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 알리게 될 테니까.
"사람이 바뀌는 계기라는 것은 누구나 인생에 한두 번은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진짜로 변하느냐는 기본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이지만 당시 처한 환경, 그리고 운에도 좌우됩니다. 제 생각에 헌터님은 확실히 변화를 선택하신 것 같군요."
표정이 완전히 보이지 않아서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렇게 자기네 조직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김수연에게 쉽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환경이나 운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김수연 기자를 끝장낼 수 있는 정보...... 알겠습니다. 그러면 정보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C등급 중에서도 가장 고가의 의뢰가 되겠군요."
남자는 팔짱을 풀고 내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바짝 펴진 손가락들을보면서 나는 그가 5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5만 원은 아닐 것이고,
“5백만 원입니까?"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사람 하나를 끝장내는 정보인데 오백이면 너무 적다.
"5천만 원이군요."
"혹시 의료비가 부담되시면 절충하는 방안도 있습니다."
"절충이요?"
정보의 수준을 조절하는건가?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달랐다.
다르다기보다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저희는 전국에 지점을 가진 기업입니다만, 직원 수는 실상 많지 않습니다. 저희가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저절로 호기심이 생겼다.
정말로이런 불법 조직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 것일까?
"저희는 고객님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저희가 헌터님들을 위해서 일하기도 하지만, 헌터님들이 저희 일을 도와주시기도 하지요."
"네?"
"헌터님이 저희 일을 도와주시면, 가격에 대해 흥정할 여지가 생깁니다. 아니, 오히려 저희가 돈을 드릴 수도 있지요. 물론 후자의 경우 대다수 헌터님들이 포인트 적립 쪽을 선호하시기는 하지만요."
헌터계의 불법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설마 이런 식의 말을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남자의 말은 즉, 나한테 역의뢰를 하겠다는 건가?
당연히 5천만 원은 적지 않은 액수였다.
최근 들어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고는 해도, 5천만 원을 줘 가면서까지 김수연을 끝장낼 가치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그 여자와는 이 이상 인연을 맺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김수연은 악질입니다. 그 여자가 하는 일은 주로 열심히 살아보려는 헌터들을 철저하게 짓밟는 것이지요. 그것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등급이 낮은 헌터들만요. 그런 일을 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여자입니다. 누군가가 망가지는 그림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내지요. 특히 일반인들은 헌터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상당한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본인의 커리어나만족을 위해서 이용한다면, 도를 넘는 짓이겠지요. 김수연을 이대로 둔다면 헌터님은 더 큰 피해를 입으실 겁니다. 그 여자는 한번 재미를 본 상대에 대해서는 끝까지 짜 먹으려고 하거든요."
내가 생각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남자가 한 말대로 김수연이 그런 변태 성향을 가졌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척 맛 좋은 멋잇감일 것이다.
당장 내 인터뷰가 올린 조회수나 관심도가 무척 높으니까.
“제가 뭘 하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