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82화
- 하하하! 그거 정말입니까? 박은혜가 헌터님한테 뿅 갔다고요?
나는 약간 심란한 마음이 있었지만 남자가 웃는 것을 보니 조금 허탈해졌다.
하기야 웃기는 일이기는 하다.
천하의 성도착자가 이렇게 나한테 빠졌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랑스러워해야 할 부분이려나?
물론 미친 사이코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는것은 사양이었다.
"남은 심각한데 웃음이 나옵니까?"
- 하하하.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일을 잘해 주셔서 놀랐습니다. 5분 정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실컷 웃고 나서 그냥 전화를 끊을 거면 뭐 하러 전화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반응에서 생각보다 그가 나를 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거대한 불법 조직에 소속된 남자가 뭐가 두렵겠는가?
신경을 써야 한다면 내 쪽이겠지.
나는 혼자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연락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에는 나보다는 남자가 훨씬 전문가일 테니까.
어쨌든 그의 반응이 좋은 것을 보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정말로 딱 5분이 지나서 남자가 연락했다.
"여보세요?"
- 방금 김수연 건으로 의뢰했던 <코리아헌터즈> 사람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남자는 내게 자기가 세운 계획을 말해주었다.
"정말요? 그렇게 해도 되나요?"
- 네, 문제없습니다. 핵심은 김수연을 쳐내는 거니까요. 요는 그녀가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뭐, 정 안 되면 극단적인 방법도 생각해야겠지만 헌터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시지 않습니까?
극단적인 방법이라면 역시 죽이는 거겠지.
김수연이 내게 한 일은 죽이고 싶도록 미운 짓이기는 했지만, 역시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는 것과 실제로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게다가 나는 남자가 말해 준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라면 김수연이 딴생각을 품지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계획을 세워서 <코리아 헌터즈> 쪽 사람과도 대화를 나누었다니.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고 할까?
나는 김수연을 매장해달라고 의뢰한 <코리아 헌터즈> 쪽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물어본다고 해도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신경 쓰이는 것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쪽에서는 이 일을 하는 게 저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아무리 <코리아 헌터즈>가 큰 기업이고 커버하고 있는 헌터의 범위가 넓다고 해도 나와 관련된 기사는 상당한 화제를 모았었다.
그것을 <코리아헌터즈> 사람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김수연 건을 처리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이왕이면 그쪽에서는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으면 했다.
김수연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김수연이 개인적으로 기획한 일이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사이트에 싣도록 승인한 것은 <코리아헌터즈>다.
나는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감정이 좋지 않았다.
- 네, 제가 그쪽에 알렸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깜짝 놀랐다.
역시 범죄 집단에 속한 사람은 믿을 게 아니었다.
나에게 말하지도 않고 그쪽에 개인정보를 알렸다고?
물론 의뢰자 입장에서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바닥은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 게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중개자가 있는 것이고.
- 헌터님.
남자가 타이르는 어투로 말했다.
- 한국에서 <코리아 헌터즈>를 거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웬만큼 올라가기 전까지는요. 그때까지는 그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 이익이 됩니다. 솔직히 <코리아헌터즈> 에서는 B급 헌터 하나에게 그리 큰 관심이 없거든요. 만약 조회수와 사이트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중시했다면 어그로 끌기에 특화한 김수연을 내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
남자의 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다.
박은혜가 김수연을 이용했던 것처럼 나 역시 <코리아 헌터즈>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내가 줄이 닿은 것은 김수연 같은 말단 직원이 아니라 좀 더 윗선인 것 같으니까.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었다.
- 역시 헌터님은 생각하시는 게 다르시군요. 저는 <코리아헌터즈>에 인터뷰가 실리기 전부터 헌터님을 눈여겨 봤습니다. 등급만 오른다면 헌터님이 훨씬 더 크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헌터님의 독자적인 전술로 책을 쓴다면 10권도 거뜬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 뭐지?
등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새로운 능력을 얻기 전에 그야말로 듣보잡이었다.
어렵게 파티를 운영하는 C급 헌터가 거대 범죄조직의 관심을 살 거라고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없다.
게다가 내가 독자적인 전술로 게이트 공략을 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정말 뭐지?'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남자가 말했다.
-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우연찮게 헌터님에 대해서 알게 됐을 뿐입니다. 나중에 여기에 대해서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기회를 얻느냐 마느냐는 헌터님에게 달려 있고요. 저는 진심으로 헌터님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무슨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남자는 내가 더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 그럼 이 건은 그렇게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요. <코리아헌터즈> 사람은 지금까지 진행 상황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이 건이 잘 마무리 되면 헌터님께 생각 이상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의혹을 품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남자에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달리 말하면 지금은 김수연 건을 끝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내 포지션에 있는 사람은 나중에 입막음을 위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 건은 그 정도로 큰일이 아니다.
김수연은 <코리아헌터즈>의 말단 직원일 뿐이니까.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나는 남자가 하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커피 맛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조금 믿을 만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 상황이 더 진행되면 연락 주시죠. 지금까지는 정말 잘 하고 계십니다.
남자는 칭찬하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자.
내가 다음에 연락할 사람은 박은혜였다.
그녀에게 전화하자 핸드폰 안에서 듣기 거북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헉, 헉. 자기? 진짜 자기야? 너무해~~ 왜 이제 연락했어? 나, 헉,헉, 못 참고 딴 남자랑 섹스하고 있잖아~ 이 새끼는 자기랑 비교하면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쓰레기랑 섹스하니까 좋아?
"그건 상관 없고."
박은혜는 그녀답게 아침부터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쓰레기 남자나 여자와 섹스하든 나는 관심이 없다.
- 자기, 진짜 그럴 거야? 이리로 올래? 나랑 섹스 하자~~~
전화기 안에서 "누구야?" " 그래?" "오라고 해!" 따위의 말들이 들렸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남자가 한 명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박은혜가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당장 오라고 한다.
이것들, 게이구나.
나는 동성애에 편견이 없는 사람이지만 내 후장에 남자의 자지가 들어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됐고, 끝나면 연락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얘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박은혜를 개입시키는 것이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나니 꺼림칙해졌다.
박은혜는 내가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내게 연락했다.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자기~~~ 자기가 연락 안 하니까 괜히 쓰레기들하고 섹스했잖아~ 보지맛만 버렸어. 자기 어디야? 내가 갈게.
"여기가 어디냐면......"
나는 집 근처 모텔 주소를 알려 주었다.
- 뭐? 모텔? 호텔로 가자~ 내가 좋은데 알고 있어. 내가 다 쏠게~~
"아니야. 여기로 와. 같이 만날 사람이 있어."
- 진짜? 어제 봤던 그 애야? 그 애도 제법이던데? 조금만 다듬으면 한가락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김소희도 변태에게 칭찬 받았다.
"걔 아니야.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 그래? 누굴까~~~
김수연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박은혜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 자기도 걔를 알아? 걔는 안 돼~~ 기자니까 내가 만나 주는 거지, 걔는 쓰레기 중에 상쓰레기야.
김수연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 통화는 녹음되고 있으니까.
어쨌든 내게 푹 빠진 박은혜는 내 제안에 응했다.
그 뒤에 김수연에게 연락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