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92화 (92/92)



〈 92화 〉92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는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랬는데 최슬비를 불러 세운 여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했다.

“너 새로운 남자 찾았니? 이번엔 어떤 길드야? 슬비는 좋겠네, 남자 후리는 재주 하나는 뛰어나서.”
“입조심해.”

상대의 도발에도 최슬비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

“식사하러 왔으면 얌전히  먹고 가. 나 너랑 마주칠 때마다 일일이 인사해야 할 만큼 친하지 않아.”
“뭐?”

최슬비의 말에 오히려 상대 여자가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이런 불편한 대치 속에서 또 다른 등장인물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여자 옆에 서더니 우리를 보았다.
최슬비를 본 그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오빠.”

여자가 눈이 가늘어졌다.

“얘  봐. 전에는 오빠한테 살랑거리더니 이제는 금방 다른 남자 물었잖아. 진짜 수준 낮게.”

그녀는 명백히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머리숱이 늘어나고 뱃살이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여기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나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명품옷을 휘감고 있는 이들에 비해 싼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다.

“슬비야......”

남자가 복잡한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직접적으로 말을 걸려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파티장님, 그만 가요.”

최슬비가 내 팔짱을 끼고 잡아당겼다.
크게 내색하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한 건 분명해보였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이는데.
솔직히 여자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정도 모르는데 내가 뭐라고 나서기에는 좀 그랬다.

나는 최슬비가 이끄는 대로 몸을 돌렸다.

“거기 아저씨! 저년 조심해요. 전형적인 꽃뱀이니까. 여자 얼굴만 보고 혹하면 안 되는 거예요.”

“호호호!”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뒤통수에 닿았다.

근데, 저 씨발년이.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내 팔에 엮여있는 최슬비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뭐라고 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참고 있는데 내가 먼저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밥 먹으면서 물어보기로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뒤에서 꽂히는 날카롭고 복잡한 시선을 무시했다.


#


불판 위에서 고기가 구워졌다.
나온 찬도 그렇고, 고기의 때깔도 무척 고왔다.

배가 고팠던 참이라 더욱 군침이 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최슬비의 반응.

그녀는 내가 굽겠다는 것도 만류하고 자기가 고기를 굽고 있었지만, 명백히 마음은 딴 곳으로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딴 생각에 잠겨 있던 최슬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파티장님, 우리 술도 시킬까요? 저 오늘따라 술이 좀 당기는데.”
“네, 그래요. 저도 술이 마시고 싶네요.”

술이 들어가면 최슬비에게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질 것이 분명했다.

‘맛있다!’

술을 곁들인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기는 혀 위에서 살살 녹을 만큼 맛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어봤나 싶다.
강원도에 가도 이런 품질 좋은 소고기가 있을까 싶었다.

몬스터에 대한 연구로 소고기 품질을 유지하는 신기술이 개발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실제  기술이 적용된 고기를 먹어본 적은 없다.
아마도 이 고기가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육질이 최상으로 유지되지만 가격은 넘사벽으로 높다고 했으니까.

자기가 내겠다고 대뜸 이런 곳으로 식사하러 데려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최슬비는 부잣집 딸인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까 있었던 일은 대체 뭘까?
왠지 셋 사이에 있었던 사연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듣지 않는 이상 내가 멋대로 추측할 수는 없었다.

“여기 고기 맛있죠?”
“네, 진짜 맛있네요.”

최슬비는 내게 고기가 맛있지 않냐고 물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사람들이랑 무슨 사이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전에 있던 길드 멤버들인데......”

최슬비는 머뭇머뭇 말을 했다.
굉장히 조심스러워보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털어놓고 편안해지고 싶은 기미도 엿보였다.

나는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높은 수준이 아니라 웬만한 가족보다도 더 믿고 있을 것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곤란한 일이 있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예전의 나라면 이쯤에서 더 파고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파티원의 괴로움은 나의 괴로움.
내게 그것을 해결할 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사정을 듣고 난 뒤에 판단할 문제였다.

“말해봐요. 이제 한 배를 탔는데 의논하지 못 할 게 뭐 있어요. 너무 흔한 표현이기는 한데 저는 가족 같은 파티를 지향합니다. 파티원에게 고민이 있는데 무시할 만큼 저는 냉정한 파티장이 아닙니다.”
“......”

최슬비가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술이 한 잔 들어가 그녀의 볼은 빨개져 있었다.

외국인의 피가 섞인 그녀의 외모는이국적이다.
굉장히 드문 일이기는 한데 각성하고 난 뒤에 더욱 그렇게 되었다는 본인의 설명이었다.

긴 상이 가운데 있고, 좌식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자세라 그녀의 하반신도 일정부분 보였다.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가 무척 탐스러웠다.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제가 보지 못 했으면 모를까? 저도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아까  여자의 무례 때문에. 슬비  봐서 참은 거예요.”
“네...... 알고 있어요.”

최슬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 아까 보았던 빌어먹을 여자와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연은 사실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까 보셨던 그 남자는 김강우라고 하는데 제가 전에 있던 길드의 파티장이었어요. 그리고 여자의 이름은 박이은, 김강우와 약혼한 사이고요. 같은 길드에 있었어요.”
“약혼한 사이라고요?”
“네, 집안끼리 일찍이 혼담이 오갔나 봐요. 각성을 하지 않았더라면 김강우는 자기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았을 거예요. 약혼자끼리 사이 좋게 각성을 해서 차라리 둘이 길드를 해보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던 거죠. 아시다시피 요즘은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길드를 운영하는 게 이익이 되니까요. 아무튼  사람과 저는 전부터 안면이 있었어요. 아버지들끼리 사업을 하면서 이익을 주고 받는 사이라서, 아무래도 몇  모임에서 본 적이 있었죠. 저도 자연스럽게 각성하고 나서는 그쪽 길드에 들어가게 됐고요.”

나는 최슬비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는 이야기하는 중간에 그것을 쭉 들이켰다.

“그런데 제가 각성하고 나서 외모가 많이 바뀌었거든요.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 남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게 됐어요. 사귀자는 말도 많이 들었고.”
“그 중에 하나가 김강우였다는 건가요?”
“네...... 저는 당연히 거절했지만 김강우는 집요했어요. 저는 불편해서길드를 탈퇴하겠다고 했고, 그날 김강우는 저희  앞까지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런 전말을 알고 박이은까지 나타나게 된 거죠. 뭐, 그런 거예요......”

최슬비가 착잡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개놈들이네요.”
“네?”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고. 웃기고들 있네요.”

최슬비가 갑자기 달라진 내 말투에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왜요?”
“파티장님이 저 대신 화를 내주니까 기분이 좋아요. 왠지 모르겠는데...... 마치 아버지에게도 느껴보지 못  든든함이 느껴져요.”

그녀는  잔에 술을 따랐다.
자기 잔을 채우려고 하기에 내가 술병을 빼앗아서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고민하지 마요. 어차피 스케일이 고만고만한 것들이니까. 저 길드가 대성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최슬비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김강우의 길드가 나름 승승장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A급 길드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김강우와 박이은의  집안 재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만큼 지원을 적지 않게 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두 집안의 사업에도 긍정적으로 되돌려주겠지.

그런 식의 긍정적 순환고리를 만드는 것이 요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나할  없는 방법이고, 성공이 보장된 방법이기도 하다.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세상 불공평하다고 느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불공평한 것으로 치면 내가 그들보다 절대  하지 않았다.

넘사벽의 능력을 손에 넣은 거니까.

훈훈하게 술자리가 계속 되었다.
고기가 맛있고 술도 맛있고.
게다가 같이 식사하는 최슬비도 아름다웠다.

각성한 뒤에 남자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각성 전에도 물론 예뻤겠지만, 지금 그녀는 신비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여자는 전세계를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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