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02
불합리한 관행을 이겨내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했다.
나는 배운대로 진료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언친느낌을 안고 삼개월을 버텼다.
약속한 삼개월이 다 되어갈 때, 재료상이 내게 치과인수 정보를 주었다.
허름한 동네치과를 그만두는 선생님이 있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권리금 오천만원을 주고 인수했다.
덴탈체어 두개를 바꾸고, 재료와 기구를 더 사들였다.
은행대출 3억원을 모두 쓰고, 나는 소위 치과 원장이 되었다. 서른 넷.
그래도 저렴하게 개원했다고 믿었다. 대출은 금방 갚을 것이라고 거울 앞에서 최면에 최면을 반복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매달 세명 직원 월급을 주고 월세를 낼 때가 되면 벌써부터 마음이 불안했다.
그 외에도 꽤 많은 고정비가 지출되었다.
빚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치과선생님도 있다는데,
공감할 수 있었다.
마이너스 잔고는 조금씩 불어나고 있었다.
페이 삼개월동안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이해되었다.
대표원장은 나를 일부러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돈에 관한 현실감각을 심어준 것이었다.
샌님같은 내게 현실은 친절하지 않았다.
나는 더욱 쫄보가 되었다. 빚이 버거웠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늘 나를 호구로 봤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경조사에 십만원 이십만원 내야하는 내 자신에 화가 났다.
모임이 끝나면 늘 계산해야하는 내 자신에 분노가 생겼다.
빚으로 살면서 여유있는 척 해야하는 내 자신에 연민이 생겼다.
하지만, 나 하나 희생하면, 다들 웃고 즐거워 했다.
호구는 늘 당한다.
6년제 치대 졸업생과 전문대학원 졸업생 사이에는끈끈한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럼에도, 같은 학교를 졸업한 선배님이 친절하게 나를 이끌어 주었다.
그 선배는 협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지역 활동도 빠지는 곳이 없었다.
하루는 내게 불우 청소년 무료진료 활동을 하자고 했다.
난 야멸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난 천성이 호구다. 일주일에 한번 목요일마다 아침 봉사를 하게 되었다.
솔직히 하기 싫었다. 거절 못한 내게 화가 났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무슨 봉사인가.
그 선배는 이미 기반을 단단히 닦았다. 이미 건물도 몇채 있다.
꿀 빨던 시절 호사를 누린 세대 아닌가.
*******
아침 8시부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사회복지 담당입니다. 청소년 치과 사업때문에 선생님 치과를 방문하고 싶어요]
[ 네, 협회 이사님께 말씀 들었습니다.가능하면 일찍 오시면 좋겠습니다. 진료시간에 뵙기가 불편해서요.]
[옛~ 지금 말타고 달려가요. ㅎㅎㅎ]
특이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아침 8시 7분.
그분은 말달려 치과 문을 두드렸다.
참 특이하게 부지런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특이한 공무원인지 사회복지사인지는 예뻤다.
김고은 느낌인데 더 예뻤다. 큰 키, 잡티하나 없는 깨끗한 미소. 쌍커플 없는 눈.
입은 옷에도 기분 좋을 센스가 흘렀다. 달달한 풀 냄새 나는 향수도 아침과 잘 어울렸다.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받았다. 공무원이었다. 주사보라고 적혀있었다. 김지은.
나는 냉장고를 뒤져 아침햇살 작은 병을 건넸다.
빨간립스틱이 아침햇살 유리병 입구를 타이트하게 감쌌다. 원샷해 버렸다.
내가 헛기침을 하고 웃으니, 그 분은 내 어깨를 고양이 펀치로 때리며 흘겨보았다.
평소에도 뭇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리라. 어깨를 후리는 행동에도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오분 정도 청소년 치과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빨간 립스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쉬운 오분이 지나고, 그분을 치과 문 앞까지 배웅해 드렸다.
나를 호구로 만든 선배님이 인제 밉지 않았다.
아침부터 에너지를 얻었다.
******
그분을 다시 만난 건 이틀 뒤였다.
학교 선배님과 협회 일 하시는 이사선생님 한분, 그리고 그분과 여자 공무원 두분.
삼대 삼 단체 미팅 분위기로 우리는 숯불 갈비를 먹었다. 명목은 청소년 치과사업을 위한 상견례였다.
학교 선배님과 다른 선생님은 정말 입담이 대단했다. 세 여자분을 거의 실신 직전까지 웃겼다. 나도 참 많이 웃었다.
어느 누구도 강권한 바 없었으나 여자분들은 자기들끼리 때론 선생님들과 같이 소주를 들이 부었다.
나는 웃고 즐거워하는 분위기에 취하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저녁 9시가 되자, 학교 선배님은 애인 만나러 가야 한다며, 일어선다고 했다.
다른 선생님도 자기도 애인 만나러 가야한다고 했다.
여자 세분도 자기들도 애인이 밖에서 기다린다며 합창을 하고 웃었다.
술값에 밥값이 17만원이 나왔다.
선배님은 카드 단말기에 싸인하며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애인 못 만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모두 웃었다.
선배님과 다른 선생님은 각각 택시를 타고 가셨다.
다른 여자 공무원 두분도 애인과 즐거운 시간 보낼거라며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나와 그분만 남았다.
"......"
"......"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내가 먼저 물었다.
"선생님 혹시 애인이 안 기다리세요...?"
"기다리죠. 그런데, 제 애인이 오늘 따라 좀 바빠서..스케줄이 약간 뜨네요..가만 있자....혹시 시간 되시면 새로 생긴 칵테일 바 가실래요...저번에 가 보니까 괜찮던데. 지금 원장님 애인이 기다리실라나...호호호."
빨간립스틱이 동그랗게 동굴을 만들었다. 나는 내 몸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알딸딸함을 느꼈다.
알딸딸 수준에 이르면 나는 나이불문, 예쁘든 아니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자에게 들이대는 불쌍한 습관이 있다.
그분이 추파를 던졌다.
와이 낫.
"애인이 지금 보채긴 하는데....그런데...음...그 칵테일 바가 궁금하긴 하네요....뿌잉뿌잉......"
나는 두 주먹을 얼굴에 붙이고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오그라들 그 미친 멘트와 율동.
그분은 땅에 주저앉으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내가 보기엔 그분이 대충 소주 두병 정도 마셨는데, 쓰러지는게 진짜 같기도 하고 페이크 같기도 하고 헷갈렸다.
나는 매너 있게 그분을 일으켜 드렸다.
일으키는 동안 팔꿈치에 말캉한 것이 스쳤다. 의도된 사고였다.
걷는 동안에도 간헐적으로 그분과 손등이 서로 부딪혔다. 역시 의도된 디테일이었다.
손을 잡고싶었지만, 참았다.
서두르다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싫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각각 멀리 떨어져 섰다. 강약 조절이었다.
7층에 위치한 칵테일 바는 나름 괜찮았다.
블랙과 그레이 계열의 메탈 마감. 모던한 분위기가 뉴욕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째즈 선율이 나른했다.
우리는 나란히 바에 앉아 모히또와 섹스온더비치를 시켰다.
물론, 모히또는 내가 시켰고, 그분은 세련된 발음으로 자기 것을 주문했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 주로 그분의 씩씩한 유머에 웃음으로 적당히 응수했다.
그분은 침묵을 두려워하는 듯 수많은 화제를 끄집어내어 맛있게 요리했다. 맛보고 박수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알딸딸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십분 정도 지나 술이 깨면 머리가 아프고 간절함이 없어질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간절함이 필요했다. 간절함이 없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눈 앞에 발렌타인30과 로얄 살루트 21 파란색 도자기 병이 보였다.
그분에게 발렌타인 좋아하냐고 물었다.
"없어서 못먹죠. 쩝쩝 캬..."
그분은 혀를 낼름거리고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다.
나는 최대한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모양이 빠지는 질문을 했다.
"발렌타인 몇년....? 12 아니면 17...?"
그것만 해도 20만원 30만원이다. 살짝 걱정 되었다.
"호호호 우리가 청소년 사업을 하는입장에서 미성년 발렌타인을 마시면 안되겠죠, 원장님? 생각해보시니까 좀 그렇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미성년...?'
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발렌타인 21년을 주문했다.
나는 호구였고, 그분은 능수능란한 프로였다.
나는 그분보다 하수였다. 내 마음마저 읽히고 있지 않나 두려웠다.
일으키며 팔꿈치를 문지른 것도, 걷다가 손등을 스친 것도 그분은 이미 그 의도까지 다 알 고 있었을 것이다.
의도된 사고도, 디테일도, 강약조절도 내겐 이불킥 소재일 뿐. 그분은 모든 불순한 움직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분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기도 하는 흉내를 냈다.
"주여 우리가 미성년자를 범할 뻔 했습니다. 죄를 지을 뻔 했습니다. 죄를 사하시옵소서. "
기도하는 폼이 제법 능숙했다.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스물한살 발렌타인을 둘이 나누어 마시다 보니, 나는 다시 알딸딸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나는 리비도 이론을 믿는다.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리비도가 인간 행동의 원천 에너지라 믿는다.
문명화된 사회든 아마존의 부족사회든 억제훈련을 하면서 그 욕망을 숨길 뿐이다.
성년의 발렌타인은 내 무의식을 깨웠다.
나는 그분의 농담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웃음타이밍에 박수를 치며 무릎으로 그분 허벅지를 터치했다.
알딸딸 가운데에서도 소심하게 눈치를 살폈다.
눈빛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