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03
우리는 발렌타인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계산대 카드 단말기에 싸인을 하는 동안 그분은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분 걸음 걸이가 약간 흔들렸다.
비록 받아든 영수증을 확인하며 손이 떨렸다. 오늘 56만원을 썼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우리 둘의 얼굴은 상당히 벌겋게 변해 있었다.
나는 그분 정수리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밖으로 나와 걸을 때, 나는 일부러 손등을 스쳤다. 반응이 없었다.
그분은 우동트럭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분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미안하다며 자지러지며 웃었다.
"괜찮으세요 원장님?....근데...배고프세요...?"
그분은 어느새 내게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그 우동 트럭을 가리키며 물었다.
다시 내 귓가에 바람과 함께 속삭였다.
"먹고 싶어요, 원장님..."
평서문도 의문문도 아닌 애매한 톤으로 분명 내게 물었다.
우동을 두 그릇 사고, 나는 얼른 내 우동을 흡입하듯 먹었다.
시간이 너무 루즈하게 흐르면 텐션이 무너진다. 나는 초조했다.
그분은 초조한 나를 갖고 놀았다.
"배고프셨구나...제것도 드실래요...?"
초조한 나는 얼른 받아 마셔 버렸다.
시간이 자꾸 흘렀다.
그분은 확실히 취했다. 휘청했다.
자연스럽게 부측하다보니 그분 가슴이 내 팔에 부딪혔다.
그분을 부축하고
택시를 탔다.
내가 사는 아파트로 택시를 안내했다.
그분은 내 어깨에 기대 잠든 척 했다.
곧 택시가 섰고, 나는 그분을 부축해서 내 아파트 안으로 이끌었다.
내 방 문을 열자 마자 모든게 한꺼번에 터졌다.
불같은 키스와 함께 서로 위 아래 순서없이 탐닉해 갔다.
그분 옆목에서 느껴지는 짭조름한 땀의 맛이 나를 더욱 자극했다.
나는 바로 그분을 침대로 번쩍 들어 던졌다.
그분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혼잣말을 하듯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 불고 있었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우리는 한참동안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뒤로 그분을 일주일에 한번 이상 만났다.
복지 사업을 위해 만나기도 하고, 사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그분은 항상 밝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분을 좋아했다.
그렇게 그분과 한창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치과로 나를 찾아왔다.
환자 응대 및 치료가 가장 어려운 케이스는 치근파절(치아 뿌리에 금이 가거나 치아 뿌리가 부러진 경우)이다.
치관파절(눈에 보이는 치아부위에 금이 가거나 파손이 있는 경우)은 눈에 보이는 단서가 있어 쉽게 진단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치근파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치아 뿌리가 완전히 갈라지거나 갈라진 뿌리 주변에 골 흡수가 생기면, 방사선 사진에 나타나 찾기가 쉽다.
그러나 초기 치근 파절은 보통 방사선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원인을 알 수 없다.
환자는 통증으로 고생한다. 어렵게 신경치료를 해도, 통증이 잠시 사라질 뿐, 곧 통증이 다시 시작 된다. 잇몸에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후로 환자는 치과의사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치근파절의 궁극적 치료는 발치이다. 과감하게 치아를 빼고 임플란트를 심는 것이 환자나 치과의사가 고생하지 않는 길이다.
임플란트를 권하면 장사치처럼 보이고, 자연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면 사명감있는 의료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치근 파절은 어차피 임플란트로 가야한다.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들이는 비용과 고통은 증가한다.
그날 나는 치근 파절 환자와 씨름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환자는 나를 불신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소개받아 내원한 환자였다. 어금니가 너무 아파 치료받으러 귀국한 분이었는데, 방사선 사진에는 이상소견이 없었다. 타진이나 바이트를 물렸을 때 통증을 호소했다. 얼음 조각에도 통증을 호소했다.
전형적인 치수염 초기증상이었다. 해당치아에 충치가 있어 충치로 인한 치수염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치근파절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치근 흡수등도 고려해야 했다.
첫 진료에서 치근파절의 가능성을 알려드리고, 발치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다.
차트에 모든 가능성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고 기록해 두었다.
귀국 스케줄이 촉박함을 감안해 방문 당일 신경치료를 거의 끝냈다.
둘째 방문때, 환자분은 이제야 살것같다며 고맙다고 간식거리를 사왔다.
환자가 고통에서 해방될 때 나는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둘째 날엔 임시치아를 만들어 씌우고 신경치료를 마무리 했다.
아울러 다시 치아 뿌리에 금이 있을 수 있으니 그때는 뽑고 임플란트를 해야한다고 확인 시켜드렸다.
환자는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쓰게 된다고, 금니 비용을 자진해서 미리 결제했다.
그리고 치료 경과를 일주정도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던 환자가 오늘 진료비를 환불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치과 다녀간 이후로 너무 아파 다른 치과에서 발치를 했다고 했다. 임플란트도 심었다고 했다. 왜 자기를 힘들게 했냐고 언성을 높였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차트에 그림을 그려 설명했건만 자기는 소개받아 왔는데 배신감을 느낀다며 전액 환불해 달라고 버티는 중이었다.
나는 기본적인 진단비용과 신경치료비용 임시치아 제작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 드린다고 제안했으나 환자분은 전액환불을 고수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그 때,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대기실을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에 그가 보였다. 평범하지 않은 짧은 머리. 다부진 체격. 튀는 금목걸이와 복장.
"치과가 왜 이리 시끄러워? 원장이란 작자가 유부녀나 후리고 다녀... 남의 가정 파탄나게 만들어...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해...그러니 치과가 잘 될 턱이 있나."
대기실에서 대기하던 환자들이 술렁거렸다. 실장이 바로 금목걸이에게 외쳤다.
" 아저씨 어떻게 오셨어요? 시끄럽게 하시면 경찰 불러요. 의료기관에서 행패부리면 가중 처벌 받는 거 아시죠?"
"아니 이사람이. 누가 행패를 부려..? 있는 사실. 고대루 얘기 하는구먼. 여기 원장이란 놈이 내 동생 집안 파탄나게 한게 사실인데, 억울한 사람 얘기도 못하나. 어이 아줌만지 아가씬지도 조심해. 여기 원장이란 작자가 아주 버릇이 안 좋아. 몸 조심해."
나는 환불을 요구하는 환자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실장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환자와 대화 하게 했다.
그리고 그 금목걸이에게 걸어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
하지만, 내 치과다. 내 치과의 평화는 내가 지켜야 했다.
"제가 원장입니다만, 제게 볼 일이 있으십니까?"
"아 원장님이슈? 나 박만도요."
금목걸이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하고싶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악수를 받아주었다.
"원장님. 거 뭐냐...구청에서 일하는 김지은이라고 아시죠?"
그분의 이름이 금목걸이 같은 인간 입에서 나왔다.
나는 머릿 속이 복잡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시든지 밖으로 나가든지 하시죠. 여기 다른 분들도 계신데..."
"뭐 걍 여기서 합시다. 나 바쁜 사람잉게."
금목걸이는 큰 목소리로 내게 망신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장님이 우리 제수씨헌테 몹쓸 짓을 해서.....단란했던 우리 동생 가정이 파탄 났고, 사랑하는 우리 동생은 비관자살까지 할려고 했고, 동생 모친도 동반으로다가 목숨을 끊을 뻔 했고, 아주 원장님이 여럿 죽일 뻔 했네요잉? 원장님 똑똑히 들으쇼잉? 내일 변호사가 여기에 올테니께,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고 변호사가 하자는 대루다가 마무리 하쇼잉. 오메... 치과 원장이 사람 여럿 죽일 뻔 혔네.....알 것소? 고 결과를 보고, 나가 여길 또 오든지 원장님을 또 보든지 말든지 할 것잉게. 알것소? 난 이만 가요. 수고 허소."
금목걸이는 그대로 걸어나갔다.
대기실에 있던 환자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돌렸다.
나는 원장실로 들어왔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마음을 정리했다.
똑똑.
실장이 들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원장님. 저 환자 80프로 환불해 주기로 했는데, 그대로 할 까요?"
"네. 고마워요. 수고 했어요."
"원장님. 다음 환자 진료준비 됐습니다."
"네. 바로 나갈게요."
그 다음부터 진료에 집중할 수 없었다. 최소한 진료만 하고, 예약환자들은 모두 약속을 취소했다.
그분이 유부녀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물론 각자의 사생활에 대해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
서로에게 무한 신뢰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그분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문자를 했다.
[박만도라는 사람 혹시 알아?]
[모르는데]
[오늘 시간 있어? 보고싶어]
[나두. 뽀뽀.]
[나 오늘 진료 모두 끝났어. 언제든지 와도 돼.]
[알라뷰]
치과 출입문에 휴진 안내문을 붙이고, 직원들은 조기 퇴근 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누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생각해 봤다.
사촌형님중에 건달과 관련된 분 한명, 현직 경찰 한명. 좀 멀리가면 경찰서장도 한분 있었다.
하지만, 그 형님들 얼굴 본지 십년도 넘었다.
고3 때 친구 중엔 판사가 한명 있었다. 전화 통화한지 오래되었다. 부탁하기 껄끄럽다.
하지만, 만약 일이 터지면 껄끄러운게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