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05
평소에 친척들 모임에도, 친구들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은 두려움과 고립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여섯시가 되어 그분, 지은이가 왔다.
지은이가 앞에 나타나자 나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늘 그렇듯, 지은이의 밝고 환한 얼굴은 내게 감동이었다. 지은이는 어두운 그늘이 없었다.
"자기 오늘 어땠어? 진료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아니 환자 많지 않았어. 자기는 오늘 어땠어? 할머니 할아버지들 찾아다니느라 피곤하지 않아?"
"아냐. 재밌어. 다들 날 좋아하시는 것 같아 기뻐."
"누군들 자길 안 좋아하겠어. 자긴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이 얼마나 될까."
"뭐래. 얼마나 많은데. 안 보이는 곳에서 다들 열심이야. 지선언니랑 경실언니봐. 매일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는데. 과예산으로 운동화 한켤레씩 사주면 좋겠네."
"내가 기부해야겠다."
"진짜? 땡큐지. 자긴 복받을 거야."
"여신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넘치는 복 받았어."
"뭐래. 어휴 오글거려. 요새 학원다녀? 팔에 닭살 돋네. 이거 보여? 이 닭살멘트장인."
지은이는 내 볼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지은이의 손을 내 손으로 감싸고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불안하게."
"예뻐서"
내 입술이 지은이에게 다가갔다. 지은이의 빨간 립스틱이 묻었다.
지은이는 눈을 감고 나를 받아주었다. 잔잔한 파도의 일렁임으로 내 귀에 사랑을 표현했다.
내 등줄기에도 엉덩이까지 이르는 황홀한 전류가 퍼졌다. 번쩍하는 섬광이 보였다.
달달한 이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오...우리 여신님은 키스의 장인. 나 땀났어. 떨려."
"오늘 왜 이러실까. 사람 부끄럽게."
"부끄러운 당신.......열심히 일한 당신.......저녁 먹어라! 나가자."
우리는 택시를 타고 워커일 호텔로 향했다.
일기예보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는 아니었다.
비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창가 자리 친구 이름으로 예약했는데, 김지은요."
"네, 확인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비오는 한강을 보며 꽉 막힌 마음이 시원하게 씻겨내려갔다.
해산물로 시작해 양고기로 이어지는 코스 요리는 그날의 추천 메뉴였다.
나는 추천 와인과 함께 천천히 우아하게 맛을 음미했다. 씹고 또 씹었다.
"자기 무슨 생각해? 안 좋은 일 있어? 치과에선 학원 우등생처럼 오글 거리게 하더니, 지금은 세상 고민은 혼자 뒤집어 쓴 거마냥......"
"아니야. 오늘 어떡하면 우리 여신님과 황홀한 밤을 보낼까 하고. 원래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룸 예약했어 전망 좋은 곳으로."
"오늘 무슨 날이야?"
"내가 지은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날."
"뭐래. 또 시작이네. 오글오글 닭살 우등생"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전망 좋은 방으로 올라갔다.
창문 너머 불빛의 씨앗들이 촘촘하게 늘어섰다.
어둠을 뚫고 쓸쓸하게 깜박였다.
"경치 끝내주네. 자기 덕분에 이런 호사를..."
나는 지은이의 머리카락 향기를 느끼며, 지은이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지은이의 목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자기 뭐야...지금 울어?"
"......"
나는 지은이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나 궁금한 거 있어?"
"뭐?"
"나랑 하면 항상 좋아?"
"언제나"
"그렇구나. 나도 그런데. 헤헤."
지은이는 나를 세게 끌어 안았다. 내 오른 쪽 볼에 입맞춤 했다.
우리는 다시 봉우리를 향해 등반을 시작했다.
높은 산봉우리의 행복한 공기를 마시고
우리는 함께 원래 자리로 내려왔다.
지은이는 내게서 미끄러져 벗어났다.
침대에서 내려 욕실로 걸어갔다.
샤워하는 소리가 났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금목걸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탐욕스런 눈 옆에 흉터있는 남자도 따라 들어 왔다.
나는 옷을 입으려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원장님...또 우리 제수씨하고 재미를 보셨구먼......그래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야지......어이구 우리 원장님 실헌거 봐......여자들이 아주 줄줄이 붙겄어......근디 우리 원장님...그거 아시나 몰러... 남자는 자고로 세 끝을 조심혀야 헌다구...긍께...혀끝, 말을 조심혀야 한다는 소리제. 글구 손끝, 도적질 허면 안된단 말이여...글구 요 시커먼... 요것을 조심혀야한다고..."
금목걸이는 발목에서 잭 나이프를 꺼냈다.
철컥 소리를 내며 칼날이 튀어나왔다.
흉터있는 남자가 내 손과 몸을 잡았다.
나는 발버둥쳤다.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턱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온몸이 마비되어, 금목걸이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금목걸이는 흉기를 내 다리에 댔다. 차가운 살기가 느껴졌다.
흉기가 점점 다리 위쪽으로 올라왔다.
나는 몸이 점점 굳어갔다.
소리를 지르려 힘을 쥐어짰다.
번번히 헛수고였다.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막힌 목에 조금씩 공기 통하는 느낌이 들더니,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아아아악!!....아아아악....!!!"
남자들이 도망갔다.
지은이가 뛰어 왔다.
"무슨일이야...괜찮아?"
나는 땀에 젖어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다행히 내 몸은 온전했다.
"잠들었다가 꿈꿨나봐. 괜찮아."
나는 욕실로 걸어가 욕조에 몸을 담궜다.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욕조에 물이 넘쳤다. 밸브 닫을 힘이 없었다.
물을 흘려보냈다.
멍하게 시간이 흘렀다.
욕실 문에 노크소리가 났다.
"괜찮아?"
"응. 괜찮아. 곧 나갈게"
나는 몸을 대충 닦고, 침실로 갔다.
지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은이 옆으로 누웠다.
"......"
"......"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지은이 편이야. 지은이를 믿어. 지은이는 착하고 현명하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지은이의 손을 잡았다. 손에 땀이 베어 나왔다.
"오늘 박만도라는 사람 물어봤잖아."
"나는 그런 사람 모르는데."
"그 사람이 오늘 치과에 와서 지은이 이야길 하고 갔어."
"내 얘길? 무슨?"
"다시 말하지만, 난 무조건 지은이 편이야. 세상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나는 절대 반대편에 서지 않아. 그점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지은이가 무슨 행동을 했건, 무슨 말을 했건 상관하지 않아. 나는 끝까지 지은이를 있는 그 자체로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
"그 사람이 지은이가 제수씨래..... 자기 동생이 나때문에 가정 파탄나고, 자살기도를 했대. 그 어머니도 동반으로. 내일 변호사를 보낼 건데, 아마 위자료를 요구할 모양이야. 곱게 말을 안 들으면 일을 크게 키울거라고. 박만도라는 사람은 그런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 같아 보였어."
"......"
지은이는 손을 놓았다.
냉장고를 열어 물 한병을 다 마셨다.
침대 끝에 앉았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자기가 내 사생활에 대해 깊이 물어보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고, 진짜 나를 사랑하나 의심되기도 했어. 나도 자기를 사랑해."
지은이의 톤이 다운되어 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모르겠어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세상사람이 등을 돌려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을지. 자기가 나쁜일을 해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 그런거 때문에 지금 나를 떠나도 나는 어쩔 수 없어. 마음은 아프겠지만 나는 내 감정을 거짓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아."
나는 슬픈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금목걸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자기처럼 공부를 잘 하지 못했어. 전문대에 들어갔다가 편입으로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어렵게 졸업했어."
"지은아 그런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야."
나는 혹시나 지은이가 자격지심이 생길까봐 불안했다.
"들어봐...알고 싶다며...그래서 공무원이 되려고 노량진에 있을때 스터디 그룹에서 애기 아빠를 만났어..."
애기 아빠란 단어에 나는 천정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 자기랑 같은 대학을 나왔다고 했어. 그 사람은 고시도 준비하고, 공무원도 준비한다고 했어. 학력에 대한 갈증이 있던 나는 금방 그사람에게 끌리게 되었지. 내가 어리석었어. 조심했어야 했는데, 덜컥 임신을 하게 된 거야."
지은이의 이야기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깊게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겁이 났다.
"그사람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고, 나도 우리 엄마와 살고 있었고. 어디서 도움 받을 곳이 없었어. 그렇다고 아이를 지우는 건 상상해 보지도 않았어. 간단하게 사진만 찍고 결혼식을 대신 했지."
결혼식이란 단어가 나를 슬프게 했다.
"우선 생활비를 벌기위해 돈을 모으기로 했어. 공무원 시험은 일년정도 미루기로 했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작은 월세방을 구하고 저금도 조금 했지. 그리고 아이를 낳았어. 지금 여덟살이야."
"학교는?"
"다니고 있어."
나는 한번도 지은이의 어머니에 대해서나 다른 가족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지은이도 내 가족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딸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었을까.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린다음,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 아이 키우는게 힘들었지만, 엄마가 많이 도와주었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었어.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면 시간 벌기가 수월해서, 책을 들고 편의점에서 밤시간에 공부를 했지. 애기 아빠도 공부를 하며, 일을 했어. 과외나 보습학원 강의를 하면 벌이가 좀 나았을텐데 나처럼 편의점을 돌았어.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