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06
"난 일년만에 일반행정직 9급시험에 합격했어. 합격이 발표된 날 얼마나 울었는지.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메여. 애기아빠는 7급 재경직과 입법고시, 행정고시를 동시에 준비했는데, 잘 안되었어. 그래도 내가 직장을 구했으니, 아르바이트는 하지말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했지. 그사람은 편의점 일을 그만 두지 않았어. 크게 힘들지 않아 공부할 만 하다고. 이년이 지나도록 남편은 합격하지 못했어. 그러다 어느날 점심시간에 집에 왔는데, 어떤 어린 여자아이가 우리집에 와 있는거야. 내가 자는 침대에 알몸으로. 그 사람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고. 나는 그 아이가 나처럼 불쌍해 보였어."
"설마...미성년자였어?"
"아니.스무살인가 그랬어. 그사람 말로는 편의점에서 같이 일하는 아이인데, 같이 점심 먹으러 왔다고. 자기도 왜 그 아이가 내 침대에서 알몸으로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 나는 알겠다고 했지. 우리 딸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빠없는 딸로 키우긴 싫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공부를 그렇게 잘하던 사람이 7급시험에 사년째 합격 못한다는게. 그래서, 학교에 문의 해봤어. 그사람이 그 학교를 졸업했는지. 참 내가 순진했지. 그사람 이름이 졸업생 명단에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아직 혼인관계로 있어?"
"그래도 애기 아빠인데, 마지막까지 끈을 놓고 싶지 않았지. 애기 아빠는 그렇게 아르바이트 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살았지. 딸은 주로 엄마가 돌봐주었고. 이젠 학교에 들어가서 똘똘하게 잘 지내고 있어. 하여튼 그렇게 괴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한탄하며 살아갔는데, 어느날 그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어. 그래도 애기 아빠니 어떻게 되었는지 수소문 했지. 그 사람은 교도소에 있었어. 경찰이 조회해 보더니 원래 전과가 많은 사기꾼이라네. 마약, 사기, 폭력, 혼인빙자 간음, 배임.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기도 어려운 죄명이 줄줄이 있었지. 십년 넘게 못나올 거라고 했어. 결국 별거아닌 별거가 되었어. 서류를 정리해도 당장 얻는 이득이 없어서 아직 이혼신청은 하지 않았어."
"항상 밝은 얼굴만 봐서 몰랐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난 원래 술을 안마셨는데, 그렇게 험하게 살다보니 술이 늘더라. 자기와 처음 술마시던 날도 참 많이 마셨지. 나는 자기가 나한테 들이대며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점잖을 것 같은 원장님이 발정난 수캐같이 애절한 눈빛으로 애교를 부리는데, 가엽기도 하고 귀엽기도하고. 원래 남자들은 대체로 그러니까. 기회가 생기면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돌변하는 그런 동물이지."
"그날 다 알고 있었구나."
"그럼. 자기는 숯불갈비집에서부터 나만 처다봤어. 기회를 노리는 수캐의 눈으로. 뭐 나도 자기가 나쁘지 않았지. 똑똑하지 착하지 몸도 튼튼하지. 게다가 신분 확실한 치과원장님이잖아. 딸을 낳고 나서 7년 넘게 누구와도 잠자리를 갖지 않았는데, 그 날은 나도 갈증이 생겼지. 자기가 점점 애교를 부리는게 재밌기도 했고. 사실 난 자기가 뿌잉뿌잉 할때부터 같이 잘 생각이 있었어. 맨 정신으로는 힘들거 같고, 좀 취하면 좋겠다 싶었지. 발레타인 21년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던 장면이야. 자기한테 좀 미안하긴 해. 난 자기가 그래도 골인 할 때까지 매너있게 대해줘서 고맙게 생각해. 자긴 좋은 사람이야."
"부끄럽네."
"아마 박만도라는 사람은 사기꾼일 거야. 애기 아빠는 삼대독자야. 형제가 없어. 시어머니란 분은 그래도 경우가 있으신 분이야. 명절에 찾아가서 인사드리면, 하염없이 울기만 해. 미안하다고 자기가 자식을 잘못키워 그렇다고. 안타깝지. 그래도 핏줄이라고 딸아이 손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으셔. 나도 마음아파. 지금은 딸에게 아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어려워 고민이야. 그렇다고 새아빠를 만들어 주고 싶진 않아. 난 적어도 딸이 성인이 될때까지는 새롭게 결혼할 생각이 없어. 뭐 그때 되서도 굳이 번거롭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사실 나도 비혼주의자야."
나는 지은이를 다시 가슴 속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결혼한 것도, 딸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은이를 사랑하는 것과 관계 없는 사실이었다.
지은이는 내게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로 나를 속이려 한 적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물어본 적이 없다.
나는 가슴시린 지은이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내가 지은이를 더 사랑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행복했다.
결혼과 사랑은 별개다.
내 인생에 결혼은 없다.
주제넘게 누군가의 아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를 보며 설렌다는 것.
누군가와 손을 잡고 파란하늘을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것.
누군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눈물 흘 릴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내 폐 속을 깨끗하게 만들며
나는 비로소 행복한 숨을 쉴 수 있다.
나는 지은이의 손을 잡아 내 옆에 눕게 했다.
이어진 깊은 이야기에 여러번 눈물 흘렸다. 지은이는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아침을 맞이했다.
******
"원장님, 변호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내가 나가볼게요."
대기실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내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법무법인 화해 변호사 김치수]
나는 변호사를 일층의 까페로 안내했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의뢰인이 심리적으로 고통 받고 계십니다. 원장님은 제 의뢰인의 배우자와 상간자로서 제 의뢰인의 결혼생활이 지속될 수 없도록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간통법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형사상 책임까지 지셔야 했습니다. 운이 좋으십니다. 원장님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하면 통상 오천만원 정도에 합의를 합니다. 민사적으로 법정까지 가면 서로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보통 대법원까지 사 오년 걸리고, 어느 한쪽은 인생이 망가집니다. 물론 원장님의 복잡한 마음 이해 합니다. 이유가 있고 억울하다고 생각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장님이라면 적절한 선에서 합의 하고, 차라리 경제활동하는데 집중하겠습니다. 사천만원 어떻습니까. 사 오년간 괴로움을 당하시겠습니까? 풀 마우스 임플란트 케이스 하나면 버는 돈입니다. 원장님정도 되시면 크게 부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서류를 내앞에 내밀었다.
펜을 꺼내 싸인이 필요한 곳에 엑스표 했다.
"여기 싸인하시면 됩니다."
"......"
"그럼 삼천 오백 어떻습니까? 두통거리를 안고 가지 마십시오. 싸인 한번이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
"......"
"돈의 액수는 핵심이 아닙니다."
"......"
"......실은 저도 한때 법을 공부했습니다. 법은 상식에서 출발합니다. 변호사님의 말씀은 상식에 어긋나고, 여러 부분에서 거짓말도 하고 계십니다. 구구절절 논리로 대응해 드리고 싶지만 제가 한가하지 않습니다. 변호사님 제안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일어나 치과로 올라왔다.
나는 묵묵히 진료를 이어갔다.
"원장님, 아까전 변호사라는데 전화통화 가능하실까요?"
"네, 잠시만요."
나는 진료중이던 환자를 마무리하고 원장실로 들어왔다.
"바쁘신데,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면 원장님 아주 파격적으로 이천만원에 합의하는 건 어떠십니까? 제 의뢰인도 일찍 마무리 하길 원하시고, 원장님 부담도 덜어드리고. 서로 윈윈입니다."
"논점은 금액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런 쪽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신데 최근 대법원 판례를 보시고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배우자의 기망으로 혼인한 김지은씨는 충분히 혼인무효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걸로 이미 충분합니다."
"......"
"더 해 드릴까요. 이미 배우자는 누적된 전과로 가중처벌을 받아 십오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 복역중입니다. 이미 육년간 별거상태로 실질적으로 혼인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한달전 대법원 판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
"게다가, 부끄럽지만, 나는 그동안 김지은씨가 혼인 상태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김지은씨와 주변 친구들이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변호사님, 승산이 있겠습니까? 시간들이고 정성들여 교통비라도 건질 수 있겠습니까?"
"......"
"김치수 변호사님이라고 하셨죠. 법무법인 화해."
"네...그렇습니다만."
"치과의사가 그렇게 어리숙하고 만만해 보이세요?"
"무슨 말씀을..."
"아까 까페에서 말씀하신 것과 지금 통화하는 것. 모두 녹음했습니다. 다시 절 찾아오시거나 이 건에 대해 전화하시면 변호사법 위반, 공갈 및 협박, 업무 방해로 고발하겠습니다. 상대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얻을게 없습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
그 젊은 친구는 예의 없게도, 인사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숨을 깊게 내 쉬었다.
한명 클리어드.
**********************************
금목걸이가 치과를 찾아 온 것은 십분 뒤였다. 이미 대기실에는 다섯명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