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07
"웜마, 고집불통 원장님이 치료는 잘 하시나 모르겄네. 워찌 요 이가 이러코롬 아파불까....워메 에려 죽껐네...워메 사람 주거...오메..."
모니터에 보이는 금목걸이는 대기실 바닥에 누워버렸다.
나는 내 치과를 구하러 대기실로 향했다.
실장은 금목걸이를 말리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금목걸이는 나를 보고 윙크를 했다.
"어이구, 가정 파괴범 원장님 오셨네. 유부녀 후리느라 공부도 안 하시는지 치료도 못 하시고 나는 이가 아파 죽네. 아이고 죽겠네......"
나는 금목걸이를 노려봤다.
"실력없는 원장이 나를 노려보네...아이고 무서워...무시무시한 눈으로 공부는 안 하고 나를 아프게 하네...나죽네...나죽어..."
기다리던 환자들 표정이 굳어갔다.
실장은 내 눈치를 살피고, 금목걸이에게 외쳤다.
"의료기관에서 행패부리면 크게 처벌 받아요. 어서 일어나서 나가세요. 경찰 부를 겁니다."
금목걸이가 일어나 바닥에 앉았다.
"아가씨도 가만 봉께...얼굴 반반한 것이 원장이랑...오메...했네, 했구먼...오메...신성한 병원서 강아지들 마냥 흘레를 붙고 그려...웜메 남사스러...아자씨들 아짐씨들 요로코롬 추접스런 곳서 치료받고잡소...어이구...나같으면 딴데 가것소. 요 옆에 백치과 잘 한다던디..."
금목걸이는 이제 겨우 몸풀기 했다는 듯, 또 내게 윙크했다.
금목걸이가 내 치과에서 신명나게 놀도록 놔둘 순 없었다.
"이제 그만하시죠. 노덕술씨."
나는 금목걸이의 당황한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노덕술이 누구요...? 난 박만돈디..."
"노덕술씨. 당신이 보낸 변호사사칭범도 꼬리 내렸어요. 이제 그만 하세요. 여기 진료받으려고 기다리는 분들 있는데...나 얼른 진료해야 되요. 그리고 아까 한바탕 노신거. 공연히 허위사실을 퍼뜨리셨어요. 제 명예와 우리 실장님 명예 훼손하신거에요. 실장님 성희롱도 하셨으니 성폭력범죄도 저지르셨네요. 저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오디오로 비디오로 녹화 되고 있는거 아시죠. 업무 방해, 공갈 협박, 의료법 위반. 게다가 발목에 소지하신 그 칼. 불법무기 소지. 가중처벌 사유에요."
금목걸이는 조용히 발목에 있던 나이프를 뒷주머니로 옮겼다.
"무신 소리여? 치과원장님이 갑자기 변호사라도 되셨나."
"내 진짜... 노덕술씨! 전과21범 노덕술씨! 동대문 경찰서 흑곰 알죠?"
"......"
"흑곰이 제 형님이에요. 내가 모두 없던 일로 할테니 지금 당장 나가세요. 더이상 시끄럽게 하지 마시고요."
금목걸이는 어물쩍 일어나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치과를 나갔다.
대기실에서 박수가 터졌다.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저런 인간들은 정말 큰벌 받아야돼."
"원장님 진짜 변호사도 하셔요?"
그리고 나는 그날의 진료를 이어갔다.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저녁 생각도 없었다.
[알라뷰. 나 퇴근해서 집이야. 자기는?]
[나두. 근데 피곤해. 저녁도 못 먹겠고 우선 자야겠어.]
[변호사랑 박만도는]
[잘 해결되었어. 설명하려면 긴데. 둘다 사기꾼이었어. 다시는 못 오게 잘 마무리 했어.]
[와...우리 자기 똑똑이. 뽀뽀]
[나도 뽀뽀]
[나 잘게]
방안에 불을 끄고 나는 편안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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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개운한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전진료를 마치고 거의 점심시간이 될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원장님 친구분이시라고 찾아왔는데, 장성용이라고."
"아. 고마워요."
나는 대기실로 뛰어 나가 장성용을 얼싸 안았다.
183에 단단한 몸. 오똑한 콧날. 서글 서글 눈. 하지만 감출 수 없는 카리스마. 정우성보다 잘생긴 상남자 장성용이 나를 만나러 왔다.
성용은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통신 붐이 일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고된일을 이겨냈다.
무엇보다 아시아인으로서 인종차별을 이겨냈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통신회사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그 회사에서 성용은 유일한 아시안 메니져이다.
아마 연봉이 내 열 배는 넘을 것이다.
"어떻게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네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처형이 찾아줬어."
"처형이?"
"응. 처형이 위생사인데. 일하는 곳 원장님께 물어봤데. 알수 있는지."
"아..."
"협회 주소록이 있어서, 거기서 네 이름을 발견했다고."
"맞아. 이바닥이 좁아서...알려고 하면 누가 어디서 뭐하는지 금방알아. 죄짓지 말아야돼."
"네가 죄지을 위인이냐..."
"......"
죄.지.을. 위.인.
나는 성용에게 이미 죄지은 쓰레기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나는 성용과 아랫층에 있는 초밥집에 갔다.
"미국 생활 어때 힘들지 않아?"
"스트레스야 뭐. 어느 직업이나 있지. 너도 힘들 때 있잖아."
나는 지은이와 겪은 일을 성용에게 간단히 들려주었다.
"와우. 영화다 영화. 야...부럽다. 아주 재밌게 사네."
"재미는 무슨. 그제, 어제. 아주 죽는 줄 알았어. 우리 사촌형 아니었으면 그 박만돈지 노덕술인지한테 오늘도 시달리고 있었을 거야. 세상이 좁긴 해. 사촌형이 박만도 듣자 마자 딱 알더라고"
"그러게, 그래서 죄짓지 말아야돼.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듣는 나는 재밌다 야. 미국은 사실 지루해."
"다이나믹 할 줄 알았는데."
"진짜 다이나믹은 코리아네요. 나 이번에 일년동안 한국에 있을거야. 파견 나왔어. 회사에서 강남에 오피스텔도 잡아줬어."
"애들이랑 제수씨는...?"
"제수씨가 뭐냐. 형수님이지. 미정이도 같이 나왔지. 애들도 한국학교 다닐 거고. 미정이는 애들이랑 처갓집에 있을거야."
나는 그 처가집에 가본적이 있다.
"이 동네에 삼촌내 사시는데...너도 알잖아 우리 삼촌이랑 숙모."
나는 성용이 가족들을 자주 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배고팠던 나는, 성용의 집에서 점심, 저녁을 얻어 먹곤 했다.
거기서 자는 날엔 아침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신세를 졌다.
그중 대부분을 성용이 집에서 지냈다.
성용이 엄마도 나를 아들처럼 생각했다.
육학년이 되어 나는 성용보다 10센티미터 이상 커졌고, 내 몸엔 남자다운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성용이 엄마는 신경쓰지 않았다.
내 앞에서 속옷만 입고 돌아 다녔다.
모델 같은 삼십대 초반의 몸매는 나를 자극했다.
야설에서 나올법한 위기가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하늘이 도왔다.
상상으로 끝났다.
성용과 나는 서로 다른 중학교에 들어갔다.
방문 빈도가 줄어들었다.
성용은 주로 일진들과 어울렸고 나는 점점 공부에 집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용은 전문대에 진학했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입학 하자마자 성용은 학생회 활동, 동아리 활동으로 바쁜 날을 보냈다.
나는 재수중에 특별히 누구를 만나지 않았다.
스스로 술을 익혀, 혼자 호프집에서 생맥주 두세잔을 마시기는 했다.
그게 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작은 보상이었다.
가끔 성용이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우린 함께 맥주를 마셨다.
미정을 본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월의 푸르른 어느날.
성용은 미정과 함께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같은학교 동기라고 했다.
성용은 183키로 터프한 미남.
미정은 160정도의 미녀. 김태희를 닮았다.
둘은 잘 어울렸다.
하지만, 성용은 미정을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정은 예뻤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돌아보면, 성용의 아버지가 마초 그 자체였다.
나는 주도권을 휘두르며 마초스러운 친구가 부러웠다.
6월에도 미정과 성용이 날 찾아왔다.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친구는 여전히 마초였다.
7월말, 휴가철에 재수생들은 힘들어 했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내가 설정한 목표만 생각하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성용이 갑자기 연락을 했다.
[오늘 볼까]
나는 좋다고 했다. 공부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거 같았다.
[6시까지 갈게]
[콜]
약속시각 6시.
10분을 남겨놓고 성용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갑자기 일이 생겼어. 많이 늦을 거 같은데... 우선 미정이랑 놀아. 끝나는 대로 갈게."
나는 이미 약속장소에 있었다.
어릴적 미군방송으로 본 영화가 생각났다.
백인 남자 선교사가 에스키모 가족을 방문했다.
남편 에스키모는 그를 손님으로 극진히 대접하고, 자기 아내를 데려와 그날 밤 함께 자라는 말을 에스키모 언어와 몸짓으로 한다.
그리고 그날밤 자리를 비켜준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남편이 집에 돌아 왔을 때 그 선교사가 자기 아내와 동침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결국 그 선교사를 때려 죽인다.
그 에스키모 남편은 선교사에게서 모욕감과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성용에게 해 주었다.
"에스키모 커플이냐? 왜 내가 친구 애인이랑 놀아?"
"하하하. 에스키모 얘기 재밌네. 부담 갖지 말고 걔랑 아무거나 해도돼. 술이든 노래방이든. 사실 내가 갈 수 있을지도 불확실해. 아마 거의 못 갈거야."
"아무거나? 이게 무슨 상황이래. 그거도 되?"
"......"
"농담이야."
"음...그거는...알아서 하든지."
"농담이라니까. 가능하면 노력해서 와라. 나 어색하다."
"알았어."
성용과 대화가 끝났을 때, 미정은 예쁜 원피스 차림으로 내 옆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