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09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개새끼들아..."
몇몇 남자가 멀리서 고개를 내게 돌렸다.
"하하하. 그새 대사를 바꾸네. 창의력 인정."
"......"
"역시 공부잘하는 놈은 달라."
우리는 함께 모래사장을 걸었다.
이번엔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이 스쳤다.
나는 손을 잡았다.
"어어. 이새끼 밝히는 거 봐."
"......"
"너...성용이랑 싸우면 이겨?"
나는 손을 놓았다.
"성용이가 네 자랑 많이 하더라. 유일하게 공부잘하는 친구라고. 서울대 갈거라고. 너 중학교때는 매번 전교일등이었다며. 고등학교에서도 전교 5등 안에 들었다고 하던데...성용이가 넌 검사나 판사가 될 거라고 하더라. 맞냐?"
"......"
"이리 와봐."
미정은 내 팔짱을 꼈다.
"내가 누나같아서 하는 소린데, 공부 열심히 해서 성용이 소원좀 들어줘라. 쓸데 없는데 신경쓰지 말고."
"......"
"이 누나가 니 마음 다 이해해. 오늘 마지막으로 품어줄게. 그리고 나 좋아하지마. 성용이랑 싸워서 이기지도 못 한다며..."
"......"
"가자 밥먹으러."
우리는 물고기 모양 네온싸인이 번쩍이는 수산물 회센터에 들어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미정은 새로운 접시가 나올 때 마다 살뜰이 챙겨주었다.
우럭 광어 모듬 접시가 나왔을 때는 직접 쌈을 싸서 내입에 넣어주었다.
매운탕이 끓었을 땐, 보기좋게 만든 매운탕 그릇을 내 앞에 놓아 주었다.
어느새 소주병이 테이블 위에 두줄로 늘어섰다.
미정이 테이블에 엎드려 힘들어 했다.
나는 미정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일으켰다.
"가자. 많이 취했어."
"어디 가게. 나랑 할라고?"
"......"
"근데...성용이 이새끼는 전화 한통 없냐. 지 마누라가 친구새끼랑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가자."
"그래 나가자. 이 누나가 잘 해 줄게."
미정은 비틀거리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나는 미정이의 나머지 짐을 들었다.
미정이 계산을 하고 횟집 문을 나서다 앞으로 넘어졌다.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모래 바닥이었다.
미정의 얼굴은 모래로 덮혔다.
나는 모래를 털어냈다.
"눈 감아봐... 후우...후우..."
모래가 얼굴에서 거의 없어졌다.
"괜찮아...?"
"너같으면 괜찮겠냐? 아오 쪽팔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머물 곳이 많았다.
"일어나...여기 업혀."
나는 미정에게 등을 내밀었다.
"그래 미래의 판사 등에 함 업혀보자."
미정은 가벼웠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모텔 입구를 통과했다.
나는 미정을 등에서 내렸다.
미정은 저번처럼 '숙박이요'를 외치며 현금 6만원을 작은 창문 너머로 건냈다.
비틀거리는 미정을 부축하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정을 침대 위로 눕혔다.
미정의 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내 셔츠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해바라기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거울속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
동태의 죽은 눈 같았다.
양치만 하고, 면도는 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채 객실로 나왔다.
더운공기가 습했다.
에어콘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미정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미정의 양말을 벗겼다.
겉옷을 벗기고, 청바지를 내렸다.
미정이 눈을 떴다.
"뭐야. 지금 하자고?"
"......"
"조금만 있다가. 나좀 씻고."
미정은 다시 잠들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고, 의자에 앉았다.
티비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보니 성인 방송이 나왔다.
나는 방송을 보며 내 손으로 해결했다.
휴지로 뒷정리를 하고 옷장에서 가운을 꺼내입었다.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햇살이 눈부셔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침대 위에 나 혼자만 있었다.
테이블엔 메모와 삼만원이 있었다.
[나 먼저 간다. 차비해라]
아침 아홉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쓸쓸히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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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성용과 미정은 학원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문자도 전화도 없었다.
나는 미정과 성용의 바람대로 그 대학에 들어갔다.
내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검사나 판사가 되다는 건 내게 쉽지 않은 일로 보였다.
하지만, 일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동기중 상당수가 이미 사법고시 전선에 참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곧 사시가 폐지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로스쿨로 일원화 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아울러, 고시 폐인이나 고시 낭인이라는 주제가 시사프로에 많이 등장했다.
최소한 이년안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나도 고시 폐인으로 남고, 로스쿨이라는 제도에 떠내려 갈 듯 했다
이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들어 있을 때, 성용에게서 연락이 왔다.
12월 24일 오후 네시에.
크리스마스 이브.
지하철안에선 많은 커플들이 서로를 부등켜 안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빨간색들과 초록색들이 서로 뒤섞여 서로를 갈구하며 꿈틀거렸다.
[이번 역은 충무로 충무로역입니다.......]
나는 충무로 골목이 낯설었다.
성용은 미정이와 통화하라고 했다.
골목 골목을 돌며, 미정에게 여러번 전화한 끝에,
"거의 다 왔어. 거기 기다려 내가 나갈게."
친절한 마중을 받았다.
미정은 여전히 예뻤다.
하얀 털 옷 위로 봉긋함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미정을 따라 들어간 곳은 출판사였다.
행복출판사.
출판사 안은 아늑했다.
털이 복슬복슬한 젖소무늬 카우치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이 여러개 벽을 보게끔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들은 'Mac'이라는 로고와 함께 번호표들이 붙어있었다.
미정은 거기서 출판 디자이너로 일 하고 있었다.
학교 졸업도 안 한 커리어 우먼.
검은 스커트 라인이 꽤 섹시해보였다.
"여기서 파티하는 거야?"
미정은 1번 모니터 앞에 앉았다.
"파티는 무슨..."
미정은 책 한권을 보며 프로다운 솜씨로 타이핑 하기 시작했다.
"성용이가 여기로 오면 된다고 했는데..."
"불쌍한 인간 구제해 주느라 파티는 물 건너갔고... 그 와중에 그 불쌍한 인간은 지 혼자 파티간다고 지랄이네."
미정이의 빠른 타이핑소리가 지붕에 부딪치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기 시작했을 때, 성용이 뛰어들어왔다.
성용의 두 손에는 패밀리마트 로고가 선명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만두, 삼각김밥, 호빵, 샌드위치, 콜라 등이 비쳐 보였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내가 지금 급하게 어디 가봐야 돼."
성용이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왼쪽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가르켰다.
명품관에서 볼 수 있는 시계였다.
"자세한 설명은 미정이한테 듣고. 그럼 다음에 봐."
성용은 그대로 뒤돌아 뛰어나갔다.
누가 밖에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는 듯 했다.
이런 희안한 상황은 무엇일까.
거의 일년 반만에 본 친구에 대한 10초 컷.
그리고 여친을 내게 토스.
독특한 친구의 나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다.
데자뷰.
'에스키모 2탄인가?'
다음세대가 더 다양한 유전자를 갖길 기대하며
자기 아내를 던지듯,
미정을 내게 던진 것인가?
"F가 두개 뜨셨는데, 교수님이 크리스마스 다음날까지 리포트 제출하면, D로 살려주신다고 했다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구제중이야."
"지가 F받았는데, 자기는 뭐하고?"
"파티하러 갔지."
"파티?"
"선배들이랑 놀아야 한데."
"여자친구는?"
"내 말이...나도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하나 싶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대단한 의전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0초는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만만한 존재인가.
"좀 도와줄까?"
"그럴래? 이 책 표시한 페이지마다 아무 생각 없이 타이핑 하면 돼."
미정은 300페이지정도 되는 책을 내게 건넸다.
나는 2번 모니터에 앉았다.
미정은 2번 전원을 켜고 허리를 굽혀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시간이 멈췄다.
미정의 까만 머리카락들이 얼굴을 가리고 아래로 떨어졌다. 하얀 목줄기의 근육들이 잔잔히 움직이는게 보였다.
근육사이로 파란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 혈관 아래에서 맥박이 사랑스럽게 뛰고 있었다.
내 마음속 세포들도 뛰기 시작했다.
미정의 단 내음 진한 향수가 폐 속 깊게 퍼졌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 마시고 또 들이 마셨다.
미정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일어나며 나를 쳐다봤다.
"뭐냐... 변태같이. 눈 꼬라지봐라."
"......"
"이젠, 날 보기만 해도 기분좋냐? 아직도 나 좋아해?"
"......"
"불편한 분위기 만들지 말고, 니가 좋은 친구 둔 덕이니까 열심히 해라..."
그렇게 말하는 미정의 어깨선과 그 아래로 봉긋한 라인이 나를 살짝 흥분시켰다.
"그럼 수고..."
미정은 1번으로 돌아가 빗소리 같은 타이핑을 이어갔다.
내 마음속에는 슬픈 빗줄기가 흘러 내렸다.
성용과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부터 오랜시간 친구였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몇번 있었다.
나는 그 이해되지 않는 순간마다 불편했다.
초등학교 4학년.
성용은 내게 극장에 가자고 했다.
엄마가 용돈을 주실거라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성용이 엄마는 살구색 팬티와 브레이지어만 걸친 채 나를 안아주셨다.
뽀뽀도 했다.
엄마는 방 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