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3
"하지만, 애기들 아빤데 어쩌겠어. 양육권을 달라길래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는 위자료 이백만 달러를 요구했지."
"성용이가 순순히 들어줬어?"
"그럼 안들어줄 수가 없지. 감옥에 가는데. 나는 그 돈 받아서 집을 나왔어. 아파트 렌트 얻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 여기선 물리치료라고 하나...미국에서는 시스템이 좀 다른데, 지금은 메디컬 센터에서 닥터랑 비슷한 대우받고 일 하고 있어. 박사까지 하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거야. 난 지금 후련하고 행복해."
"너 참 대단하다."
"대단하긴...인생을 매만 맞으며 허비하긴 너무 아깝잖아..."
그때, 방문 벨이 울렸다.
나는 당황했다.
방문할 사람이 없었다.
"누가 이 밤에 찾아왔을까? 여자 아냐?"
미정은 웃으며 옷을 입었다.
나도 대충 옷을 입고 보안폰을 보았다.
지은이였다.
"미정아 여자는 여잔데, 지금은 사귀는 사이가 아닐거야...편하게 봐주면 좋겠어.."
"아닐거야?..아닐거야는 뭐냐...알았어. 그렇게 해 볼게"
"내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줄게."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지은아 잘 지냈어?"
"응. 오랜만이야...안에 누구 있어?"
"괜찮아. 들어와도 돼. 외국에서 오랜만에 친구가 왔어."
"여자야...?"
지은이는 현관앞에 놓인 미정의 빨간색 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들어와."
"......"
"괜찮아요...들어오세요."
미정이 안에서 걸어나왔다.
"지은씨...말씀 많이 들었어요."
나는 한번도 말 한 적이 없었다.
미정과 지은 사이에 곧 터질듯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자기야...나...나중에 올까?"
"......"
"아니에요. 나...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그 쪽 자기님하고 나하곤 뭐 소꼽친구같은 사이니까...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
"나... 간다. 오랜만에 커피 잘 마셨어."
"......"
"나오지마, 바로 앞에서 택시타고 가면 돼."
미정은 가방에서 오만원짜리를 꺼내 흔들었다.
"지은씨하고 오붓한 시간 보내...지은씨 나중에 또 봐요..."
현관문을 열고, 미정은 밖으로 나갔다.
내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잘 지냈어...?"
쌍커플 없는 까만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화장 자국이 팬더처럼 까맣게 보였다.
"나는 잘 지냈어. 자기도 잘 지냈어?"
"응...오늘 나 할 말 있어."
"그래...우선 우리 앉자. 뭐라도 마실래...?"
지은이와 나는 식탁 테이블에 앉았다.
"나 술 마시고 싶어..."
"그럼 우리 나갈까? 저녁은 먹었어?"
"저녁으로 치킨에 맥주 어때? 요 앞에 내려가자."
"아니야. 나 여기서 먹을래."
"그럼 시키지 뭐. 요 바로 앞집에다 시킬게."
"그래..."
나는 냉장고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를 보면서 치킨 한마리와 맥주 2리터를 주문했다.
지은이는 할말을 아꼈다.
본론을 향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뭔가 큰 게 있었다.
한달도 더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이 밤에 불쑥 나타났다.
지은이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나 자기랑 뽀뽀 한번 해도 돼?"
"......"
그것도 지은이 답지 않은 멘트였다.
나는 자리를 지은이 옆으로 옮겨 앉았다.
볼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말고 제대로..."
나는 지은이 입술을 찾아 제대로 부딪쳤다.
지은은 입을 열어 나를 맞이 했다.
지은이의 혀 움직임에 갈증이 있었다.
나는 그 달콤한 갈증에 화답했다.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침실로 이동했다.
새로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갔다.
때론 빠른 붓놀림으로, 때론 무거운 붓놀림으로 빈 공간을 채워갔다.
지은은 거친 숨소리로 화답하며 도화지 위에 촉촉한 물기를 더했다.
그렇게 균형잡힌 그림이 완성되나 싶더니, 결국 도화지는 빠른 붓놀림으로 채워져 갔다.
뒤로 물러섬 없는 거세고 빠른 붓질에 지은의 숨이 점점 가빠졌고 동공이 새까맣게 열렸다.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다급하게 자기를 사랑하냐며 반복해서 물었다.
나는 사랑한다고 외쳤다.
나는 마지막으로 미친듯이 광란의 붓질을 했다.
지은이 위로 쓰러졌다.
도화지는 땀으로 물들었다.
지은은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방문 벨이 울렸다.
나는 지갑에서 만원짜리 두장을 꺼냈다.
옷을 간단히 챙겨 현관으로 나갔다.
인터폰 모니터를 확인했다.
현관에는 성용이 서 있었다.
"지은아 옷입어...!"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
지은은 놀란 얼굴로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며 거울을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오케이 싸인을 보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야...갑자기 찾아와 미안하다...아깐 미정이가 있어서 중요한 말을 못했는데..."
"......"
성용은 지은과 눈이 마주쳤다.
"어..안녕하세요. 제수씨...장성용이라고 합니다."
"네...안녕하세요."
"제가 뭔가 방해한 거 같은데..."
성용은 지은의 헝클어지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우리 치킨 시켰는데...같이 먹자."
"나 배불러...아까 많이 먹었어...저 제수씨 죄송한데, 오분만 남자친구 좀 빌리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아...네...괜찮아요."
성용은 나를 데리고 현관 문 밖으로 나갔다.
성용은 내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사이즈로 봐서 초대장이었다.
"나 다음주에 결혼한다."
"응....축하해."
나는 내 실수를 뒤늦게 깨달았다.
미정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야 했다.
축하를 먼저 한 것이다.
"미정이 한테 어디까지 들었냐?"
"응...이혼했다고."
"할 얘기는 많은데...하여튼 그렇게 됐다...요새 뭐 이혼이 흠도 아니고...이번에 한국 온 것도...재혼 때문에 겸사겸사 온거야. 미리 소개시켜 줬어야 했는데...새 형수님은...재미교포야... 육학년때 가족이 미국에 왔는데...지금은 식 때문에 모두 한국에 있어..회사에서 내 밑에서 일했는데 키도 크고 아주 똑똑해...나는 너무 고생해서...인제 똑똑한 여자가 좋다...아무튼 일요일에 보자. 가족끼리만 모여 소박하게 하는데...넌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성용은 늘 그렇듯, 바로 목전에 두고 일을 통보했다.
"응. 가도록 할게...근데 왜 이혼 했어?"
"야...말 마라...내가 할 말이 정말 많은데...미정일 공부하라고 학교 보냈더니 새파란 놈하고 바람이 났어. 그것도 학생이랑. 주제를 알아야지...."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치킨집 사장님이 내렸다.
"배달 왔습니다."
"야... 나 갈게. 제수씨한테 인사 못하고 간다고 잘 말해줘. 일요일날 보자."
"그래 잘 가."
성용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아..죄송합니다. 얼마죠...?"
"네. 이만 천원입니다."
"네 여기 이만원하고요...잠시만요."
나는 현관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지은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책상 서랍을 급하게 뒤져 오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찾아냈다.
옆에 있던 게보린 캡슐이 눈에 들어왔다.
지은을 보고 찡긋 웃었다.
다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동전들을 사장님께 건네고, 치킨과 맥주 페트병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식탁에 세팅하고 지은이를 불렀다.
지은에게 맥주로 채운 잔을 건넸다.
"친구는 갔어?"
"응...인사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그래서...오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친구가 정말 잘생겼다..."
"응...어릴때부터 잘 생겼어...싸움도 잘하고...정우성하고 닮지 않았어?"
"그렇네...어쩜... 맞다..."
"그래서...할 얘기가 뭐야...나 궁금해..."
"뭐가 그리 급해...나 배고파 이것 좀 먹고..."
"그래 우선 먹어..."
"지은이 다 먹어도 돼. 난 배불러..."
"아니야...같이 먹어..."
"그래 이거 하나만 먹을게..."
나는 날개부위를 손으로 잡았다.
지은은 내손을 쳤다.
닭 날개가 떨어졌다.
지은이는 대신 다리부위를 집어 주었다.
나는 웃었다.
어느새 치킨을 다 먹고 정리 했다.
지은은 피곤하다며 침대에 눕자고 했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지은은 팔베개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오른 팔을 빌려주었다.
지은은 내 가슴을 쓰디듬으며 말을 시작했다.
"자기야...혹시 캐나다 갈 생각 없어?"
"캐나다...?"
"거기 영주권도 받기 쉽고, 살기 정말 좋데...알아보니까 치과의사들은 일주일에 삼일만 일하고...그래도 풍족하게 잘 산다고..."
"진짜?"
나도 캐나다로 이민간 선생님들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적이 있었다.
협회에서는 이주희망자를 위해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넓고 깨끗한 자연에서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사진으로 본 자연은 확실히 멋졌다.
인정.
하지만 수준 높은 삶은 무엇일까.
나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사흘만 일하면 정말 좋겠네...나도 갈까?"
"정말...생각있어?"
"글쎄, 그렇게 좋다면야..."
"사실 나 1년 휴직 신청한거 오늘 승인 났어."
"휴직?...왜 어디 아파...?"
"아니...나 캐나다 가려고...잘 만 하면 1년 안에 영주권 받을 수 있대."
"혹시...무슨 사기같은 거 아냐? 방송보니까 그런거 많다던데...? 이민 브로커들 질이 안 좋대. 잘 알아봤어...?"
"그런데 안 끼고...나 혼자 해볼라고...인터넷까페에서 후기들 읽어보니까...할 만 하겠더라고..."
"지은이야 똑똑하니까...알아서 잘 하겠지만...그래...내가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을거야...열심히 응원할게...그래서 언제가...?
"돌아오는 일요일..."
"이번주?...그렇게 빨리...?"
"......"
"나 눈물 날거같아...정말 가는 구나..."
"응. 갈거야..."
"딸은?"
"여기서 엄마랑 있을거야...그래서 하는 말인데...우리 엄마하고 딸 좀 도와줄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특별한 건 없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내가 부탁할 게. 일부러 찾아가고 그럴 필요는 없어. 딱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자기 밖에 안 떠올랐어."
"그래. 걱정하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