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1
"나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내 친구 장성용이..."
"내 육감을 확신으로 바꾼게 뭔지 알아?"
"뭔데...?"
"장성용 출국했어...지난 일요일 오후에..."
"뭐라고?"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한다.
성용과 나는 종로 세운상가에 가서 외국 잡지를 사기로 했다.
우리는 무척 어린나이에 조숙했다.
세운상가는 조숙한 아이들에게 환타지를 심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주제는 더이상 의도한 잡지 구입에서 멀어졌다.
무척 불운한 하루였다.
성용과 내가 세운상가 건물 앞에 섰을때,
갑자기 어떤 할머니가
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에 번갯불이 번쩍했다.
내 손목을 잡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아이는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가위 들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용을 쳐다봤다.
성용은 내 눈길을 외면한 채 도망갔다.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하든 극복해야 했다.
소리를 지르려고 노력했다.
나는 할머니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이내 다시 잡혔다.
할머니는 사정없이 내 얼굴을 때렸다.
때마침 양복입은 아저씨 한명이 옆을 지나갔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이 할머니가 절 때리고 끌고가요?"
아저씨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도와주었다.
"할머니 이 아이 알아요?"
"네 아는 애에요. 엄마가 찾아서."
"근데 왜 다 큰애를 때려요..?"
"아저씨 거짓말이에요."
비로소 내 목소리가 뚫려 소리를 칠 수 있엇다.
아저씨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경찰서 갑시다..."
할머니는 내 손목을 놓쳤다.
"너는 집에가봐..."
"감사합니다..."
나는 뛰었다. 무조건 큰 길을 향해 뛰었다.
그날 그렇게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혼자 집에 왔다.
다음날 만난 성용은 나를 버린 이유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
성용은 미정이 죽고 내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
대답없이 출국을 했다.
어쩌면 나를 버린것 이상의 일을 했는지 모른다.
"장성용이 왜 그리 급하게 출국했을까?"
'글쎄..."
"네가 알려준 프레지던트 호텔에도 알아봤는데, 노쇼였데, 예약금만 걸고 아무도 안 나타났던거야...호텔에서는 연락을 했는데도 연락이 안되서...그날 부페며 준비한 걸 일단 손실로처리했다고 하더라 ...법적 대응하기도 애매한 사이즈고...추심팀에 넘기기도 애매해서."
"느낌이 안 좋네..."
"나는 뭔가 해결 될거 같아 느낌이 좋은데... 마치 뭘 하다 들켜서 톡끼는 그런 느낌 안드냐?"
그때, 여왕님과 나 사이에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어 형..."
"내가 오히려 너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다..."
"우리 사촌형님이야...형 내 변호사야...초등학교 동창이고..."
둘은 서로 명함을 나누며 인사했다.
"독사 그놈이 나한테 그렇게 서운한줄 몰랐네...나는 한다고 했는데..."
"만나봤어?"
"지금 막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근데...내가 사건 파일을 보니까 기본적으로 부족한게 많이 보였어...그래서 다른 후배들한테...그 모래사장 주변 카메라하고, 호텔 주변 카메라 조사를 부탁했어...현재는 그게 제일 중요한거 같아..."
"난 운전한 적 없어..."
"알아...네가 차로 가는 장면이 없는 것도 확인되었고...들어오는 장면이 없는 것도 그렇고..."
"저기 죄송한데...전 좀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여왕님이 흑곰형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바로 서울로 올라가봐야 해서...같이 나가시죠?"
그렇게 나는 면회를 마치고 다시 사방으로 돌아왔다.
사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방 식구들은 모두 운동을 하러 나갔다.
운동 끝날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방안에 혼자 머물게 되었다.
"교도소 생활 할만 해요?"
교도관이 말을 걸어 왔다.
"네 괜찮습니다. 할만하네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적응해서 살다보면...어느정도 되면 오히려 편하다는 사람도 있어요."
"아 네..."
"사건 기록 보고...아저씨 인상 보니까...범인은 아닌거 같아요...곧 풀려날 거에요..."
"감사합니다."
"그때까지 건강 잃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무일 없을 겁니다."
"네..."
"7489하고는 친구 사이라면서요...?"
"네..."
"운 좋게 방에서 친구도 잘 만나셨네요.성격도 좋고...모범수죠...여기 들어온 두목급들은 보통 그래요..성실하고...모범적이고..."
밖이 소란스러웠다.
운동을 마치고 사방 식구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흑곰 형님 왔던데..."
"응 만났어..."
"그 여자가 변호사야?"
"응..나 초등학교때 친구야..."
"어때...좀 진전이 있어...?
"응 어제 사방 식구들이 말 해준대로 장성용이 좀 수상하대."
"그렇구나..."
그때 저녁식사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 식구들이 분주했다.
바닥에 식사포를 깔고, 배식구를 통해 음식을 들였다.
영치금으로 산 반찬들이 사이사이 놓였다.
푸짐한 저녁밥상이 사방 바닥에 차려졌다.
막내는 소지에게 간식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식사하시죠 형님."
"그래...다들 식사합시다..."
모두 식사 속도가 빨랐다.
10분이 흘렀을때 모든 그릇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막내와 진철이 커피를 탔다.
"형님 어떻게 오늘 변호사 접견은 소득이 있습니까?"
"네...좀 진전이 있습니다. 어제 말씀들 해주신대로...의심스러운 보안 영상을 지적했고..."
"맞어요...그 영상만 확보되면...형님은 밖에 나가실 수 있어요..."
"네 고맙습니다...무엇보다...장성용이 사건 당일 출국했다는게 의심스럽습니다."
나는 여왕님과 나눈 중요한 이야기들은 식구들에게 해 주었다.
"게임 끝이네...인터폴에 그 두사람 신병확보 요청하고...형님은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되고...축하드립니다."
"뭐...아직 확정된게 아니니 조심스럽습니다."
"딱 봐도 보험 사건입니다."
성진이 말을 이었다.
" 김미정씨 앞으로 생명보험 든 거 없는지 살펴보세요. 김미정씨가 사망하면 그 보험금은 언니나 자녀 앞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내연녀가 보험금을 받든...자녀가 받든 결국 장성용 앞으로 가는 꽃놀이 패입니다. 아마 언니가 무리하게 부검을 의뢰한 것도 보험금때문일 겁니다. 사고나 타살에 의한 사망을 입증해야 보험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맞네..."
"누명을 벗게 되서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검사실의 계장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모니터 앞에서 자기들 일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여왕님은 검사방 안에 들어간지 꽤 시간이 흘렀다.
두런두런 대화 소리만 이어졌다.
간간히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가 멈추고, 침묵이 이어졌다.
계장들은 자기들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검사실 문앞에 귀를 가까이 했다.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검사실 문을 살짝 열었다.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여왕님은 책상위에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책상 끝 모서리에는 여왕님의 안경이 위태롭게 자리했다.
공유는 검사방 창문을 가렸다.
어두워졌다.
공유는 그 여왕님을 뒤에서 안았다.
공유가 움직였다.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유는 여왕님의 안경을 밟았다.
신경쓰지 않았다.
공유는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여왕님은 벌써 눈에 촛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커다랗고 새까만 원이 여왕님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뜨거운 숨만 토해 내고 있었다.
공유는 그렇게 여왕님을 점령해 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유가 나를 쳐다보며 윙크했다.
"1314...우리 후배님..."
나는 공유에게 다가갔지만,
공유를 만질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바람빠지는 소리만 목을 통과했다.
"1314..."
"1314..."
나는 눈을 떴다.
문 밖에서 교도관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이...1314...잠 깨워서 정말 미안한데...어디좀 가줘야 되겠어."
"네..."
나는 문 밖으로 나갔다.
거기엔 다른 교도관이 서 있었다.
그를 따라 사동 복도를 걸어갔다.
사동은 조용했다.
통문(사동끼리 통하는 문. 항상 보초가 서 있다.)을 몇개 통과하여 나는 의무실로 들어갔다.
키 큰 여자였다.
파란 재소자 옷을 입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누워 있었다.
상의가 말려 올라가 배꼽이 보였다.
예쁜 배꼽이었다.
침대 옆에 있던 여자 교도관이 나를 위 아래로 쳐다 봤다.
"1314 저기 저 여자 좀 어떻게 해줘야겠어."
나를 데리고 온 교도관이 입을 열었다.
"밤새 이가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고...난리도 아냐..."
나는 의무실을 둘러봤다.
낡은 덴탈체어가 하나 있었다.
"네...환자분 이쪽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여자 교도관이 누워있던 여자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3214 내려와..."
여자는 헝클어진 사자 머리가 되어 일어났다.
공효진을 닮았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린 채 덴탈 체어에 털석 주저앉았다.
나는 여자를 눕혀 입 안을 살펴봤다.
구취가 심했다.
여자가 가리키는 어금니 부위에 충치가 보였다.
더 자세한 검사가 필요했지만 생략했다.
나는 마취앰플을 찾아 시린지에 얹었다.
정성을 쏟아 마취를 했다.
여자는 마취를 아파하지 않았다.
점점 여자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얼굴을 감쌌던 손이 가슴 아래로 내려왔다.
마르고 키 큰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큰 가슴을 갖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네..."
"충치가 신경을 자극해서 아픈거에요. 응급조치만 해 드릴게요. 나중에 제대로 치료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