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
여왕님은 내 아파트로 들어오자 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나는 라면물을 얹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 화장실에서 물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었다.
"야...너 혼자 사는 놈이 집 깨끗하네...좋아 맘에 들어...근데 너 뭐하냐?"
"응...속이 더부룩해서...혹시 너 라면 먹을래?"
"뭐래...이 미친놈...너..나한테 라면먹고갈래?...그래 조금만 줘봐..."
우리는 식탁에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라면 한그릇 씩을 먹었다.
"여기 맥주..."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여왕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여왕님은 맥주를 들이켰다.
"다시 내려가기 귀찮다. 그냥 여기서 맥주 마시자..."
나는 옆 의자에 다리를 올렸다.
"너...혹시 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지...?"
"그래도 한때 서로 좋아한 사인데..."
"그게 뭐...이상한 짓 하기만 해 봐라...나 변호사야...나 성폭력 전문인거 알지...?"
"서운하게 뭐라냐..."
나는 옷장으로 걸어가 오만원 다발을 하나 더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네가 없었으면...나는 큰일 날뻔 했어..."
여왕님에게 건넸다.
"오...감사..."
여왕님은 돈다발 냄새를 한번 맡고 소박한 가방 안에 넣었다.
나는 또 맥주캔 하나를 여왕님 앞에 내려놨다.
오징어를 구워 테이블에 올리고, 마요네즈를 작은 종지에 담아 옆에 두었다.
여왕님은 바로 캔을 비우고, 오징어를 찢어 마요네즈에 찍었다.
"천천히 마셔...갈증나냐?
"아까 라면이 좀 짰어...라면하나 제대로 못 끓이냐...?
"봉지에 써 있는대로 했는데..."
나도 맥주 캔을 하나 들이켰다.
빈 맥주캔이 하나씩 늘어났다.
여왕님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한참을 있다 나왔다.
여왕님은 양머리 수건을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야...너 편하게 입을 옷 없냐?"
나는 트레이닝 복을 화장실 안으로 넣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수증기 냄새가 향긋했다.
내 몸에 변화가 생겼다.
여왕님은 내 트레이닝복을 입고, 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나 좀 잘테니까, 손 끝하나 건들면...넌 감방에 다시 가는 줄 알아..."
"옷 잘 어울리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온 몸을 구석구석 씼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여왕님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야...너 이리와봐"
나는 침대로 갔다.
"......"
"너 ...책임감 있게...정말 ...멋지게 살아야 돼...내 첫남자잖아..."
"......"
여왕님은 나를 안았다.
우리는 다시 성숙한 육학년이 되어,
서로의 몸을 사랑했다.
나는 교육이 필요 없는 남자임을 증명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여왕님은 암 늑대가 되어 낮고 그릉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한 고개를 넘었다.
여왕님은 내게 후한 평가점수를 주었다.
나를 꼭 껴안고 밤새 놓아주지 않았다.
"우린 정말 그때 사랑을 했을까?"
"적어도 나는...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사랑했다...그리고 두려워 했다. 캬...파스텔 톤 사랑..."
우리는 그날 그렇게 서로 사랑을 했다.
나는 눈을 떴다. 7시.
여왕님은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 나왔다.
냉동실에 있던 전통 된장찌개 팩을 뜯어 냄비에 끓였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스팸을 뜯어 팬에 구웠다.
김치를 꺼내 접시에 가지런히 담았다.
반숙 계란 후라이 두개를 했다.
소박한 아침 상이 준비 되었다.
"여왕님 이제 아침 드셔야 할 시간입니다."
"뭐야...이 냄새..."
"여기 아침..."
"오...아침도 했어...기특한 놈...네가 하룻밤 사이에 많이 성숙했구나.."
여왕님은 사자머리를 하고 식탁에 앉았다.
물 한잔을 먼저 마시고,
숟가락을 된장찌개에 넣어
한 손으로 숟가락을 받치고 맛을 보았다.
"오...굿...네가 한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지를 냄비뚜껑으로 가렸다.
"나 원래 아침 안 먹는데, 지금은 먹고 싶다."
여왕님은 맛있게 먹어 주었다.
"우리집에서 첫날밤을 보내서 영광입니다."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어제 일은 잊어라..."
"싫은데..."
"싫음 말든가..."
여왕님은 8시쯤 내 아파트를 떠났다.
나는 지하 주차장까지 배웅하고,
다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전화기가 울렸다.
세번만에 끊겼다.
외국 번호였다.
나는 일어나 가방을 뒤졌다.
지은이의 번호를 찾았다.
지은의 번호를 눌렀다.
"헬로..."
"자기야 나야..."
"어...방금 전화하다가 끊었어...혹시 한번 해 봤는데...일은 잘 해결됐어?"
"응 자기 덕분에 잘 해결돼서 지금 내 방이야..."
"잘됐네...난 여기서 일자리 구해서 일 하고 건강히 있어..."
"그래 다행이다. 어려운건 없어..."
"응...별로 없어...근데 나 부탁이 있어..."
"뭔데...혹시 시간 되면...우리 딸 학교 수업에 한번 가줄 수 있어...? 치과 진료 해야 하나....?"
"치과 아직 휴업중이야...내가 가볼게...어머님 찾아가 여쭈면 되나?"
"응...집에 가정통신문이 왔을 거야...그리고 이건 중요한 얘긴데..."
"뭔데...?"
"나 실은 한국 나오기전에 김미정씨 만났어...그게 목요일인가 그랬어"
"뭐..."
"별다른 얘긴 안했고...그냥 자기랑 무슨 사이냐...얼마나 알고 지내냐...그런거 물어보고 내게 셔류봉투 하나를 줬는데, 내가 보면 안 된다고 했어...토요일 이후에 자기한테 전해 달라고...근데...자기한테 줄 수 없어서...지금 엄마한테 있으니까...가서 받아봐...김미정씨가 아주 중요한 거라고 했어..."
"응 알았어. 고마워. 오늘 중으로 가볼게..."
"그래.. 그럼 우리 딸 잘 부탁해..."
"응.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어머님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지은이의 딸 하영이가 먼저 나와 배꼽인사를 했다.
나는 비즈공예세트 선물박스를 하영이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영이는 선물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과일 상자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뭐 이런걸 사오시고 그러세요. 그냥 오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은이가 연락을 줬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오실 거라고...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그런데..어머님 가정통신문은 어디 있나요?"
"네...잠시만요. 아니 거기 서 계시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 오세요. 차 한잔이라도 하시고 가세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거실에 앉았다.
지은의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가정통신문과 서류봉투를 들고 나왔다.
"이겁니다."
어머니는 내게 서류와 봉투를 건네고, 커피를 끓였다.
내가 가정통신문을 보는 사이 커피잔이 내 앞에 놓였다.
가정통신문에는 아빠 수업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9시까지 학교에 하영이와 출석하면 됐다.
나는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서류 봉투를 뜯었다.
미정이의 편지와 유언장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입에 있던 커피를 쏟을 뻔 했다.
[ 이 편지를 볼 때쯤 나는 이세상 사람이 아닐 거야.
그동안 내게 잘 해줘서 고마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너 뿐이야.
그리고, 놀라지마. 하찬이는 네 아들야. 네가 후견인이 되어주면 좋겠어.
유언장에 내 계좌에 있는 돈을 모두 너에게 상속한다고 했어. 변호사에게 연락해봐.
정말로 고마워. 행복하게 살고. 나중에 봐]
유언장은 영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다.
상속인에 내 이름이 써 있었고, 내 신상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나는 정신이 흐려졌다.
눈앞도 흐려졌다.
지은이 어머니와 하영이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한식당에서 본 하찬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와 닮았었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장하찬'이란 이름을 검색했다.
여러명이 있었다.
11살로 압축했다.
하찬이의 사진이 보였다.
내 얼굴이 안에 있었다.
세상에...어떻게 그럴수가...
나는 변호사 혜인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그렇지 않아도 전화 하려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
"미국에서 장성용하고 첫째 언니가 잡혔어..."
"정말?"
"내일이나 모레쯤 한국으로 들어올거야..."
"잘 됐네...그럼 그 아이들도 같이 들어오나?"
"글쎄...같이 들어올 수도 있고...시설에 맡겨질 수도 있겠지...왜?"
"방금 미정이 내게 남긴 다른 유언장을 전달 받았는데..."
"또 유언장이 있었어?"
"김지은씨를 만나서 대신 전달해 달라고 했었데..."
"김미정씨가 김지은씨랑 서로 알아...?"
"응 만난 적 있어..."
"그래서?"
"유언장에....글쎄..."
"뭐? 빨리 말해. 나 바빠..."
"내가 장성용 아들 장하찬의 생부래..."
"진짜...쇼킹이네...잠깐...그럼 너한텐 굿 뉴스야...너 친자 확인 소송해서...친권을 가져오거나...후견인이 되면...장하찬 앞으로 남겨진 유산을 네가 대신 관리 할 수 있어..."
"그리고 미정이가 미국 은행에 남긴 돈을 내게 상속했어..."
"얼마나 되는 데...?"
"몰라...이백만불이상 이라고 전에 말한적 있어..."
"뭐...? 잠깐만...이게 무슨 일이냐...너 갑자기 벼락부자 됐네..."
"나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어...?"
"야...그거 법률 대리인은 내가 하는 거다...알았어?"
"응...그래 네가 수고해 주면 좋겠다."
"오늘은 내가 바쁘고...내일 직접 만나서 얘기 하자..."
"난 오전중에 약속이 있어. 오후에 봐..."
"그래 오후에 가는 걸로 하고 연락할게..."
혜인이는 바쁜지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저녁이 되면서 방 안이 어두워졌다.
나는 서랍에서 라면 두개를 꺼내고, 물을 얹었다.
스무살에 처음 만난 미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게 인사하던 하찬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충 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내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갈 생각으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미정은 내게 미소만 보여주었다.
나는 미정이를 만질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밥을 먹고 지은이의 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