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9
"이런건 어떠세요? 실크 소재로 아주 고급스러워요. 많이 나가요."
그녀는 빨간색 브라와 팬티를 보여주었다.
실크라서 그런지 너무 번들거렸다.
"너무 원색인데, 은은한 색은 없을까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좀 과감하긴 한데, 세련된 분들은 좋아하세요."
그녀는 메쉬로 된 세트를 보여주었다.
나는 사장님이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하얀 살결 위에 검은 메쉬.
나쁘지 않았다.
"이거 일단 하고 또 다른거 보여주시겠어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김희애하고 비슷해요?"
"유아인하고 사귀는 김희애요?"
그녀가 케이블 방송을 상상하는지, 그렇게 물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이즈 감이 오네요."
"다른 것 더 보여주세요."
"네, 잠시만요."
그녀가 다른 직원을 호출하고, 내가 첫번째 고른 것의 포장을 부탁했다.
"살구색은 없나요?
"아 있어요 고객님. 여기 이거 어떠세요?"
핑크빛 섞인 살구색이었다. 레이스가 얌전했다.
사장님과의 추억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래요, 그거 할게요."
속옷이 생각보다 비쌌다.
하지만, 나를 위한 투자라 생각했다.
살며시 흥분됐다.
나는 건물 내에 있는 도림으로 향했다.
아직 십오분이 남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엽차를 마시고 있었다.
입구쪽에 사장님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하얀 밍크 코트에 검은 스타킹이 살짝 보이는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젊은 여자처럼 커다란 샤넬 백을 맸다.
심하지 않게 웨이브 있는 머리카락은 세련되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과하지 않은 센스가 온 몸에 흘렀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네가 약속보다 일찍 다니는 거 알잖아. 너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사장님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많이 변하진 않았네..."
"화장 안하셔도 예쁘세요..."
"아니야 했어. 기술좀 썼어."
사장님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식사해요...연태 고량주 하실 거죠?"
"그래..."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코스 이름이 이상했다.
세작.
간첩이라는 뜻이 아닌가.
세작이 아닌 나는 가장 비싼 코스요리 세작을 주문했다.
금방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맛있네요."
"맞아 여기 잘해."
"한잔 더 드세요."
나는 고량주를 따랐다.
사장님도 내게 따랐다.
우리는 잔을 부딪치고 한숨에 잔을 비웠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탕수육을 얼른 집어 삼켰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좋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했어?"
"늘 보고싶었어요. 제 마음 잘 아시잖아요."
"아이 귀여워."
사장님은 내 볼을 잡고 흔드셨다.
나는 사장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부끄럽게"
"예뻐서요."
사장님은 나이가 들어도 미모를 잃지 안았다.
김희애처럼 나이들었다.
삼십대 모델같은 몸매를 그대로 간직했다.
나는 사장님과 식사를 하며 연예인과 같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은 센스와 매너까지 완벽한 여자였다.
코스가 다 끝났을 때 우리는 고량주 한병을 비웠다.
테이블엔 디저트가 올라왔다.
"손이 예쁘신거 알죠? 제 마음속에 그 예쁜 손이 항상 있었어요. 절 사랑해 주신 그 예쁜 손."
그날 그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간 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사장님은 속옷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나를 안아줬다.
"너무 놀라지마. 누구나 하는거야. 나는 아파서 운게 아니고 너무 행복해서 운거야."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방은 어두웠고, 천사가 예쁜 손으로 나를 어루만졌다.
나는 천사의 가슴을 물고, 그 안에서 잠들었다.
"예쁘긴, 다 늙어가지고."
"아니에요. 아직도 예쁘세요. 전 아직도 보기만 해도 흥분되요."
"......"
"이거 샀어요. 한번 껴보세요."
사장님은 포장을 풀었다.
까만색 구찌 장갑이 나왔다.
"헉...뭐하러 이런걸 샀어. 이거 비쌀텐데."
장갑은 비쌌다.
"더 좋은거 해 드리고 싶은데...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더 좋은거 사 드릴게요."
"어머, 나 감동 받았어."
사장님은 구찌 장갑을 끼고 손을 돌려가며 여기 저기 살폈다.
"디자인이 참 고급스럽네."
티파니는 쥬얼리샵이었다.
먼지쌓인 금은방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장님은 앞서가는 센스로 디자인 좋은 아이템을 많이 진열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악세사리 노점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잘 되서, 지하철 상가에 매장을 열었다.
그 사업도 잘 되었다.
잠실로 이전해 쥬얼리 샵을 열었다.
온라인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시장에 뛰어들어 상당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사장님은 어린 내게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난 공부도 잘했고, 이뻤고, 운동도 잘했고, 예술적 감각도 좋았는데......남자 복이 없어."
"밑에 맥주 바에 가서 한잔씩만 할래요?"
"그래."
사장님은 구찌를 아직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맥주를 시켜 반잔 쯤 마셨을 때,
나는 아무말 없이 사장님을 뚫어지게 쳐다 봤다.
"왜?"
"예뻐요."
"자꾸 그러면 혼난다."
"오늘 이것도 샀어요. 어릴적에 살구색이 참 예뻤는데..."
사장님은 포장을 뜯어 안을 봤다.
"뭐야 이거..."
"그거 입은 거 보고 싶어요."
"얘가 미쳤나봐. 흉하게..."
"하나 사기 아쉬워서 하나 더 샀어요."
사장님은 검정색 메쉬 속옷 세트를 확인했다.
한숨을 쉬었다.
"너 갑자기 왜그래?"
"갑자기 아니에요. 어릴적 이후로 늘 한번 보고 싶었어요."
사장님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나도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우리는 바를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캐롤이 울렸다.
광고판에서 산타가 웃고 있었다.
나는 사장님 팔에 파고들어 팔짱을 꼈다.
사장님은 아무말 없이 나와 팔짱 낀 채 걸었다.
나는 사장님의 짐들을 내게 옮겼다.
두꺼운 밍크 코트 안에서도 말캉한 것이 느껴졌다.
사장님의 짙은 향수 냄새가 나를 자극했다.
석촌 호수를 반 바퀴쯤 돌았다.
겨울 바람이 불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호텔 로비로 들어왔다.
체크인 했다.
사장님은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객실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었다.
사장님이 따라 들어왔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녀의 짐을 테이블에 올렸다.
그녀는 부츠를 벗느라 현관에 서 있었다.
나는 현관으로 갔다.
따라 들어오던 그녀를 안았다.
펄이 번들거리는 입술위에 내 입술을 밀어붙였다.
"헉..."
가벼운 탄성이 들렸다,
"하아..잠깐...잠깐만."
"......"
"나 씻고 나서...그거 줘봐 입고 나올게..."
나는 살구색 세트를 건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한참을 씼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한참을 씼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캔을 꺼냈다,
창가쪽으로 의자를 옮겨 그 위에 앉았다.
밤 조명들이 아름다웠다.
조명아래로 연인들이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방안까지 들리는 듯 했다.
욕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핑크레이스가 있는 그 살구빛 브레이지어를 했다.
긴 다리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삼십대 몸의 탄력을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그녀는 침대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욕실을 나왔다.
그녀는 이불을 들어 눈만 내 놓고 있었다.
숨어있는 눈이 내것을 향해 초롱초롱 빛났다.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22년전 처럼.
"잘 어울려요. 이십년전보다 더 예뻐요."
나는 이불을 걷었다.
일어서서 그녀의 몸을 조용히 쳐다봤다.
"왜?...그렇게 보지 말고 이리와...안아줘..."
나는 그녀를 안고 다시 키스를 했다.
"아..."
그자리에 나는 그대로 멈췄다.
우리는 험난한 파도를 숨차게 넘었다.
숨을 고르며
그녀의 심장 뛰는 속도가 줄어들길 기다렸다.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머니..."
"그렇게 부르지마..."
"자기야..."
"그게 훨씬 낫다."
"자기야 좋았어?"
"아직 나 안 가라앉았어...조금만 있다가...나좀 안아줘..."
나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귀에 키스하고 속삭였다.
"인제 자기는 내꺼야..."
"응 자기꺼야. 부족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자기야..."
한 삼십분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맥주하나 줄까, 자기야?"
"그래."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따 컵에 부었다.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컵을 받았다.
나도 컵을 찾아 맥주를 따랐다.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맥주 한캔을 또 꺼냈다.
다시 그녀와 하려고 해도 의욕이 살아나지 않았다.
맥주잔에 따라 급히 마셨다.
침대로 올라가 그녀를 눕혔다.
그녀를 쓰다듬었다.
"자기야 내 나이를 생각해야지. 또 해도 될까? 지금도 심장이 이렇게 벌렁거리는데...나 무서워."
나는 대답없이 그냥 쓰다듬기만 했다.
사실 하찬이에 대해 말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그 타이밍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 팔 얼굴 가슴을 오가며 쓰다듬기만 했다.
때론 입술로 몸 위 아래를 간지럽혔다.
"간지러워 자기야."
그녀는 내 등을 때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뿐
멘탈이 육체를 지배한다.
그녀의 몸안에선 삼십대의 사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실은...하찬이 있잖아..."
"내 손자 하찬이. 그앤 왜?"
"자기야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응..."
"난 어릴적부터 자기를 정말 좋아했어. 그동안 스물두살 나이차를 극복할 수 없었는데, 이젠 나이는 문제가 아닌거 같아. 나 자신감이 생겼어."
"고마워."
"오늘부터 난 자기한테 어린 아이가 아니야."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