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
"할머니가 나를 신뢰하고 있어. 수임 계약서에 싸인 했어."
"잘 됐네."
"네 덕분이지 뭐."
"별말씀을."
"근데... 너 바람 났냐? 여자 생겼어? 사실 나 어제 네 아파트에 갔었어...너 없더라...혹시 바람피우는데 방해 될까봐 전화 안하고 그냥 왔다."
"실은 하찬이 하은이하고... 할머니 집에 가서 같이 잤어."
"왜?"
"애들이 여기서 잠들었는데, 옮길 사람이 없어서 도와주러 갔다가. 오늘 또 올텐데 하고 잤지 뭐. 너한텐 그냥 설명하기가 길어서 그렇게 말했어. 거짓말 해서 미안해."
"바람피는 건 아니었구나...알았어? 앞으로 잘해"
바람핀다.
내가 누구와 독점적인 계약관계인지 궁금했다.
뭘 잘하라는 것일까.
혹시 혜인이가 나를 애인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지난번 된장찌개를 끓여준 것이 그 시작점인가.
여자의 마음은 어려운 과목이다.
혜인이는 약속이 있다며 바로 장례식장을 떠났다.
일곱시가 되어 나는 역삼역을 향했다.
일곱시 오십분쯤 나는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나 역삼역 1번 출구야."
"거기 있어. 나갈게."
멀리서 키 큰 여자 한명이 걸어 오고 있었다.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녀가 모델이라 생각했다.
쌍커플 없는 눈, 높은 광대뼈. 그리 높지 않은 코.
모델 한혜진을 닮았다.
힐을 신어 185가 넘어 보였다.
현실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여자와 사랑을 하는 남자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때,
그 모델이 내게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랐다.
"치과선생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저 따라오세요."
시한폭탄이 대신 보낸 분인 듯 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지나치는 건물마다 우리 모습이 비쳤다.
대학생 누나를 따라가는 초등학생 같았다.
한 200미터 정도를 걸었을까,
그녀가 나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이 부드러웠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건물 안은 조용했다.
그녀는 한 철문 앞에서 번호키를 눌렀다.
문이 열렸다.
나는 따라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왔어?"
시한폭탄은 알몸이었다.
"콜라 한잔 마셔..."
알몸은 내게 콜라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나는 원샷했다.
목이 탔다.
"나 한잔 더 줄래?"
"진짜...?"
알몸은 당황했다.
"응. 갈증나"
알몸은 망설이다 내게 또 다른 콜라잔을 가져다 주었다.
다시 원샷했다.
이번엔 가슴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신세계로 빨려들어갔다.
문을 열자 커다란 공연장 같은 곳이 보였다.
촬영용 스튜디오 조명이 여러개 있었다.
군대 군대 커다란 스피커도 있었다.
런웨이를 포함한 무대가 있었다.
시한폭탄이 내게 다가왔다.
여전히 알몸이었다.
"어때?"
"새로운 세계가 이거야? 건전한 새로운 경험."
"잘 왔어. 매우 건전한...난 건전한거 아님 안해...저기 네자리야...네가 앉으면 바로 시작이야."
런웨이 중간쯤 의자 하나가 보였다.
편의점 앞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였다.
"시작 전에 입장료 내야돼."
"입장료? 얼마"
"여기 카드 등록해. 지나면 뭔지 알거야."
나는 시한폭탄의 아이패드에 내 신용카드를 등록했다.
"공평하게 너도 옷 벗어."
나는 옷을 벗었다.
하얀색 의자 등 뒤에 옷을 깔고 앉았다.
"오케이. 레츠 게릿!!!"
그녀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조명이 꺼졌다.
암전.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찢어지는 2비트 전자 음악이 들렸다.
"쿵쾅 쿵쾅 쿵쾅 ...."
반복되는 리듬에 내 심장이 따라 바운스 했다.
내 몸이 박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조명이 켜졌다.
알몸의 시한폭탄이 걷기도 힘들어보이는,
높은 워커힐을 신고 무대로 나왔다.
"No ladies but gentleman....This show is only for you....let me fuck you right now...let's get it.
조명이 빨간 색으로 변하며 흔들렸다.
전자음악의 리듬은 더 빨라졌다.
시한 폭탄은" let me fuck you right now"를 반복하며 야릇한 춤을 추었다.
전자음 비트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 졌다.
그때 빨간 조명이 클럽 조명으로 바뀌었다.
무대 뒤에서 알몸에 워커힐을 신은 모델들이 걸어나왔다.
"let me fuck you right now" 가 전자 비트에 얹혀 반복되었다.
모델들이 얼굴에 붙어있는 핀마이크에 대고 그 가사를 반복했다.
모델들은 여자 아이돌들이 추는 야릇한 춤을 추면서,
음악이 바뀌었다.
발랄한 여름 써핑음악이 흘러나왔다.
신났다.
스크린에 바닷가 풍경이 펼쳐졌다.
모델들은 맥도날드 모자와 워커힐만 신고 런웨이를 걸었다.
바람을 가르는 모델 특유의 워킹에 나는 넋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30온즈 음료수 컵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음료수 컵보다 그녀들의 까만 숲에 눈이 갔다.
그녀들은 30온즈짜리 빅사이즈 컵을 빨대로 마시며 런웨이를 활보했다.
한명이 내 코앞으로 와 아이패드를 내밀었다.
나는 주문 버튼을 눌렀다.
뒤에 따라온 모델이 내게 빅사이즈 컵을 건넸다.
콜라맛보다 약간 진한 카페인 음료 맛이 났다.
나는 음료를 마시며,
모델들이 무대 뒤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조명이 꺼졌다.
30초 암전.
사방이 고요해졌다.
무대 뒤에서,
모델들이 부산하게 옷 갈아 입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2비트 음악이 나왔다.
심장이 비트에 맞춰 뛰었다.
조명이 켜졌다.
모델들은 빨강 노랑 파랑 원색으로만 만든 옷을 입었다.
옷들은 찢어져 있었다.
모두 구멍난 밀집모자를 쓰고 나왔다.
이십여년전 시한폭탄을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입었던 옷과 비슷한 컨셉들의 옷이었다.
모델들이 워킹할 때마다 찢어진 옷들 사이로 헬로키티가 보였다.
한명씩 내 앞에서 애교스러운 포즈와 표정을 보여주고 지나갔다.
다시 조명이 꺼졌다.
란제리 쇼에서 듣던 전자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델들은 다양한 헬로키티를 입고 나왔다.
손에는 요술봉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내 앞을 지날 때 요술봉을 내게 향하며 윙크했다.
다시 조명이 꺼졌다.
여름 서핑 음악이 나오며 모델들은 요술봉 대신 음료수 컵을 다시 들고 나왔다.
나는 또 30온즈를 빅 사이즈를 골라 결재 했다.
음료수를 마셔도,
나는 계속 갈증이 생겼다.
조명이 꺼졌다.
야릇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사이에 여자 신음소리가 들렸다.
2 비트 음악을 BGM으로,
남녀가 몸으로 대화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모델들은 각각 코스튬을 입고 나왔다.
경찰, 간호사, 수녀, 중세 귀부인, 애니 캐릭터 등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무대 뒤를 돌아 기구 하나씩을 들고 나왔다.
수갑, 채찍, 목걸이, 밴디지, 진동기 등이 내 앞을 지나갔다.
붉은색과 파란색 조명이 묘하게 교차하며 바뀌었다.
2비트 음악은 지속되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시한폭탄은 나를 부축해서 그곳을 벗어났다.
나는 알몸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오피스텔로 통하는 긴 통로를 지났다.
커다란 침대에 누웠다.
시한폭탄은 작은 거울로 나를 비추어주었다.
내 동공도 풀려있었다.
몸이 둥둥 떠다녔다.
"너 대신 내가 네 카드정보 입력 다 했거든, 우리 예쁜 예진이 빽 하나만 사줘라."
시한폭탄이 턱으로 한혜진 닮은 모델을 가리켰다.
"얼만데..."
"백화점에서 사면 구백 넘는데, 이 사이트에서는 오백이십이야 부가세 별도."
"메이커는?"
"샤넬"
나는 정신이 흐렸다.
"그래 알았어."
"예진아 이 오빠가 너 샤넬 맥시 사준대..."
"정말요?"
"예진아 너 이 오빠한테 어떻게 해야돼?"
"잘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야 나도 작은거 하나만 사줘."
"뭐?"
"샤넬 미니."
"얼만데?"
"원래 오백 넘는데, 이 싸이트에서는 삼백 부가세 별도."
"와아~ 나 미치겠어."
"싫어?"
"아니...헉...알았어."
시한폭탄은 결재를 마쳤다.
아이패드를 책상에 놓고,
내게 다가 왔다.
나는 둘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키큰 두 여자는 이불 속에서 미동도 안 했다.
시계를 봤다.
6시.
7시에 발인이다.
나는 서둘러 세수 하고 옷을 입었다.
동공이 아직 이상했다.
책상위에 있는 선글라스를 썼다.
현관 문을 열고 나갔다.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에 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의 종교의식이 진행되었다.
영구차가 화장터로 출발했다.
혜인이가 사장님을 딸처럼 모셨다.
나는 동생분과 함께 차를 타고 화장터로 갔다.
큰 울음이나 소란 없이 화장이 마무리 되었다.
도자기 세개를 납골당에 모셨다.
또 다시 종교의식을 행하고,
참석자들은 흩어졌다.
나는 아버지, 삼촌, 사장님, 동생분에게 인사하고 택시를 탔다.
집에 돌아와,
12시간동안 잠을 잤다.
새벽 두시.
잠에서 깨자마자,
내 몸이 시한폭탄과 예진이를 찾았다.
전화 했다.
"여보세요."
"나 지금 너 보고싶은데..."
"지랄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어."
"나 보고 싶어서?"
"병신...맘대로 생각해, 나 이제 이 전화번호 없앨거야."
"왜?"
"자세한 건 알거 없고, 그리고 오피스텔도 낼 방 뺄거야."
"갑자기?"
"갑자기고 지랄이고, 그런줄 알고 연락하지마...내가 새로 연락처 생기면 알려줄게."
"예진인?"
"옆에 있어...바꿔줘?"
"응."
"오빠~보고 싶어요. 근데 언니 말대로 하시고요. 꼭 다시 봐요 우리. 저 오빠 많이 많이 기다릴 거에요. 우리 꼭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