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6
"고객님..."
"고객님..."
다리가 예쁜 그 승무원이 다시 찾았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저희 비행기가 엘에이에 곧 도착합니다. 도착하면 고객님을 위해 엠뷸런스를 대기 시킬까 하는데...이건 기장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전 지금 괜찮습니다."
나는 미국의 의료비가 무서웠다.
엠뷸런스를 대기시켰다간 수천만원에서 억대의 돈이 나갈 수 있었다.
"그럼 구급차는 대기 시키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신 제일 먼저 나가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승무뭔이 사라지고,
잠시후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잠시후 엘에이에 도착 합니다. 현지시간 새벽 3시 50분입니다. 현재 기온은 섭씨 12도입니다. 가벼운 자켓을 입으시길 권합니다. 아울러, 본 항공기에 응급환자가 탑승하고 있습니다. 환자는 지금 안정적인 상태를 회복했습니다. 그 환자분이 먼저 비행기에서 내릴수 있도록 자리에서 잠시 대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응급환자를 구조해 주신 우리의 영웅 닥터 윌리엄 제이 슐츠께 감사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뒤쪽 이코노미석에서 큰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엘에이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저는 기장 ㅇㅇㅇ이었습니다.
비행기가 멈추었다.
승무원이 다가와 안내했다.
혜인과 나는 승무원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비지니스 제일 앞쪽에 앉아 있는 Bill이 보였다.
나는 승무원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그에게 갔다.
"Thanks a lot, Doctor Schulz."
"No problem. Good luck."
혜인이도 그놈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그놈은 혜인이를 안고 볼에 키스했다.
성은 독일인인데...
혜인이에게 비쥬를 빙자해 볼을 부비대다니.
음흉한 놈.
우리는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비행기를 내렸다.
그리고 비행기를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바로 입국 심사장으로 갔다.
줄이 길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Job?"
"Dentist..."
"Any drug or cash to declare?"
"No."
의외로 쉽게 통과 했다.
바쁜 날이라 그런 듯 했다.
뒤에 있던 혜인이도 비슷한 질문을 받고 바로 통과 했다.
공항은 새벽에도 사람으로 북적였다.
인파를 뚫고
택시를 탔다.
호텔로 향했다.
호텔의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어? 너 여기.."
"어..어떻게 여기서...널?"
나는 엘에이에서 그녀를 만나리라 상상도 못했다.
김성령을 닮은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선미..."
고집세 보이는 양미간의 주름.
똑똑해 보이는 예쁜 얼굴.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은 중이병을 앓는 친구들을 통해서였다.
중이병.
그 병이 얼마나 무서우면,
북쪽의 동포들이 남한으로 쳐들어 오질 못 하겠는가.
중이병은 여자 아이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 아이들도 잘 걸렸다.
성별을 가리지 않는 만연병.
다 쓰러져 가는 우리집은 점점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지는 못했다.
대신 그들에게 내 작품을 볼 수 있게 했다.
친구들은 내가 틈틈이 써놓은 야설집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몇작품 안되는 만화집도 인기가 많았다.
작품집이라고 해 봐야 A4복사용지에 직접 펜으로 쓰고 그린 것을,
내가 한땀 한땀 실로 꿰매어 만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책들이었다.
어떤 놈은 내 작품을 보며 자기것을 위로 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나는 그놈이 발사하기 전에,
뒤돌아 보았고,
그놈을 발길로 응징했다.
가을 낙엽이 하나씩 둘씩 떨어질 즈음,
내가 책상위에서 한창 작품활동을 하고 있을때,
그놈들이 단체로 나를 찾아왔다.
베낭을 하나씩 맸다.
그놈들은 이전부터 개인 플레이로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날 처럼 단체로 일을 벌이진 않았다.
나는 부담스러웠다.
우리집이 베이스캠프가 되길 원치 않았다.
그놈들은 내 방에 모여,
각각 자기가 왜 가출을 하는 지 설명했다.
내게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배부른 소리였다.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그놈들은 행선지가 목포임을 내게 알렸다.
나는 말렸다.
목포에 갈 이유도, 가서 할 것도 없어보였다.
그놈들은 행선지 목포에 기차를 타고 갈 것이라 말했다.
굳이 어떻게 갈 건지 내게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놈들은 다시, 그들이 서울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기차를 탈 것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루트를 설명하는 것이 나도 동참하라는 듯 했다.
나는 내 삶이 그대로 좋았다.
가출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다른 역들도 많은데,
굳이 서울역까지 가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구체적인 경로를 내게 알려주는가가 이상했다.
혹시 사고가 나면, 나보고 경찰에 신고하란 뜻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덧붙여 내게 부탁했다.
집에서 연락이 와도 정보를 알려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귀찮았다.
알았다고 했다.
그놈들이 실행에 옮길 지도 의문이었다.
차비나 제대로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은 정말 실행에 옮겼다.
우리집을 나서기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를 갈 것이니,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다시 강조했다.
나는 몇번 말려봤지만,
그놈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그놈들에게 행운을 빌었다.
그놈들은 우리집을 떠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우리집 유선 전화기는 바로 불이 났다.
"우리 현철이가 가출했어. 혹시 못 봤니?"
"네 못 봤는데요."
"우리 동빈이가 집 나간다고 쪽지 쓰고 없어졌다. 너 아는 거 없니?"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여섯집에서 똑같은 전화가 왔다.
나는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난 겨우 중이였다.
곧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놈들이 개구리 소년들처럼 문제라도 생기면,
나는 평생 내 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내가 고자질을 한다면,
그것이 그놈들에 대한 배신일까 아닐까.
많이
고민했다.
중이밖에 안된 헴릿은 결국,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놈들에게 두드려 맞더라도 배신하기로 했다.
처음에 나는 그놈들이 장난 친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들께 당당히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난 궁지에 몰렸다.
그놈들의 가출이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중에 놈들에게 변명할 이유들을 생각했다.
종이에 적었다.
배신할 준비가 끝났다.
전화기를 들었다.
"저...사실은 우리집에 왔다 방금 나갔어요. 버스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목포행 기차를 탄다고 했어요."
나는 일일이 전화를 돌려,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 고맙다."
부모님들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학생부실로 불려갔다.
거기엔 그 미운 여섯놈이 있었다.
무서운 선생님만으로 구성된 학생부실.
거기서 그놈들에겐 반성의 태도가 안보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장난치고 있었다.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밀고자로서,
가능하면 그들의 눈을 피하려 했다.
사회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너희들 경위서 쓰라고 했는데, 다 썼어?"
"아니요..."
"얼른 써 한시간 내로..."
사회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학생부실을 나왔다.
선생님의 손이 부드러웠다.
선생님은 진주가 붙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부위가 깨끗하게 봉긋했다.
까만 치마 아래에는 커피색 스타킹이 매끈한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안았다.
나는 선생님의 가슴 향기를 맡으며 선생님의 살짝 나온 아랫배를 쳐다봤다.
"장하다. 잘했어...큰 사고가 날 뻔 했는데. 덕분에 아이들을 금방 데려왔어. 고마워"
나는 내가 큰 일을 한거 같지는 않았다.
어른들의 일이야 어른들의 일.
내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내게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사회 선생님의 야릇한 향기였다.
내것이 단단해졌다.
그리고 나는
밀고자라는 낙인과 그에 따르는 무서운 보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복도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그 공포의 육인방과 마주쳤다.
한놈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선수를 쳤다.
"야~개새끼들아. 다시는 우리집에 오지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그놈이 내 머리를 잡았다.
나는 니킥정도를 기대하며 처분을 기다렸다.
잠시 고통이 있을 지언정,
관계 회복을 바랐다.
그놈은 내게 헤드락을 걸었다.
"좆나 좋아...좆나 좋아...대우가 달라졌어."
헤드락은 애정의 표현이었다.
나는 얼굴을 들었다.
그놈은 내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야...내 삶은 목포행 이전과 목포행 이후로 나뉘어진다. 이렇게 삶이 편해질 수 없다."
다들 표정이 행복으로 가득해 보였다.
아뿔싸...
나는 당했다.
그놈들에게 이용당했다.
그놈들은 내가 어떻게 행동할 지 알고 있었다.
유식한 말로,
설계당했다.
나는 그들의 가출 경로를 알려주는 중계기였다.
나를 이용한
이런 강아지 같은 놈들.
그놈들은 쓰러져 가는 우리집을 사랑했다.
내 방 책장을 뒤져,
내 작품들을 보고 또 봤다.
겨울이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다.
나는 교회 학생회 중등부 회장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간식과 선물을 마련해
전도라는 명목으로 교회에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그날 교회에선 중고등학생들이 밤을 새워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