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
"너 ...책임감 있게...정말 ...멋지게 살아야 돼...내 첫남자잖아..."
혜인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그 병원에서 그대로 장례식을 하기로 했다.
2일 장.
마음이 바닥까지 말라
더 오래 버틸 힘이 없었다.
대한 변호사 협회에
혜인이의 사망 사실을 알리고,
부고를 부탁했다.
나는 ㅇ마트에 가서 검은 양복과 흰 셔츠, 검은 양말을 샀다.
장례식장
혜인이의 사진 옆에 털썩 앉았다.
눕고 싶었지만,
차마 눕지는 못했다.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고 있었다.
멀리서
여자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검은 정장이 다가왔다.
단아하게 안경을 낀 예쁜 여성이었다.
자세히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얼핏 구혜선을 닮았다.
그녀는
혜인이에게 절을 두번하고
향을 피웠다.
내게 다시 절을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어?...야...너..."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세개의 써클을 했다.
유도부, 합창부, 문예부
세 활동 모두 내게 즐거움을 주었다.
어떤 친구들은 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라고,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했다.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내가 시간 관리를 잘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월이 지나 오월이 왔다.
바람이 따뜻해 졌다.
축제의 계절이 왔다.
세개의 써클에서 축제를 준비해야 하는데,
나는 모두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 했다.
유도부는 낙법, 약속 메치기, 조르기 시연, 호신술 쇼 등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중으로 높이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작이 많았다.
긴장을 풀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선배들은 매일 기합을 심하게 주며 정신 집중을 시켰다.
준비운동만으로 체력이 고갈 되었다.
마음속에 써클 세개를 한꺼번에 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유도부 친한 선배에게 솔직히 털어 놨다.
"써클 세개 하긴 무리에요, 유도부를 그만 해야할 까 봐요..."
"야...운동 열심히 하는 놈이 나가면 어떡해..."
"다 하고 싶은데, 다른 써클 같이 하다 보니 유도부 동기들한테 피해만 주고, 선배님들 뵐 면목도 없고..."
"아 돌아버리겠네...너 탈퇴하려면 선배들한테 빠따 열대씩 맞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난 니가 쭈욱 했으면 좋겠는데...니가 알아서 결정해라...모르겠다."
나는 결국
탈퇴 신고로 선배들에게 열대씩 빠따를 맞았다.
어떤 선배는 풀 파워로,
어떤 선배는 귀찮은 듯 중간 세기로,
어떤 선배는 내가 아플까봐 살살
어찌 되었든
나는 챙피하지 않게 탈퇴했다.
합창부는 합창부장이 시키는 대로
자리를 채우고 노래만 하면 되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화음을 만들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즐거웠다.
합창부는 학교 축제의 꽃이었다.
강당에는 수 많은 여학생들이 모였다.
합창부는 열 두곡 본 합창과 두곡의 앵콜곡을 준비했다.
나는 운이 좋아, 짧은 부분 테너 솔로를 했다.
웅장한 화음이 휘몰아치다 갑자기 정적.
나 홀로 그 정적을 뚫고 솔로를 했다.
내 온 몸에 전기가 휘감겼다.
여기저기 여학생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우리는 큰 실 수 없이, 마지막 곡까지 연주했다.
큰 박수를 받고 준비한 앵콜곡도 연주했다.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마음 속 찡 한 보람이 있었다.
문예부는
이웃에 있는 여고 학생들과 함께 조인트 축제를 준비했다.
전통적으로 문예부는 여고생들과 대부분 활동을 같이 했다.
학교 축제에선
문학의 밤이라 하여,
시를 낭송하고
관객과 함께하는 즉석소설,
소설속 명작면 꽁트
문학토론
등을 준비했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마,
동네 고등학생 문학도들에겐
소소한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학교 내에선
문예부 가입 경쟁률이 제일 높았다.
무엇보다 여학생과 함께 활동한다는 점이 독보적인 매력이었다.
3월
선배들이 신입생을 뽑을 때,
문예부는
압박 면접을 했다.
다그치는 선배들이 무서워
오줌을 지리고 도망가는 신입생이 있을 정도로
문예부 압박 면접은 유명했다.
지금 돌아보면 유치한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그당시는 그게 꽤 무섭게 느껴졌다.
그 압박 면접
그때 나는 은선 누나를 처음 만났다.
두꺼운 안경에 한 덩치 하던 은선 누나는 1년 선배였다.
내 앞에 놈이 면접관 은선 누나와 기싸움을 시작했다.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그거 남자여자 하는 거 아닌가요?"
"뭘 하는데?"
"서로 그러니까 빠구리."
"빠구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그럼 588여자들은 하루에 열번씩 빠구리 하니까 사랑을 열번 씩 하는 거냐? "
"그야 모르지요."
"너 야동 많이 보지?"
"좀 보죠."
"애너벨 청 스토리 알지...10시간동안 251명 갱뱅. 애널벨청은 사랑에 질식했겠네. 숨도 못쉬겠다 새끼야."
"그건..."
"기네스북엔 24시간 919명이래... 그 여잔 사랑에 완전히 기절 했겠다."
"내 얘긴 그게 아니고."
"네가 사랑은 빠구리고 떡치는 거라며."
"전 떡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너...네 얼굴에 똥 묻으면 더러워 안 더러워..."
"더럽죠..당연히..."
"아니야...씻으면 돼... 두세번 비누로 씻으면 깨끗해져..."
"......"
"근데, 니 머릿속에 가득한 똥은 절대 안 깨끗해져...영원히 안바뀌는 거야..."
"......"
"너랑은 이제 볼 일이 없겠다. 일어나서 퇴장!"
그놈은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뒤돌아 도망갔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다음!"
"네"
나는 두꺼운 안경 속의 작은 눈을 쳐다보며 앉았다.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전 사랑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건 예입니다. 단지 예...만약 선배님이 저를 사랑하게 된다면..."
"된다면?..."
나는 내 얼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체육시간 동그란 공만 봐도 저를 떠올릴 겁니다."
"푸핫..."
"......"
"그래서?"
"그리고 점점 그 동그라미가 세상에 많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화장품 뚜껑, 병뚜껑, 동그란 거울, 동그란 쿠션, 동그란 선풍기, 동그란 풍선..."
나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예를 들 때 마다 내 얼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무서운 선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 새끼, 로맨티스트야...그래서?"
"사랑은 그런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하는 대상과 주변의 모든 것을 연결짓습니다."
"왜 그러는데...?"
"그 이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 같습니다."
"그럼 왜 처음에 사랑에 빠지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각각 개인차도 있고, 운명이란 것도 있고..."
"운명적인 사랑을 믿나?"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같이 연구해 보자...합격!"
그렇게 나는 문예부가 되었다.
축제의 마지막 순서로,
문예부는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국어선생님들을 초대하여
독서토론을 했다.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축사가 끝나고 바로 토론에 들어갔다.
우리학교 선배가 발제했다.
"문학작품에서는 다양하게 남녀간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ㅇㅇㅇ교수님이 음란문서 제조죄로 구속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소설가 한 분은 여고생과 30대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무엇이 외설이며 음란물이고, 무엇이 예술이며 고전이 될 수 있는지 토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침을 꿀떡 삼켰다.
고요한 공기가 천천이 흘러갔다.
관객중 한 용감한 여고생이 발표했다.
"이 사회뿐 아니라 문학작품의 세계도 남성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사실 여자의 누드나 나체를 묘사하는 글에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남성분들은 여자의 몸을 묘사하는 단어 하나에도 반응합니다. 남성중심의 문학계가 이를 반영하여 여자의 신체묘사를 과하게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이없게도 전형적인 논점이탈이었다.
예술과 외설을 말 하는데, 남성중심의 문학이라니.
국어선생님이 거들었다.
"학생이 좋은 얘기 해 주었어요.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균형된 시각을 갖는게 중요해요."
국어선생이 맞나 싶었다.
논점 이탈의 개념조차 없었다.
"이야기가 지루해 질 거 같은데, 제가 직설적으로 얘기 하겠습니다."
그때, 은선누나가 치고 나왔다.
"결론적으로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없습니다."
교장선생님이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젖을 물었다.]
누나가 칠판에 문장을 썼다.
"무슨 느낌이 드세요?"
이어서 문장 앞에 단어를 썼다.
[아기가 내 젖을 물었다.]
"외설인가요?"
학생들이 손을 입에 모으고,
"아니요~~"
합창을 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스무살 먹은 아기가 내 젖을 물었다.]
"외설인가요?"
모두 조용했다.
"이건 어때요?"
[교장선생님이 내 젖을 물었다.]
"아..저 학생..."
아까 논점이탈을 칭찬한 국어선생이 안절 부절 못했다.
교장선생님이 괜찮다며 손짓 했다.
"불편하시면, 이렇게 바꿔볼게요."
[내 자지를 물었다.]
"아니...저 학생...그건"
다시 그 국어선생이 은선누나를 말렸다.
"선생님! 학생들이 어떤생각을 하는지 서로 나누는 자리에요. 놔두세요."
교장선생님이 국어선생에게 짜증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