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
"그러니까 그 문서에 따르면, 전 공항에서 갇혀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추방 당한거네요."
"그렇지."
"말도 안 돼요. 전 그 호텔에도 갔고, 은행에도 갔고, 변호사 사무실에도 갔어요. 엘에이 어셔가에 있어요. 아무리 내가 정신이 없어도 그렇게 여러곳에 간 것을 환상으로 봐요? 교도소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런걸 다 환상으로 볼 수 있나요?"
"글쎄...나도 네가 하는 이야길 믿고 싶지만, 여기 공식적인 문서로 쓰여 있으니 그게 문제네. 무슨 음모가 있는 건지 아니면 네가 환상을 본건지."
"그게 가능해요?"
"검사 말이 마약을 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환상을 보는 경우가 있다네."
"검사가 신경정신과 의사도 아니잖아요."
"자문 받았다고 했어."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겪은 일 들이 모두 부정되는 상황이 화가 났다.
"누나 솔직히 나는 지금 화가 조금 나요...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누나가 안 믿을 만 해요. 제가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잖아요."
"그래. 나도 개인적으로 너의 진실성을 믿어. 누가 뭐래도 믿어. 그런데, 지금은 그런 진실성보다 네가 처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는게 중요해. 일단 누나말 듣고 다음 단계에 상의 하자. 일단 검사가 하는 말을 인정해. 너는 공항에서 뺀찌먹고 한국에 다시 온거야. 그리고 속아서 마약을 한거야. 그리고 검찰의 마약수사에 협조해서 불기소 받아내는 거야. 일단 여기까지는 누나 말 듣자. 어때."
사실 나는 누나의 말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현실을 직시했다.
치기어린 반항이 절대로 도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검찰이 칼자루를 가진 이곳 대검찰청이었다.
"그럼 저는 불구속으로 가는 건가요?"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럼 언제 집에 가요?"
"잠까만, 내가 의사를 전달하고 물어볼게."
누나는 검사실에 들어갔다.
또 한참이 걸렸다.
나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만약 누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엄청난 일들을
단지 꿈을 꾼 것이다.
깨어나지도 않고 그렇게 꿈을 꿀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내가 대한민국에 있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나는 내 뺨을 꼬집어 보았다.
분명 아팠다.
시한폭탄이 내게 한 마지막 말도 떠올랐다.
[이건 만약인데...혹시 안 좋은 일 생기면, 넌 나도 모르는 거고 예진이도 모르는 거다. 알았어?]
시한폭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마약이라는 단어를 사이에 넣으니 문맥이 이해되었다.
나는 그들을 모른척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나는 그 약속을 어기고
이미 예진이를 안다고 했다.
다음에 일어날 일이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누나가 검사실에서 나왔다.
"야 가자?"
"어디에요?"
"집에 가야지."
"정말요?"
"아까 말했잖아...조건부야...일단 빨리 가자. 여기 오래 있으면 민폐야."
"네."
나는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리 만큼 바빴다.
내가 목례로 인사를 했지만,
아무도 내게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누나의 뒤를 따라 대검찰청 건물을 빠져 나왔다.
"우리 기분도 꾸리꾸리한데, 생맥주나 한잔 할까?"
"누나 드시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우리는 한참을 걸어 서초역까지 내려왔다.
허름한 맥주집이 보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누나 안주는 뭐 시킬까요?"
"배고프냐?"
"그냥 저냥 한데요."
"우리 돈가스하고, 소세지 야채 볶음 어때?"
"그래요...그럼"
"저기요..."
"네 주문하시겠어요?"
하얀 셔츠와 검은색 레깅스를 입은 아르바이트 학생이 걸어왔다.
와이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운동화의 굽이 너무 높아 기우뚱 기우뚱 했다.
한걸음 움직일때 마다 엉덩이와 다리가 터질 듯이 출렁거렸다.
"네 여기 돈가스하고 쏘야 안주하고 오백 두잔 주세요."
아르바이트 학생은
뒤로 돌아 갔다.
나는 그 터질듯한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
누나가 내 머리를 때렸다.
"아무리 그래도...야 미성년자 같은데...너무 뚫어지게 보지 마라."
나는 누나에게 들킨게
멋적어 머리를 긁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금방 오백 두잔을 가져다 주었다.
"이건 서비스 안주입니다."
그 아이는 오백 두잔과 함께 뻥튀기를 내려 놓았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뻥튀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누나도 뻥튀기를 들었다.
"야 이거 뻥튀기 기계 본적 있냐?"
"그럼요 저 어릴때 뻥튀기 아저씨가 동네에 찾아오곤 했어요."
"그래?"
"뻥이요 하면서 쇠꼬챙이로 시커먼 대포같이 생긴거에서 뚜겅을 열면, 뻥 소리 나면서
튀겨진게 망 안으로 쏟아져 나왔죠...그거 앞에서 구경하면서 몇개씩 얻어먹기도 했어요."
"맞아. 나도 어릴때 많이 봤어. 이거 은근히 맛있네."
"그러네요."
"자 인제, 우리 후배의 건강하고 즐거운 한국생활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는 오백잔을 원샷했다.
목 주변으로 따가운 느낌이 전해졌다.
차가운 맥주가 가슴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저기요 여기 오백 두잔이요."
"야 우리 차라리 피쳐로 마시자 매번 달라고 하는 것도 귀찮고 미안하고..."
"얼마나...한 오천?"
아르바이트 학생이 그 사이에 벌써 오백 두잔을 가져왔다.
"저기 이거는 두고 따로 오천짜리 피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아이는 다시 터질듯한 엉덩이를 흔들며 돌아갔다.
"야...좀 몰래 몰래 보든지...너무 티나게 보니까 내가 민망하다."
누나가 이번엔 내 머리를 때리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긁지 않았다.
"남자들은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나봐. 조절이 잘 안돼지?"
"뭐 좀 그렇죠?"
"신은 왜 남자들에게 그런 하자를 선사하셨을까?"
"여자도 잘생긴 남자 쳐다보지 않나요?"
"야 그래도 그정도는 아니다...너 안구가 눈구멍 밖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어...아까 재 여기 처음 왓을때."
"죄송해요. 주의 할 게요."
"아니 너보고 그러라는게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야...마셔."
누나와 난 두번째 오백 원샷을 했다.
오백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작은 잔을 채웠다.
누나에게 채운 잔을 밀어 주었다.
내 잔도 채웠다.
잔을 채우자 마자
돈가스와 쏘세지 야채 볶음이 테이블에 놓였다.
내 눈이 부담스러웠는지
이번엔 그 타이즈를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오지 않았다.
평범한 청바지에 목티를 입은 여학생이 왔다.
그는 평범한 런닝화를 신고 있어서 몸을 기우뚱거리지도 않았다.
안경낀 모습이 가수 이선희를 닮았다.
노래를 잘 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평범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야...너 또 들이대냐?"
누나가 딴지를 걸어왔다.
내가 들이대긴 어디에 들이댄단 말인가.
"네?"
"너 새로운 알바생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는게 어휴...너 속으로 이상한 상상했지."
"그런거 안했어요."
"거짓말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제가 드리댔다고 치고, 또 다른 남자가 들이대는 모습 본거 있어요?"
"많지. 셀 수 없이 많지. 나 좋다고 그렇게 좇아 다니던 놈도 더 어리고 예쁜 애가 앞에 있으니까 헤벌레 해 가지고 침을 뚝뚝 흘리더라...내가 그런꼴 보기 싫어서 발로 찬 놈이 천명도 넘어."
우리는 또 맥주 잔을 채워 원샷했다.
"누나 이거 맛있어요."
나는 돈가스를 잘라 누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래도 너 밖에 없어. 나쁜 놈이 시키들."
누나가 사용하는 단어로 미루어 볼때,
누나는 벌써 취기가 오르고 있엇다.
어제 소주를 마실땐
두주 불사하는 여장군이더니
오늘 맥주 앞에선
약하디 약한 여자가 되었다.
점점 누나는 나와 대작하지 못하고
나 혼자 원샷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국 다 마시지 못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술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택시가 멈춰섰다.
택시에서 손님이 내리자 마자,
누나를 택시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택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누나 집이 어딘지 생각이 안났다.
나는 일단 택시 안에 같이 탔다.
"누나 집이 어디에요?"
"나? 집?"
"네 어디 살아요. 지금 우리 택시 탔잖아요. 누나 내려드리고 나도 집으로 갈게요."
"나 집 없어 임마."
"아아아 장난하지 말고 누나. 나도 지금 피곤해요."
"진짜 없어. 오늘밤 니네집에서 자자. 그래도 되지?"
택시기사가 행선지를 알려달라며 재촉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말했다.
"여자분이 술이 많이 되셨나봐요."
"아 예."
"손님 제가 오지랖부리는거 같아 미안한데....손님 남자는 세끝을 조심 해야합니다. 아시죠? 손끝 혀끝 그리고 나머지 하나...요즘 세상이 호락호락 하지 않아요..."
"야...저새끼 뭐라는거야. 뭘 조심해? 들으니까 기분 나쁘네...야 이 씨발 새끼야 니가 뭔데 우리 동생한테 뭘 조심해라 마라해...내가 꽃뱀 같아 보이냐? 내가 그렇게 이쁘냐?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새끼야."
택시가 멈춰섰다.
"손님 정말 죄송한데요. 내려주세요. 전 모시고 못가겠습니다."
우린 택시에서 쫓겨났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누나를 앉히고,
나는 부지런히 택시를 잡았다.
택시는 호락호락 세워주지 않았다.
아마도 쓰러진 누나를 보고
착한 승객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시커먼 모범 택시가 지나갔다.
"택시~"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모범택시는 멈췄다.
나는 우리 동네 이름을 말했다.
택시기사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누나에게 가서 부축을 하고 택시로 향했다.
택시기사의
"미안합니다."
하는 소리가 멀러져 갔다.
택시는 우리를 태우지 않고 떠났다.
"뭐냐 저 택시...야 차번호 사진 찍어 신고해...이거 승차 거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