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88
또한 여자를 만나고 관계를 깊게 가지는 과정중에
나는 여자로서도 그렇고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과 대화하고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내게 여자를 향한 열정이 식어버리면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끔은 정액을 배출하자 마자
현자타임이 찾아왔을때
여자의 몸을 바라보면
나도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목석처럼 그대로 누워있는 여자는 내게 더이상 여자가 아니다.
단순한 단백질과 지질의 화합체일뿐 내 손만도 못한 것이다.
나는 여자가 나로 인해 기쁨과 환희를 느낄때
내 즐거움도 배가 된다.
여자가 숨막히는 오르가즘으로 내게 매달릴때
나는 비로소 여자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 정복감이 내 섹스의 본질이다.
여자 애무하는 법을 연구하는 것도
여자를 위해 스쿼트를 하며 내 다리 근육을 키우는 것도
여자를 정복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나를 위해 어려운 일들을 감내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또 나를 보고 웃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혀 놀림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받아봐. 이 밤에 누굴까?"
"글쎄요. 누가 이 새벽에..."
나는 전화를 확인했다.
옆치과 원장이었다.
뜨아...
새벽 1시에 내게 전화라니...
옆에 옆 건물 치과 원장님은 유쾌한 분이다.
성향도 나와 비슷해서 만나면 편안함을 느낄수 있었다.
다만, 원장님은 너무 술을 사랑했다.
식사 시작 전 구강소독용 스트레이트 석잔.
원장님의 트레이드 마크다.
원장님은 늘 빨간색 소주를 마셨다.
나는 독한 술이 달갑진 않지만
그 원장님과 마시는 술은 달게 느꼈다.
아무리 나와 막역한 사이라지만
새벽 한시에 전화라니....
나는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군데? 왜 안받아?"
"옆 치과 원장이에요. 너무 늦게 전화해서 받을까 말까 고민했어요."
"그분이 아주 급한 일로 전화했을 수 있잖아."
"급해봐야 술먹자는 일이겠죠."
"그래도 전화 한번 해봐."
나는 마음 착한 동생분을 실마시키지 않으려고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 전화 하셨어요?"
"어어...했어..내가 미안해 밤늦게...."
그의 혀는 이미 알콜을 머금고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된거야. 치과간판에 맨날 불은 들어오느데...도대체 어디 있는지 여러번 전화를 할까 말까 하다가...아 오늘 강남에서 한잔 하고 전화하는거야...어디 다친데는 없어? 몸은 성하게 있는거야? ...오늘따라 보고 싶네...우리 그래도 제법 재미있게 지냈잖아? 뭐냐 그렇게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이제 치과는 안해?...뭐...나도 위로 받고 싶은 일이 있고...원장얼굴 한번 보고 싶네...근데.. 지금 보는 건 무리겠지? 미안해..."
"원장님 내일 진료 안 하세요?"
"알잖아 내가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나 끄떡 없어...나 원장얼굴 보고 딱 한병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내게 새벽한시에 전화를 해서 술마시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단연코 나는 그런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는다.
혹시 여자라면 모를까.
예쁜 여자는 새벽술 대 환영이다.
하지만 이 새벽에 남자가 나를 불러 낸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이 안 되었다.
"지금 어디신데요?"
"지금 여기가 강남역 사거리."
"그럼 딱 한잔만 하고 헤어지는 거에요."
"고마워. 자기밖에 없어..."
나는 빨리 전화를 끊었다.
그가 전화기에 뽀뽀하는 소릴 낼 것 같아 두려웠다.
"먼저 주무세요. 저는 그냥 장례식장으로 바로 갈게요."
"알았어 조심해서 가."
나는 옷을 차려 입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새벽 한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는
공포영화의 BGM같았다.
조용히 삐그덕 거리고 덜컹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갔다.
거리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강남역 사거리로 갔다.
몸이 무거웠다.
택시 안에서도 여러번 후회했다.
괜히 나온다고 했나?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나중에 봐도 될텐데...
택시는 금방 강남사거리에 도착했다.
나는 택시비를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강남사거리는 아직 불야성이었다.
헐벗은 여자들이 미끈한 다리를 들어내고
거리를 활보했다.
스타킹 페티쉬가 있는 나는
걸을때마다 반짝이는 스타킹 장식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그 여자들의 다리에서
눈을 떼고
옆치과 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세요?"
"어? 벌써 왔어? 나 여기 극장앞이야..."
"원장님 강남사거리에 극장이 한두개에요? 극장 이름이 뭐에요?"
"잠깐만....그러니까 메가네 메가...메가박스 강남 지하철 9번출구..."
"네 알았어요. 내가 그쪽으로 갈테니까 거기 그대로 계세요."
나는 대각선 방향에서 택시를 내렸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9번 출구로 서둘러 걸었다.
옆치과 원장의 혀가 많이 꼬여
혹시나 무슨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강남역 9번출구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니
옆 치과 원장이 없었다.
나는 전화를 했다.
"원장님 어디계세요?"
"어 나 여기 편의점에 잠깐 들어왔어...담배좀 사느라고..."
"편의점 이름이 뭐에요?"
"여기가....여기 편의점 이름이 뭐에요?"
그가 직원에게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세븐 일레븐이라고 말하는 여직원 목소리가 들렸다.
"응...여기 세븐 일레븐이네...."
"알았어요.. 제가 안으로 들어갈게요."
아뿔싸 세븐 일레븐이 두개였다.
두개의 세븐일레븐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이쯤 되니 짜증이 밀려왔다.
새벽에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나는 가까운 세븐일레븐에 들어갔다.
거기에 옆 치과 원장이 있엇다.
그가 편의점 출입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벌겋게 취해 있었다.
"어...반가워...어디한번 안아보자."
그는 계산하다 말고 내게 다가와 포옹을 했다.
"손님 이거 계산해 주시겠어요?"
보다못한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을 재촉했다.
그는 또 다시 편의점 카운터로 달려가
지갑을 찾았다.
나는 그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할까봐
마음을 졸였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 바지 앞주머니, 바지 뒷주머니,
어깨에 매고 있는 가방을 돌아가면 두번씩 찾았다.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썩어가고 있었다.
"어허...여기 있네...미안해요."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단말기 카드리더에 갖다 댔다.
소리가 안 났다.
"이상하네?"
아르바이트생 얼굴이 또 썩어 들어갔다.
"카드좀 줘 보시겠어요?"
알바녀는 카드르 손에 들고
수동으로 번호를 입력했다.
삐빅 하는 소리가 났다.
"네 결제 되었습니다. 고객님."
그는 손에 담배를 집어들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뒤돌아 걸어왔다.
나는 문을 열고 먼저 편의점을 나갔다.
뒤따라온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정말 반가워.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좋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우리 이베 소주 한잔 하러 가야지...."
"네..."
편의점 옆 골목에 간단히 술을 마실 수 있는
꼬치집이 보였다.
"저기 가실래요?"
"좋지."
우리는 이층에 있는 꼬치집으로 들어갔다.
꼬치집 안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대부분 이십대 여자들이었다.
나는 꼬치집 선택이 탁월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 오분정도 기다렸다가
구석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뭐 드실래요?"
"간단하게 오뎅탕에 한잔 마시지 뭐"
"네 그러죠."
나는 주문벨을 눌렀다.
예쁘게 화장을 한 알바생이 주문서를 들고 왔다.
"오늘 뭐가 맛있어요?"
나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뱉었다.
"오늘 주방장님이 마음먹고 만든 모듬 안주가 좋습니다."
"그래요 그거 하나주시고, 오뎅탕도 하나 주세요."
"술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소주 한병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가게가 안주는 선불입니다. 모듬에 오데탕 하시면 삼만원 되겠습니다. 결제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카드도 되죠?"
"네 그럼요."
알바생은 휴대용 카드리더를 내밀었다.
나는 리더기에 카드를 갖다 댔다.
삑 소리가 들리고
결제되었습니다 라는 안내 멘트가 기계에서 나왔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네."
알바생이 영수증 출력 버튼을 누르자
종이가 대패 삼겹살철럼 말려 나왔다.
알바생은 내게 영수증을 건네고,
바로 소주와 소주잔 두개 그리고 뻥튀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좋은 시간 되세요."
"네 고맙습니다."
"아니 내가 사려고 했는데 왜 자기가 계산해? 미안하게..."
"아니에요. 전에 원장님이 많이 사 주셨잖아요."
"허허...뭐 그렇기는 하지만...여긴 단가가 세잖아...자기가 손해지..."
옆 치과 원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소주병을 열어 잔에 부었다.
잔 하나를 옆 치과 원장 앞으로 밀었다.
우리는 잔을 서로 부딪치고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뻥튀기 바구니에서
뻥튀기 몇개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자기는 어떻게 치과는 계속 할 거야?"
"네 그래야죠. 뭐 달리 돈 벌 재주도 없어요."
"그렇구나."
"왜요 원장님은 그만 두시게요?"
"마음은 굴뚝이야...예전같이 재미도 없고...이젠 환자들이 무서워."
"왜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지..."
"무슨 일인데요?"
"넘네스."
"또요? 저번에도 한번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어떻게 된 일인데요?"
"7번도 아니고 6번, 36번 발치했는데 그게 넘네스가 왔어...거참 살다살다 별 일이 다 있어..."
"이번에도 보험 안 드셨어요?"
"안들었지...연속으로 넘네스 맞을 확률은 내가 번개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