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96
"그건 안돼요.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누나는 평생 고생만 하다가 이제서야 제대로 일다운 일을 해 보려고 한다고요. 원장님의 병은 안됐지만, 지금 데려가진 말아주세요. 불쌍한 원장님도 평생 성취감을 못 느끼다가 이제야 자기가 최선을 다해 할 일을 찾았다고요. 부디 행복한 상태에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지금 가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나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야. 네가 나와 가면 다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 갈거야. 더 이상 네가 그들의 삶을 걱정할 필요 없어.
"제발...난 안갈거에요...제발 안가요 정말....."
"후회할텐데. 여기 있으면 네가 더 고통스러울텐데...그나마 온전한 모습으로 가는게 좋을텐데....잘 선택해..."
검은옷의 말소리가 공중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안돼...안 갈거야...내버려둬...제발.....안돼...!!!!"
앞이 아득해 졌다.
"뭐야? 너 괜찮아?"
"자기야 괜찮아...정신차려..."
옆 치과 원장이 내 뺨을 내려치고 있었다.
"아야~~ 원장님 아파요..."
옆 치과 원자의 두꺼운 안경에
김 서린 것이 보였다.
"이제 정신이 들어? 무슨일이야?"
"야 너 괜찮냐?"
조수석에 앉은 누나가 뒤로 돌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괜찮아. 내가 잠깐 졸았나봐."
"네가 요새 무리 했나봐...장례식 끝나면 푹 자자."
"응 그럴게."
옆 치과 원장이 그 특유의 착한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야 괜히 전화해서 미안하네...나는 그냥 자기가 좀 보고 싶었을 뿐이고..."
택시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 출입문 앞에 택시가 섰다.
누나가 택시비를 냈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 장례식장으로 내려갔다.
하은이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영정사진 옆에 누워 잠들었다.
우리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 조심했다.
옆 치과 원장이
영정 사진으로 가서
인사하려는 것을 막았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아니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밥은 얻어 먹더라도, 인사는 해야죠."
"정 그러시면... 저분들 깨우지 말고 조용히 다녀오세요. 영정에다만 절하시고요..."
사람좋은 옆 치과 원장은
천천히 영정 앞으로 걸어가서
향을 피우고
큰절을 두번 했다.
그리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하은이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깨지 않았다.
나는 이것 저것 반찬을
테이블에 올리고
국과 밥을 여분으로 더 가져 왔다.
옆 치과 원장은 밥과 국을 떴다.
형광등 불빛 아래로
얼굴이 거무스름 해 보였다.
"원장님 오늘 그냥 휴진하시면 어때요....?"
"괜찮아..."
"어제 꼬박 밤 세우시고...아무래도 무리인거 같아요...그냥 쉬시면서 우리 최후보님 선거를 좀 도와 주시면 어때요? 이거 최후보님이 드리는거에요..."
나는 옆 치과 원장에게 백만원짜리 수표를 건넸다.
"원장님도 아시다시피 법정 선거비용 초과하면 불편해 지는 거 아시죠?"
나는 입술에 지퍼 닫는 제스쳐를 했다.
"알았어. 자기도 이제 본격적으로 선거운동하는 구나...내기 이거 가지고 단 한푼도 나를 위해 쓰지 않을 거야...그니까 이걸로다가 약국가서 피로회복제 사다가 일단 치과에 싹 돌리고....남으면 약수터 가서 배드민턴 회원들에게 돌리고....탁구회원도 돌리고....이거 돈 모자라는 거 아니야?"
나는 백만원짜리 수표를 하나 더 건네 주었다.
"이건 최후보님이 아니라 제가 드리는 거에요. 오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치과에서 주무시지 마시고, 집에서 그냥 쉬세요."
"알았어..."
옆 치과 원장은 금세 밥 한그릇을 비웠다.
나는 그에게 밥 공기를 더 주었다.
나도 밥공기 하나를 비우고 두개째 먹고 있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밥공기는 사이즈가 너무 적다.
누가 주도해서 밥공기를 바꾼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때만 해도 한 세배는 될듯한 밥그릇을 썼다.
사실 우리 양푼이라고 하는 큰 그릇에
이것저것 나물과 김치를 넣고 참기름을 부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지 않는가
그런데, 그에 비해
식당에서 주는 공기밥은 양이 너무 적다.
분명 어떤 멍청한
보건학자나
경제학자나
덜 떨어진 사람이
귀가 얇은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결정권자를 꼬득여서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 누군가 때문에 식당에 갈때마다
번거롭게 밥을 두번 세번 주문한다.
옆 치과 원장도 나도 밥을 두 그릇씩 먹고
국도 깨끗이 비우고
반찬도 깨끗이 비웠다.
밥 먹을때
나는 옆 치과 원장과 참 잘 통하다.
우리는 반찬을 남기지 않는다.
접시에 담긴 떡도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누나도 밥을 다 먹었다.
우리는 할 일이 없었다.
일곱시까지 십오분 정도 남았다.
갑자기 장례식 밖이 시끄러웠다.
삼인방이 장례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밥 먹었냐?"
"아침을 왜 쳐먹어 새끼야...여기서 먹으라며 씨발놈아...당연히 그냥 왔지."
나는 대구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차려 주었다.
그래도 일찍 온 놈들이 기특했다.
중학생때도
삼인방 놈들이 사고는 많이 쳤지만
시간 약속만큼은 철저하게 지켰다.
시간 약속 뿐만 아니라
한번 내 뱉은 말은
철저하게 지켰다.
"어제 술 많이 마셨는데 괜챃아?"
"응. 안괜찮아."
"어떤데?"
"디져버릴거 같아...자고 싶어..."
"그럼 나오지 말지 뭐하러 왔어."
"나도 약속한 내 혀를 뽑아버리고 싶다."
사장놈은 국물만 찔끔 찔금 퍼 마시고 있었다.
"근데 사무실은 언제 내냐?"
"글쎄..."
"신림동에 우리 회사 건물 있다. 이번에 세입자가 나가서 비어 있는데 거기다 사무실 내라..."
"잘 됐네...그러면 좋지..."
"그리고 후원회 만들려면....회장도 뽑고 정관도 만들고 조직도도 만들고 그래야 하는 것 아냐?"
"그러겠지..."
"그 사무실에 후원회 사무실도 만들고 필요한거 밀어넣어라...창고도 있다...."
"건물에 왠 창고도 있어?"
"우리가 제조업을 할려고 하다가...수입업을 하려고 하다가 여성단체가 하도 반대해서 못하고 있다."
"무슨 수입업?"
"토이 스토리..."
"토이 스토리?"
"응...귀여운 키 약 150센티 되는 토이를 수입해서 불우한 남성들에게 판매하는 사업이다."
"아....리얼돌?"
"아는구나..."
"그거 관세청에서 잡히지 않았어?"
"잡혔다."
"손해가 많겠네."
"재판 할 거다."
"법이 어때?"
"개 좆같다. 제대로된 법조항도 없는데, 그냥 압수다."
"저런."
"국내 생산품은 유통되고, 수입품은 관세청에서 압수하고 불평등하다."
"내 생각엔 그런 불평등도 고쳐져야 할 것 같아."
"이번 선거 지나고 천천히 공론화 하자. 너도 알다시피 관악구엔 여자 유권자가 훨씬 많아. 아직 여자들은 아무리 설면해도 리얼돌에 대해 이해 못해. 여자들의 생각은 한결같아. 우선 리얼돌 사용하는 놈들은 변태새끼들이다. 둘째 리얼돌로 욕구를 해결하다보면 결국 실제로 해 보고 싶어진다. 돈 없는 변태새끼들이 욕구를 해결하는 방법은 강간 밖에 없다. 이게 여자들이 가진 로직중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여자의 몸을 인형으로 만들어서 남자가 욕구를 해결하는 자체가 싫다는 거야. 여자의 몸이 왜 남자들 욕구를 푸는 대상이 되냐는 거지."
"아니.. 신이 남자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어쩌라는 거야."
"여자들 생각엔 어떤 남자들은 매너도 좋고, 여자를 존중할 줄 알고, 여자를 기다려 줄 줄 안다는 거지."
"그건 보빨하는 놈들이잖아. 아님 잘생긴 놈들이거나. 여자들에겐 다 필요 없어 딱 두종류의 남자만 필요해. 돈 많거나 잘생기거나."
"뭐 남자도 마찬가지잖아 이쁘거나 돈많거나. 뭐 꼭 편 나눠서 비난할 필욘 없지."
"그러네."
"하여튼...이번 선거에선 이슈로 만들지 말고 일단 국회에 입성한 다음 힘을 키워서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자."
아침부터 사장놈이 진지한게
적응이 안되었다.
그때 정장을 차려입은 하찬이과
동생분이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하찬이는 벌써 엄마 아빠의 장례식
두번을 겪었다.
동생과 할머니의 장례식을 맞는
아들이 안쓰러웠다.
하찬이는 영정 앞으로 걸어갔다.
하은이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일어났다.
동생분이 그들에게 인사했다.
하찬이도 인사했다.
7시가 되어
장례식 사무실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동생분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장례식장 사용료와
부대비용 납부에 대한 이야기 일것이다.
동생분은 그를 따라갔다.
"사무실에 다녀 와야겠어. 비용납부를 해달래."
동생분은 금방 다시 돌아왔다.
장례식장에서 한 분이 나와 추도식 사회를 봤다.
우리는 모두 영정앞에 가서 추도식을 함께 했다.
삼인방도 그 시간 만큼은 진지했다.
추도식이 간단히 끝나고
장례식장 관계자들이
관을 밖으로 옮겼다.
우리는 조용히 관을 따라갔다.
관이 영구차에 들어가고
우리는 영구차 위에 올라탔다.
화장터 까지는 멀지 않았다.
화장터 안에서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1호기와 2호기에서 동시에 화장을 했다.
동생분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오열하지는 않았다.
하찬이 할머니와
하은이는
작은 분골함 안에 담겨 나왔다.
동생분은
분골함을 집 안에 모시기로 했다.
모든게 끝났다.
일단 각자의 갈 길을 갔다.
삼인방은 회사로 출근했고,
옆 치과 원장님은 휴진을 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누나는 선거 컨설팅 회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동생분은 하찬이와 함께
분골함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내가 경고 했는데...아직도 말을 못 알아듣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