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괴성을 지른 포르투나는 이내 포기한 듯 순순히 비밀을 실토했다.
“야설은 케이트수녀님 거라고?”
“...웅.”
“읽기 시작한 건 린다누나가 수녀님한테 소설을 빌리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뒤부터고?”
“맞앙.”
진실을 알게 된 준은 아무 말 없이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아니, 빌려줄 상대가 따로 있지. 린다한테 빌려주면 어쩌자는 거야.’
수녀들이 한창 때의 남학생들처럼 야설을 돌려 본다는 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들도 사람인데 성욕이 있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그래도 린다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었다.
성인식을 치른 지 1년 밖에 되지 않는 순진한 처녀인데다가 멀쩡히 남자친구까지 있는 그녀에게 대체 왜 야설을 빌려준단 말인가.
‘하다못해 수위라도 낮았으면 첫 경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텐데 그것도 아니잖아.’
이번 성교에서 포르투나가 보인 언행들을 생각해보면 그 야설은 절대로 수위가 낮은 야설이 아니었다.
준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자신의 누나에게 못된 것을 가리킨 범인을 찾기 위해 레이더를 한계까지 운용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하고 말았다.
“후후. 레온, 기분 좋아? 여기는? 여기는 어때?”
“읏! 린다누나, 그마안. 거기는. 거기는. 아앙!”
“우, 우와아. 오빠가 저렇게나. 언니 굉장해.”
한창 뜨거운 관계 중인 한 커플을.
“...”
“준! 비밀이다. 내가 말해줬다는 거 비밀이야.”
“그래, 비밀로 하자.”
레온의 명예를 위해서.
다음날, 지평선 너머로 해가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이른 아침.
준과 포르투나는 마을입구 앞에 섰다.
그런 그들의 뒤쪽에는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들과 마을의 전경을 한 차례 눈에 새긴 준과 포르투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널드, 건강해라. 네 초능력이 그러하듯 꺾이지 말고.”
“다시 만났을 때 축 쳐져있다면 엉덩이를 걷어차 줄 거야.”
“흥! 쓸데없는 소리를.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너희나 잘해. 얼 타다가 어이없게 뒤지지나 말고.”
도널드는 마지막까지도 틱틱거렸다.
그것이 무척이나 그다워서 준과 포르투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케이트수녀님은 다시 성기사단으로 복귀하신다고 하셨죠? 힘내세요.”
“응! 아, 아마 높은 확률로 레뭄무니에 있는 성기사단에 배치될 것 같으니까 꼭 다시 만나자. 누나가 밥 사줄 테니까.”
“하하.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성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에 그...다 처리하고 가세요. 야설들이요.”
“에? 에에에에에! 포, 포르투나!”
“후엥! 미안해!”
사과하는 포르투나를 배신당한 주인공마냥 허망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케이트.
곧 준의 시선을 깨닫고 숨김파일 안에 숨겨둔 야동을 들킨 남학생마냥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리곤 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서둘러 교회로 향했다. 벌써 처리하려는 건가? 배치받기 전까지 마음껏 즐기면 될 텐데.
“두목님. 로빈아저씨. 힘 좀 내세요.”
“맞아. 언젠가 겪을 일이었잖아.”
“그렇기는 하다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크흑!”
반쯤 넋이 나간 레너드와 이를 악문 채 잔뜩 충혈된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는 로빈.
준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들반들
사내의 정기를 섭취한 몽마처럼 반짝이는 피부와 더 없이 만족스러워보이는 미소.
고작 하룻밤 만에 순결한 처녀에서 성숙한 여인이 된 린다와 헤니를 보며 준은 짧게 충고했다.
“...린다누나, 헤니. 앞으로는 적당히 좀 해. 그러다 애 잡겠다.”
“호호호. 준도 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후후후. 맞아, 언니랑 내가 오빠를 왜 잡겠어.”
꾸민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시치미를 떼는 두 사람.
틀렸다. 전혀 충고를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준은 또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들 사이에 단단히 붙잡혀 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어이없는 웃음) 그의 얼굴이 하룻밤 만에 반쪽이 됐고, 엉덩이 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괜스레 이쪽의 엉덩이에도 힘이 들어갔다. 음, 만약을 대비해 이따가 포르투나한테 엉덩이 접근금지령을 내리도록 할까?
“...네 선택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 악물고 버텨라.”
“...황위승계에 대한 이야기 맞지? 그렇지?”
준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뒷감당은 생각지도 않고 한꺼번에 연인을 둘이나 들인 우둔한 중생에게 더 이상 해줄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게 제 한계를 좀 알고 욕심을 부릴 것이지.
“해리, 꼭 다시 만나자.”
“비실아,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 알았지? 밥도 좀 챙겨먹구.”
“하하. 알았어. 두 사람도 몸 조심해. 내가 열심히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할 테니까.”
해리는 한결같이 준의 무사와 안녕을 바랬다.
그것이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
감사함을 담아 그와 가볍게 포옹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준은 작별인사를 끝냈다.
이제는 정말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닷!!!”
“오겠습니닷!!!”
“““잘 다녀와!!!”””
그렇게 환생자와 천사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났다.
――――――――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준은 곧바로 공간이동마법을 연거푸 사용했다.
코어가 오버히트 되어 휴식할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산적등장이나 영애구출과도 같은 뻔한 클리셰와 마주치지 않았고, 3일은 온종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레뭄무니를 한나절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써 도착했다고?
“예.”
-이제 막 점심시간이 끝났다만.
그 말에 준은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짧은 시계바늘이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네요. 6시에 출발했으니까 딱 8시간 걸렸네요.”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가늠하자 통신구 너머에서 레너드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반응이건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괜히 정겹게 들렸다.
-뭐, 그건 그거고 나와 케이트, 로빈이 건네준 충고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
“물론이죠.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는 걸요.”
-그래, 너니까 잊어버렸을 거라 걱정하지는 않으마. 그러니 충고대로만 해라. 특히, 얼굴. 절대로 얼굴을 내보이지 마라. 알겠지?
“알겠다니까요. 절대로 남들이 있는 앞에서 후드 안 벗을게요. 됐죠.”
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포르투나를 불러 꼭 조심시키라고, 안 그러면 못된 여자들이 준을 유혹할 거라고 경고했다.
그에 포르투나가 눈에 불을 켜고 기필코 그리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나서야 레너드는 안심하고 통신을 끊었다.
“참나.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히히. 그래도 싫지 않지?”
“응. 귀찮지만 기분은 좋아.”
남의 순수한 걱정은 무척이나 가슴 따뜻한 것이었다.
준은 빙그레 웃으며 온기가 느껴지는 가슴어림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장엄함이 물씬 느껴지는 거대한 성벽. 그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경계탑.
멀리서 봤을 때부터 감탄 또 감탄을 했는데도 여전히 준과 포르투나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괜히 인류의 방패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것들의 거대함과 장엄함에 감탄했다면, 지금은 그것들이 보여주는 목적과 실용성 그리고 어느 흔적에 감탄했다.
“정말이었네. 성벽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는 소리가.”
“이곳의 적은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쳐들어오니까.”
성벽은 보통 외부의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건설된다.
허나, 레뭄무니의 성벽은 달랐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포르투나의 말마따나 레뭄무니의 아니, 인류의 적은 레뭄무니의 안쪽에 위치한 미궁을 통해 들이닥치기 때문이었다.
“구멍이 꽤나 많이 뚫려있네. 그런데도 전혀 허술해 보이지 않아. 오히려 살벌한 걸.”
성벽에는 만화에 나오는 치즈조각처럼 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허나, 눈으로 보기에는 빈틈 한 점 없이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벽에 난 구멍을 안으로 각자의 무기를 밀어 넣은 채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무기들 중에는 거대한 발리스타와 육중한 대포도 있어 안쪽에서 성벽을 보게 되면 적잖이 오싹할 것 같았다.
“대륙의 장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나저나 완공이 되긴 했구나. 만들기 시작할 때만 해도 공격이 너무 거세서 그 꼬장꼬장한 장인들이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앓는 소리를 냈었는데.”
아련한 눈길로 성벽을 바라보는 포르투나.
그녀의 시선을 따라 성벽을 살피자 시멘트 같은 걸로 무언가를 덮은 것 같은 흔적들이 보였다.
왜 저런 흔적들이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포르투나가 추억을 회상하는 것 같아 그냥 그만두었다.
그저 그 흔적들이 적의 공격에 의해 부서진 부분을 덮은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볼 뿐이었다.
“준, 이제 그만 들어가자.”
“더 안 봐도 되겠어?”
“응, 충분히 봤어.”
포르투나가 뺨에 얼굴을 비벼오기 시작했다. 영혼의 끈을 통해 그녀의 울적한 감정이 전해져왔다.
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성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날카로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경계탑의 병사들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성벽을 둘러싼 경계탑은 모든 목적이 안쪽으로 치중된 성벽을 보완하고, 유사시에 높은 시야를 제공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잠시 후, 준은 성문으로 이어진 대기줄에 몸을 맡겼다.
한창 해가 떠있을 때라 그런지 줄은 굉장히 짧았고, 덕분에 준은 금방 성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정지, 신원을 밝혀라.”
한 병사가 준을 멈춰 세웠다.
그 병사는 프리무니마을의 자경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장과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레뭄무니의 병사들은 대부분 모험가출신이라던데. 이 사람도 그런 모양이네.’
이능을 개화한 이능력자가 고작 병사직을 맡고 있었다.
준은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속으로 감탄하며 미리 꺼내둔 신분패를 성흔이 새겨진 왼손으로 건넸다.
“...통과.”
자연스레 성흔을 보게된 병사는 신분패를 빠르게 살피고는 서둘러 준을 통과시켰다.
남들한테 다 받는 입성료도 거두지 않고서.
레뭄무니는 사실상 교단의 본거지나 마찬가지기에 신관에게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졌다.
성흔을 가진 자는 성직자로 취급되기에 준 또한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성직자로서 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책임 없는 쾌락이란 이런 걸 뜻하는 거려나?’
‘주니, 말이 너무 야해.’
준과 포르투나는 키득거리며 병사를 지나쳐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준은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런게 바로 웰컴투 중세랜드지.”
돌로 포장된 도로가 쭉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