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요. 아무튼, 공적인 이야기도 나중으로 미뤄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면서요. 이만 퇴근해 보세요.”
비록 사회경험을 제대로 해보기 전에 죽었지만, 준은 잔업을 좋아하는 사회인은 없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내일 당장 미궁에 들어갈 것도 아니니 굳이 늦게까지 붙잡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후훗. 괜찮아요. 이미 퇴근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예?”
“제 집은 준님의 바로 옆방이에요. 이제 이웃사촌이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능글맞게 웃어 보이는 캐롤.
그녀의 미소에서 사심이 가득 느껴지는 건 단순히 착각일까?
“그러니 준님, 들어가도 될까요?”
“예? 예, 들어오세요.”
더 이상 거절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준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캐롤을 방 안으로 들였다.
캐롤은 마치 자신의 방인 것 마냥 자연스럽게 방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로 가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대충 채워 넣을 건 모두 채워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방이 너무 횅하네요. 방 안을 꾸며줄 장식품이랑 식기세트, 그 밖의 생활용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준님, 내일 저와 함께 쇼핑을”
“여기 다과입니다.”
적당한 이유를 이용한 오피스누나의 혼신의 데이트신청이 절묘한 타이밍에 차단당했다.
그에 오피스누나는 원망어린 눈초리로 그 범인을 쳐다보았지만, 범인은 그 시선을 철저히 무시한 채 자신의 수족인 분홍새(신수의 정령)를 지휘했다.
분홍새는 그녀의 지휘에 따라 준의 아공간을 넘나들며 갖가지 물품들을 꺼내 그것으로 방 안을 꾸몄다.
그렇게 방 안이 어느 정도 채워지자 방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방을 정리하던 새싹이가 준의 어깨로 날아와 앉았다.
그리곤 캐롤을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 냉정한 시선에 캐롤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포르.’
‘응?’
‘만약에 새싹이를 첩으로 들이게 된다면 너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지금 새싹이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군기반장으로서 첩들 간의 서열정리를 아주 잘해줄 것 같았다.
포르투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깍듯이 받들기에 정실자리를 위협하지도 않을 테니, 정말 진지하게 그녀를 첩으로 들일 것을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야겠지.
‘새싹아.’
‘예, 주인님.’
‘그...컵사이즈가 어느 정도 될 것 같니.’
‘속이 알찬 E컵은 될 것 같사옵니다.’
음, 아슬아슬하게 합격!
데뷔
‘마음에 드셨다니 천만 다행이옵니다.’
준의 대답에 만족스레 미소 짓는 새싹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냉정한 눈을 하고 있던 그녀가 갑작스레 미소 짓자 캐롤은 눈을 갸늘게 뜨고서 준을 흘겨보았다.
‘오해를 좀 산 것 같은데.’
그 시선에 준은 난감해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준과 포르투나, 새싹이 사이에 이어진 영혼의 끈만큼 고위의 연결은 아니지만, 일반 소환사와 소환수 사이에도 계약의 끈이라는 연결이자 소통수단이 있다.
길드의 접수원으로서 여러 이능을 접한 캐롤은 당연히 그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준이 그 끈을 통해 은밀히 칭찬을 해서 새싹이가 미소 지은 거라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오해이고, 그런 오해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불필요했기에 당장 풀어야했다.
전담 접수원인 그녀와 사이가 불편해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준 자신이니까.
준은 사고력을 총 동원해 그녀의 오해를 어떻게 풀지 고민했다.
이럴 때는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하는게 상책이나 준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젖가슴 크기가 마음에 들어서 흡족해 했다는 것을 도대체 무슨 낯으로 말하겠는가.
그것도 젖가슴의 크기가 작아 첩후보에서 탈락한 여인한테.
뭐,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새싹이의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미궁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캐롤이 보기에는 어때요?”
“그러고 보니...”
준은 캐롤의 체면과 자신의 양심을 위해 거짓을 입에 담았다.
무슨 변명을 할지 두고 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캐롤이 그제야 주위를 날아다니는 분홍새를 보며 경악한다.
좀 더 효과적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도록 일부로 미궁과 관련해서 변명을 했는데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경악할 일을 이제야 깨닫다니 도대체 얼마나 절박한 거야?
“분열? 분신? 새싹님, 새싹님의 능력은 뭔가요? 부디 알려주시겠어요.”
이내 감정을 가다듬고 새싹이에게 질문하는 캐롤.
새싹이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준에게 말했다.
‘소첩에겐 다른 능력도 있사옵니다만, 저 여인은 타인이니 그 능력은 숨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새싹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분열도 분신도 아닙니다. 제 능력은 하위정령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쩜. 준님! 운까지 이렇게 좋으시면 어떡해요. 정령과 계약을 한 것 만해도 굉장한데 그 정령이 권속소환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복권의 1등 상을 두 번이나 딴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새싹이의 능력이 그렇게나 희귀한 편인가요?”
“그럼요! 얼마나 희귀한데요. 제가 꽤 오랜 시간을 접수원으로서 일해 왔지만 권속소환형의 능력을 가진 소환수는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보지 못했어요. 정령이 그런 류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예 처음보고요.”
“그런가요? 자연계 정령 중에는 비슷한 능력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속성의 힘만을 타고나는 정령계 정령과 다르게 갖가지 우연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연계 정령은 능력이 속성에 국한되지 않았다.
무구를 잘 다루게 해주거나 무구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구의 정령이라든가 생물체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의 정령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상하게 그 능력을 타고나는 정령은 생기지 않더라고요. 분열이나 분신능력을 가진 자연계 정령은 몇 몇 있었지만요. 뭐, 그들 모두 미궁탐험을 시작하고 얼마 뒤 하나같이...”
“자멸했나요?”
“예, 마왕성 안에선 분열과 분신 같은 자기복제형 능력이 가지는 부작용이 배로 커지니까요.”
“캐롤이 권속소환형의 능력에 환호하는 건 그런 부작용이 없기 때문이겠네요.”
분열과 분신 같은 자기복제형 능력은 시전자의 힘까지도 큰 폭으로 복제하기에 굉장히 강력하다.
그러나 자아까지도 분열되고 복제되기에 정신에 이상이 생길 확률이 높고, 분신이 자신이 본체가 되기 위해 반서(反噬)할 확률도 높았다.
그에 반해 권속소환형 능력은 권속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는 대신 권속이 시전자에게 절대복종하고 정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굉장히 안전했다.
혹시라도 반서 한다고 해도 분배된 힘과 지능이 그리 크지 않아 금방 자멸하거나 역소환되었다.
“안 그래도 인원수를 차지하지 않는 소환수가 권속까지 소환한다는데 어떻게 환호하지 않겠어요. 거기다 새싹님은 굳이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는 정령. 이다지도 미궁탐사에 도움이 되는 정령이 또 있을까요. 저는 단언컨대 없다고 봐요.”
미궁탐험엔 강한 힘만큼이나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물자이동, 불침번, 탐색, 요리, 뒷정리 등등 전투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미궁을 탐험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 반경 모여 있을 경우 마치 누군가가 탐험을 방해하듯 미궁의 난이도가 급격히 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물자의 소모 또한 빨라져 파티의 규모는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아공간주머니 같은 물품은 아예 없다시피 했고, 아공간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동료모집에서 소환수를 가진 소환사는 1티어 영입대상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존재가 누군가에게 종속된 소환수는 인원수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소환수가 정령이나 요정처럼 물자를 소모하지 않거나 거의 소모하지 않는 타입일 경우에는 0티어 영입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정령과 요정을 데리고 있고, 이능마저 미궁탐험에 특화된 준은 몇 티어 영입대상일까?
장담컨대, 측정불가능할 것이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라면...
“31층 이상을 탐험하고 있는 파티라도 친히 1층으로 내려와 준님을 모셔가려 할 걸요.”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미궁의 층은 엘리베이터처럼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
재입장 할 때는 교단의 기물을 통해 자신이 마지막으로 탐험하던 층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오직 제 발로 직접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층 하나하나가 작은 공국크기라는 걸 생각해보면 31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준님의 실력은 31층 이상에서도 거뜬히 통용될 정도로 뛰어나고, 이능은 미궁공략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꼭 필요한 것들이에요. 충분히 고난을 감수할 가치가 있어요.”
“그래서 캐롤,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이미 만들어져 있는 파티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준님이 주도하여 새롭게 파티를 짤 것인지 알려주세요. 그걸 알아야 제가 준님을 도울 수 있어요.”
진지한 표정의 캐롤.
그 태도를 보니 그녀가 퇴근도 안 하고 남의 방 안까지 쳐들어온 이유는 방금의 질문을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뭐, 자연스럽게 데이트신청을 하려는 의도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아니, 어쩌면 그 이유가 더 클 수도.’
‘우리 주니, 지금이 그런 생각을 할 때야. 남이 질문을 했으면 빨리빨리 대답을 해줘야지.’
‘넹.’
포르투나의 타박에 준은 입을 열려했다.
허나, 캐롤이 그 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정하기 힘드시겠지만,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주세요. 이제 막 모험가가 된 루키들은 조만간 비슷한 실력의 가진 이들과 파티를 짜 탐험을 시작할 것이고, 연말이라 고향에 내려갔던 모험가들도 며칠 뒤면 복귀해 탐험을 재개할 거예요. 본격적인 탐험이 시작되면 파티에 들어가기고 모집하기도 몇 배는 힘들어져요.”
“걱정마세요, 캐롤. 예전부터 정해놓았으니까요.”
지난 5년 동안, 레너드와 로빈은 틈만 나면 준에게 미궁에 대한 정보를 주입시켰다.
준은 그 정보들을 통해 미궁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방침을 세웠고, 당연히 그 중에는 미궁을 함께 탐험하게 될 동료에 관한 것도 있었다.
“저는 동료를 직접 모집할 거예요.”
미궁을 탐험할 파티의 적정 인원수는 5, 6명. 이미 만들어진 파티는 그 인원수가 이미 다 채워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준은 굳이 그런 파티에 껴 더 높은 난이도의 미궁을 탐험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자리가 남아있다 해도 준은 그 파티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기존의 파티원들은 미궁을 탐험하며 끈끈한 인연을 형성했을 테니 새롭게 스며들기 쉽지 않을 테고, 만약 위험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나중에 합류한 그가 버려질 확률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타츠와 에밀리의 파티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럴 걱정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파티는 인원수가 6명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아쉬워하지 말자. 당초의 계획을 밀고 나가라는 하늘의 뜻일 테니까. 파티의 리더역할을 넘겨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준이 동료를 직접 모집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파티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였다.
레이더를 통한 정보수집, 사고초능력을 통한 정보처리 아공간을 통한 전리품수집과 소모품배분 등의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자신이 파티의 리더가 되는게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만약 파티장이 있는 파티에 들어가 그러한 능력들을 사용하게 된다면 파티장에게 견제를 받을게 뻔했다.
자고로 한 무리에 머리가 두 개 일순 없는 법이니까.
“잘됐네요. 저도 그 편을 추천 드리려고 했거든요. 미궁공략의 최선두를 달리는 랭커파티는 거의 다 처음부터 탐험을 함께한 사람들이니 준님도 시간을 들여서 꼭 손발이 맞는 동료를 모집하세요.”
“예. 그래도 걱정이네요.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고 싶지는 않은데.”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걸 돕기 위해서 제가 있는 거니까요.”
캐롤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핸드백 안에서 수첩과 팬을 꺼내들었다.
“준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을 말해주세요. 제가 최대한 조건에 부합하는 모험가를 찾아 추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준은 자신이 원하는 조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