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땅에 넓적 엎드리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트리치.
준은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며 선선히 그 구걸을 들어주었다.
이대로 일격을 날린다면 녀석은 꼼짝없이 저승행이었다.
그건 딱히 상관없지만, 그 뒤처리 때문에 귀찮아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쿠구궁!
“꺄아악!”
“조심해!”
“마법사! 방벽 강화시켜!”
검에 휘감겨있던 번개폭풍이 중심을 잃고 산산조각났다.
고작 파편이 닿았을 뿐임에도 대련장을 둘러싼 마나방벽은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흑!”
“우냐?”
“그, 그러니까...”
“됐고.”
착!
“힉!”
눈물을 글썽거리는 트리치의 얼굴 앞에 실리엔스를 박아 넣고서 준은 말했다.
“네 검 쩔드라.”
동료리세마라
결투가 끝난 뒤, 중앙광장.
“고놈 때깔 참 곱다.”
신비로운 물결무늬와 룬어가 새겨진 검, 실리엔스를 바라보며 준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벌써 몇 분째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의 만면에 지어진 미소는 지워질 줄을 몰랐다.
“치이∼. 그렇게 좋아?”
“물론이지.”
케이크를 포크에 콕 집어 먹고 있던 포르투나가 셈이 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얼른 검을 놓고 그녀를 달래줬겠지만, 지금만은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그만큼 실리엔스는 훌륭한 무기였다.
[실리엔스]
[등급 : 실버]
[분류 : 검(롱소드)]
[절삭력 : 중상]
[내구력 : 중상]
[오러증폭 : 중상]
[고대제국시절 말기, 찬란했던 인류의 문명이 서서히 저물어갈 무렵 한 장인이 성흔보유자로부터 얻은 특수한 제조기법을 통해 만들어낸 검. 검에 있는 신비로운 물결무늬에서 영감을 얻은 한 마법사가 그 보답으로 실프의 눈물을 사용해 룬어를 새겨 넣어줌으로써 마법검으로 거듭났다.]
[마법 : 바람조종]
[추가기능 : 없음]
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절삭력, 내구력, 오러증폭력이 모두 실버등급아이템의 최고능력치인 중상이었다.
거기에 마법각인 중 가장 선호되는 원소계열, 그 중에서도 활용도가 가장 높은 ‘마법-바람조종’까지 내장되어 있으니 어지간한 골드등급아이템보다도 기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모험가들, 트리치처럼 상인연합의 후원을 받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각종 협박과 대안을 들이밀며 실리엔스를 회수하려 했다.
물론 준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되려 실리엔스를 겨누며 당신들이야 말로 조심하라고 협박에 협박으로 되돌려주었다.
그로인해 그들과 확실하게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 것 같지만, 준은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늦든 빠르든 어차피 적이 될 녀석들이었다. 굳이 관계를 계선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뭐, 적대한다고 해도 딱히 위험이 될 녀석들 같지도 않았다.
마지막에 선보였던 번개폭풍이 어지간히도 무서웠는지 위협목적으로 실리엔스에 가볍게 바람과 전기를 휘감자 녀석들은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이며 걸음아 나살려라 꽁지 빠지게 도망을 쳐버렸다.
“그건 나라도 그럴 거야, 임마. 그 번개폭풍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오싹하다고. 이것 봐, 닭살 돋은 거.”
이것 보라는 듯 오돌토돌하게 닭살이 돋은 팔을 들이미는 타츠.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사내자식의 팔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준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끝에 전기를 튕겼다.
타츠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자신의 팔을 회수했다.
“그보다 친구야, 질문을 좀 해도 되겠냐?”
“갑자기 웬 질문? 결투를 보고 궁금한 점이라도 생겼어?”
“어. 자기소개서에 기재되지 않은 점이 있는 것 같아서.”
타츠의 그 말에 준은 흘깃 주위를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배려를 해준 건가.’
파티가 이미 완성돼있는 타츠가 굳이 준에게 그러한 질문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러한 질문을 입에 담은 건 순전히 준에게 귀찮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차단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겉은 둔감해보이지만 속은 은근히 배려가 깊다니까.’
그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다.
마침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결이 끝난 뒤, 준은 그 뒤처리를 캐롤과 유나에게 맡기고 깨질 듯 불안한 소리를 냈던 실리엔스를 점검하기 위해 피르비욘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준과 트리치의 결투를 참관했던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준의 뒤를 뒤쫓았기 때문이다.
피르비욘과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척 봐도 꼬장꼬장한 노인네였다.
그런 그를 만나러 가는데 시끄러운 꼬리를 달고 간다면 아무리 준을 좋게 보는 그라도 짜증을 낼 것이다.
‘저들이 나를 뒤따르는 건 내게 묻고 싶은게 있어서 일거야. 그러니 타츠의 질문에 대답해준다면 자연히 떨어져 나갈 거야.’
생각을 끝낸 준은 실리엔스를 도원향에 집어넣고 마음껏 질문해보라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것을 무언의 수락으로 받아들인 타츠가 질문을 시작했다.
“트리치의 독을 어떻게 멀쩡하게 버틴 거야? 진짜 조금도 중독된 것 같지 않던데.”
“성장의 비약을 오랫동안 섭취해온 덕분인지, 나 대부분의 저항력이 굉장히 높아.”
그 외에도 리얼라이즈를 통한 육체개조와 억울하게 죽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건강의 가호가 빛을 발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실리엔스에 내장된 마법을 어떻게 그 정도로 끌어낸 거야? 네 오러가 트리치의 오러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게나 차이나는 위력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타츠, 내가 검을 들고 있어서 잊었나 본데, 나 마법사이기도 해.”
오러, 마력, 사이킥. 셋 중 그 어떤 것을 부여해도 아이템은 가동한다(구형의 경우 오직 마력으로만 구동하기도 함).
코어로 인해 특색이 달라졌을 뿐 셋의 뿌리는 마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이 가동이 된다고 해서 위력마저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에 특화된 힘인 사이킥보다, 무언가를 강화하는 힘인 오러보다, 무언가로 변화하는 힘인 마력으로 아이템을 사용했을 때 더 뛰어난 위력이 나온다.
참고로 오러를 통해 아이템을 강화한다고 해도 특수능력의 위력은 마력으로 발동했을 때가 좀 더 우세했다.
“정말 그것뿐이야? 예전에 한 번 오러 코어와 마력 코어를 동시에 개화한 모험가가 아이템을 쓰는 걸 본 적 있지만, 그만한 차이는 보이지 않았어.”
“아이템 구동에 마나 다음으로 중요한게 뭐라고 생각해?”
“그야 물론 상상력과 정신력...아! 사고초능력! 특성!”
“그래. 나는 사고초능력으로 끌어내고픈 위력을 상상하고, 초능력에 달린 특성, 끝없는 정신력을 믿고 정신력을 아낌없이 사용했어. 결정적인 요인은 그것일 거야.”
오러로 무기를 강화하고, 마력으로 마법을 발동하고, 사이킥으로 통제한다.
모두가 놀란 그 위력은 위의 세 가지 행동이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만들어진 결과였다.
“안 그래도 마왕성의 특성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아 좋은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듣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은 능력이었잖아.”
“아이템을 사용할 때만 유용한게 아니야. 이능을 발동할 때도 사고초능력을 함께 발동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위력차이가 커. 세간에선 사고초능력을 사무를 할 때나 쓰이는 시시한 능력이라고 여기지만, 사고초능력은 절대로 그런 시시한 능력이 아니야.”
“답답해하지 마, 임마. 네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러한 세간의 인식도 네 뜻대로 바뀔 테니까.”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일등공신인 사고초능력이 세간에 저평가 되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다.
준은 살짝 열이 오른 속을 달래기 위해 미리 시켜두었던 복숭아주스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컵이 너무 가벼웠다. 딱 한 모금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용물이 사라져있었다.
“...”
“나 아니야! 도화가 다 마셨어!”
“죄, 죄송하옵니다. 너무 맛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에 범인으로 판단되는 포르투나를 지긋이 바라보자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도화를 가리켰다.
거짓말이 아닌지 도화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사과했다.
가만 보면 애도 은근히 식탐이 강하다니까. 오랜 시간 씨앗으로 지내서 그런가?
준은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 굳이 타박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음료수 한 잔 더 주세요.”
“쿠키세트도 하나 추가!”
“아니, 거기서 더 먹으려고?”
준은 기겁하며 두 아내들에게 물었다.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못할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두 아내들은 자기들 몸집(미니미니모드 기준)보다 몇 배나 큰 초코케이크 한 판을 몽땅 먹어치운 뒤였다.
“괜찮아! 더 먹을 수 있어!”
“소첩도 가능하옵니다.”
“그러다 돼지 된다.”
“아닌데. 포르는 살 안 쪄서 안 되는데.”
“소첩도 마찬가지이옵니다.”
“...그래, 알았어. 쿠키세트도 추가해주세요.”
까득!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째선지 이를 갈며 주문메뉴를 기입한 웨이트리스는 인사를 남기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처량해 보이는 이유는 왤까?
준은 한 여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천사님과 신수님을 벌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집게손가락으로 그녀들을 푹푹 찔렀다.
그에 천사님은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고, 신수님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그것을 따라했다.
“친구야, 걔네들이랑 노는 건 좋은데 딱 한 질문에만 더 답해주라.”
“뭐야, 아직도 남았어?”
“그래, 그것도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았지.”
타츠는 그리 말하며 아까 준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치며 그에게 간절하게 무언가를 전했다.
다시 준을 바라보게 된 타츠는 주위의 모험가들이 간절하게 전한 뜻을 대신 말해주었다.
“파티장이 되어서 파티원을 모집한다고 했었지? 파티원은 언제 모집할 거냐?”
“조만간이요.”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
허나 타츠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준이 아니었다.
준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캐롤을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캐롤. 뒤처리는 다 끝났나요?”
“예, 상인연합 측에서 실리엔스는 자기네들 측에서 트리치님께 대여해준 물건이니 돌려달라고 항의를 해왔지만, 책임은 트리치님에게 있으니 그 분께 따지라고 딱 잘라 말하고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