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 듯 떠오른 소감에 준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위험도 상승에 의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레베카는 그런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똑같이 전투를 준비했다.
손에 들고 있던 머스킷을 놓고는(발밑의 어둠이 꿀꺽 삼킴) 양쪽 허벅지에 하나씩 차고 있던 리볼버를 둘 다 뽑아들었다.
두 자루의 리볼버에는 마치 어느 게임의 여레인저의 그것처럼 길쭉한 총검이 달려있었다.
‘판타지세상 아니랄까봐, 저런 무기를 실제로 쓰는 사람도 있구나.’
준이 새삼 이 판타지세상에 감탄하는 사이 레베카가 꿈과 희망이 가득한 두 리볼버를 자신의 가슴 앞에 교차시키며 말했다.
“실전이 아니라서 그런지 대화 몇 번 했다고 흥이 완전히 식이 버리는군.”
“그래서요?”
“이제까지의 전투로 내가 중, 원거리 전투를 어떻게 치르는지 감을 잡았을 테니, 근거리 전투를 어떻게 치르는지만 보여주고 대련을 끝내도록 하지. 찬성하나?”
“저는 괜찮은데요. 레베카는 제가 더 보여줬으면 하는 거 없나요?”
지금 두 사람이 대련을 하는 이유에는 준이 레베카의 실력을 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레베카가 준의 실력을 보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레베카만이 아니라 준 또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보여주어야 했다.
“내가 파티장에게서 확인하고 싶었던 건 상황파악능력과 레이더의 성능. 이 두 가지뿐이었다. 비록 대련은 짧았지만 그 두 가지는 나름대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는 만족한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무척 궁금하군. 파티장 그대가 근접전에서 나와 얼마나 맞설 수 있을지.”
레베카는 그리 말하며 야릇하게 웃어 보였다.
사내의 반발심과 정복욕을 자극하는 굉장히 도발적인 미소였다.
“...아무래도 제가 아직 핏덩이로 보이시나 보네요.”
“그대의 의지와 이능은 인정한다. 허나, 실력이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군.”
“적당히 도발하시는게 좋을 걸요. 나중에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요.”
“후후후. 그렇다면 사내답게 나를 찍어눌러봐라. 만약 그리 할 수 있다면...”
“있다면?”
“그대가 대련이 시작된 뒤에도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던 이 살덩이를 마음껏 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마치 보란 듯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는 레베카.
과연 그녀는 알까? 자신의 행동이 무슨 일을 일으키게 될지. 준이 얼마나 젖가슴에 진심인지.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내가 뭐로 보이나. 나는 긍지 높은 다크엘프. 거짓말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럼...믿고 갑니다.”
무술-오버 클록
스킬-리얼라이즈
준은 대련인 것을 감안해 아껴놓고 있던 기술들을 총동원해 자신을 강화시켰다.
오러가 세 개의 코어를 감싸 안아 그것들의 성능을 한층 강화시켰고, 언젠가부터 머릿속 한편에 따리를 틀고 있던 용이 준의 소망에 따라 그의 몸에 깃들었다.
위요오오오옹!!!
파직! 파지직!!!
세 개의 코어가 만들어내는 마나의 와류에 주변의 공기가 소용돌이친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전기가 강력한 자기장이 되어 주위를 압박했다.
“어? 어어!”
이제까지완 차원이 다른 기세에 레베카의 얼굴이 경악과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고작 젖가슴 하나가지고 이렇게까지 전력을 끌어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뒤늦게 파티장의 전력을 보기 위해 내뱉었던 말들을 후회하는 레베카.
그러나 지금은 후회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웅웅!
애써 정신을 붙잡은 레베카는 그와 마찬가지로 전력을 다해 코어들을 운용했다.
자신은 지고지순한 다크엘프. 지아비가 아닌 외간남자에게 젖가슴을 내줄 수는 없었다.
‘설마 여력을 저만큼이나 남겨두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리 의지와 이능이 뛰어나도 세월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실력을 뛰어넘기 힘든 법이고,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가 급박한 상황의 연속인 근접전이었다.
그렇기에 레베카는 근접전에 들어가면 자신이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전력을 드러낸 어린 용은 세월과 경험조차도 찍어 누를 수 있는 의지와 이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이기기 위해선,
‘빠르게 끝낸다.’
정신을 못 차리도록 빠르게 휘몰아치는게 최선이었다.
스킬-블랙니들
레베카는 준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에 의지를 불어넣었다.
그림자가 그녀의 의지에 따라 어둠의 바늘이 되어 준을 공격했다.
탁!
준은 앞으로 돌진해 바늘을 피해내는 것과 동시에 레베카와의 거리를 좁혔다.
쏜살과도 같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준을 보며 레베카는 곧장 또 다른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블랙도어
레베카의 몸이 발밑의 그림자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준이 반사적으로 돌진을 멈추고 주춤하는 사이, 그의 뒤편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바늘 속에서 레베카가 튀어나와 고양잇과짐승처럼 날렵하게 그의 뒤를 노렸다.
준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뒤를 돌아보며 검을 휘둘렀다.
챙!
한 자루의 검과 두 자루의 총검이 맞부딪혔다.
수는 총검이 더 많았으나 밀려난 것은 총검이었다.
“응?”
그런데 밀려나도 너무 쉽게 밀려났다.
그에 준이 의아해하는 순간,
탕탕!
발밑의 그림자에서 두 개의 총구가 입을 내밀어 하나같은 두 개의 총성을 울렸다.
“대체...분신?”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려 탄알을 피한 준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그림자가 있던 자리에서 레베카가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가속된 사고와 냉정한 정신으로 상황을 파악한 준은 깨달았다.
그녀가 그X자 분신술 비슷한 기술을 썼다는 것을.
“대체 스킬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스킬이란, 사이킥 코어에 등록된 기술을 뜻한다.
한 번 스킬로써 등록이 되면 기술을 사용하는데 들어가는 힘과 정신력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많은 초능력자들이 기술을 스킬로 등록시키려 애쓴다.
허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기술을 스킬로 등록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개사기 스킬인 리얼라이즈가 있는 준조차도 스킬은 겨우 3개 밖에 없겠는가.
그런 것을 레베카는 적어도 6개는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다크엘프라서?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장수족들은 오랜 세월을 살 수 있는 대신에 이능의 성장이 인간에 비해 턱없이 느렸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렇게 많은 스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타고난 재능과 끝없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오직 폭탄제작만으로 연금술을 전문가급까지 올리는 광기와도 같은 끝없는 노력에, 종족에게 주어진 페널티마저 무시하는 눈부신 재능.
‘갖고 싶다.’
소유욕이 불타올랐다. 눈앞의 다크엘프가 가지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음란한 몸뚱이뿐만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광기와도 같은 노력과 빛나는 재능마저도 탐하고 싶었다.
종래에는 사랑에 푹 빠진 어리석은 암컷으로 만들어 몸뚱이와 노력, 재능을 오직 봉사를 위해 쓰게 하고 싶었다.
두근두근
사이킥이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러 코어 속에 잠들어있던 어느 존재의 기운을 일깨웠다.
오싹!
보물을 노리는 용처럼 번들거리는 준의 두 눈.
그를 향해 뛰어들다 그것들에서 원인모를 오싹함을 느낀 레베카는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물리려고 했으나,
챙!
“어딜 가시려고요.”
준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와 검을 휘둘러오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큭! 어떻게!”
“본체를 바로 알아맞혔냐고요? 왠지 모르게 방금 전부터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타인의 전기신호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 레베카는,”
퍽!
“악!”
쐐액!
“능력으로 만들어져서 그런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네요.”
준은 레베카의 복부를 발로 차 뒤로 날려버린 뒤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던 그녀의 분신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평소의 컨디션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 상태가 좋은 거지?’
꽈악꽈악
“후우∼”
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시험 삼아 쥐었다 폈다 해본 주먹에선 어마어마한 거력이 느껴졌고, 들뜨려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내뱉은 숨결엔 미약한 전기가 담겨있었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힘이라면 손쉽게 가능할 것이란 거였다.
눈앞의, 나이 좀 먹었다고 건방지게 구는 다크엘프를 손아귀에 넣는 일이.
“레베카씨,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흐흐흐.”
능글맞게 웃으며 걸어오는 준.
그런 그를 보며 레베카는 직감했다.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자신의 젖가슴은 그의 것이 될 것이란 것을.
――――――
그날 밤.
파직! 파지직!
“으앙♡ 그, 그마안♡ 전기는 반칙 으오옥♡”
“뭐라고? 짐승같이 울부짖지 말고 똑바로 말해 봐.”
건방진 다크엘프는 용의 품에 안겨 암컷이 되었다.
레베카
착
마치 대련을 막 시작했을 때처럼 피르무스를 레베카의 목에 대고서 준은 담담히 읊조렸다.
“다섯 번.”
털썩
사신의 사형선고와도 같은 그 읊조림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레베카의 두 다리가 결국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그, 그대는 괴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