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죠? 뭔가 문제가 발생했나요?”
“귀족캠프에서 파발을 보내왔습니다. 마법병력을 지원해달라고 합니다.”
“...정말요?”
“예!”
“하아∼. 지원해준다고 할 때 괜한 걱정이라며 거절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엘리시아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고 또 어이가 없어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고생이 많다.’
준은 트롤들 때문에 고생하는 용사님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난했다.
‘그러게 그런 놈들 믿지 말라고 했잖아.’
귀족들이 자신들끼리 캠프를 구성한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 할 때부터 준은 언제고 그들에게서 지원요청이 오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귀족들과 귀족들의 수하 중에서 마법사인 자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작자들.’
몬스터가 대량으로 몰려오는 이번 사태에서 마법전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아무리 오러의 경지가 높아도 한꺼번에 처치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에 마법은 경지가 낮아도 제 경지와 비슷한 급의 몬스터를 대량으로 처치할 수 있으니까.
괜히 물량전에서 마법전력이 선호되는게 아니었다.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그런데도 귀족들은 자신들끼리 캠프를 차렸다.
멍청한 모험가와 더러운 상인과 함께 하기 싫고, 오러가 마법보다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참에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강력한 적보다 위험한게 멍청한 아군이었다.
전력이 줄어든다고 해도 이번 기회에 싹 정리해버렸으면 하지만,
“알겠어요. 지원을 가죠.”
인류애가 넘치는 용사님께서 그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용사는 아무나 하는게...’
“준, 준비하세요.”
“...예? 제가 왜요?”
“준도 마법사잖아요.”
...아!
범람
“주니, 드디어 우리도 활약하는 거야?”
“그럴 것 같은데.”
준의 머리 위에서 고양이마냥 몸을 말고서 쿨쿨 자고 있던 포르투나가 크게 하품을 하고는 질문을 해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준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했지만 사실 그는 귀족캠프의 지원요청에 무척 관심이 있었다.
도화와 레베카, 두 아내들이 활약을 하는 동안 그녀들의 남편인 준이 한 것이라곤 용사가 요청하는 몇 가지 잔심부름뿐이었다.
엘리시아 딴에는 나름 꿀보직이라고 앉혀준 것이겠지만, 아내들의 활약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준으로서는 자신의 보직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여인들의 남편으로서 그녀들만큼의 활약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자존심 세우다가 똥만 싸대는 트롤들을 능욕해주고 싶었다.
‘자고로 싫은 놈들 앞에서 활약하는 것만큼 짜릿한 건 없지.’
싫은 놈들이 고전하던 것을 가뿐히 해치우고 난 뒤, 벙찐 얼굴을 한 놈들에게 고작 이것도 못하냐고 한심한 시선을 보낸다?
그 콧대 높고, 특권의식 쩌는 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흐흐흐.
“주니, 웃음이 음흉해.”
“그래서 싫어?”
“아니, 같이 웃자고. 음헹헹.”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포르투나.
나름대로 음흉하게 웃어 보려는 것 같으나 귀엽고 순박해 보이는 얼굴로 아무리 용써 봤자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웃음소리는 또 왜 저래. 사실은 같이 놀아달라고 유혹하려는 거 아니야?
슬쩍슬쩍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겉은 순박해도 속은 나름대로 음흉한 포르투나였다.
“에잇! 에잇! 요망하긴. 어디서 이리 못된 거 배운 거야! 바른대로 말해!”
“으응. 아냐, 포르는 안 요망해. 아잉, 하지 마아∼.”
감히 요망하게군 벌로써 무릎 사이에 가둬놓고 간지럼 태우기 형을 집행했다.
포르투나는 고양이처럼 냥냥펀치를 날리며 싫은 척 앙탈을 부리면서도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뿜뿜 뿜어댔다.
그렇게 그녀와 장난을 치는 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엘리시아가 되돌아왔다.
척 봐도 마법사로 보이는 열댓 명의 모험가들과 함께.
아, 딱 한명은 제외하고.
야만전사에게도 꿀리지 않는 건장한 체격에 강철맨을 떠올리게 하는 새빨간 전신갑옷을 착용한 흑형은 겉으로 봐선 절대로 마법사가 아니었다.
‘사실은 저들 중에서 마법사로서의 경지가 가장 높지만 말이야.’
그 아이러니함의 주인공에게 준은 물었다.
“제임스삼촌도 지원 가려고요? 구역장이시면서 그래도 돼요?”
“잠깐 갔다 오려고. 제수씨들이 너무 활약해서 심심하거든. 겸사겸사 마법사를 무시하는 놈들의 콧대도 꾹 눌러주고.”
흐흐흐.
주위에 있던 마법사들이 같은 마음이라는 듯 일제히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마법사들을 꺼림칙해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흐흐흐.”
“음? 음헹헹.”
다만, 어엿한 마법사인 준은 그 음침함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그보다 포르,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큼큼. 준, 이동할 사람은 여기 있는 전부가 끝이에요. 이대로 귀족캠프로 텔레포트 해주세요.”
“용사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만한 숫자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슈슝!
“...이게 되네, 시벌.”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뀐 배경을 보며 충격을 받은 듯 욕설을 내뱉는 마법사.
이내 한숨을 푹 내쉬어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준을 괴물 보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임스를 비롯한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음. 부담스러우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주실래요.”
준은 해명을 할까하다 말았다.
그가 레이더 밖에 있는 귀족캠프로 단숨에 텔레포트 할 수 있었던 건 미리 귀족캠프 안에 있는 교단 측 막사에 텔레포트용 표식을 새겨놓은 덕분이기에 엄밀히 따지면 준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것을 입에 담지 않은 건 표식을 새겨놓는 행위가 정∼말 기초적인 준비였기 때문이다.
그걸 말해봤자 기만하는 거냐며 욕만 얻어먹을게 뻔했다.
“여러분, 놀라는 것은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서둘러 움직여야 해요.”
막사 안에 대기하고 있던 신관에게 귀족캠프의 상황을 보고받은 엘리시아가 마법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조급함이 엿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마법사 한 명이 의아한 듯 물었다.
“용사님, 상황이 많이 심각해? 귀족놈들한테 마법사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캠프가 무너질 위기에 쳐하지는 않았을 텐데.”
“기사들이 많아서 캠프를 지키는 건 여유가 있다고 해요. 하지만 쌓이고 쌓인 몬스터들이 조금씩 구덩이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어서 서둘러 처리해야 해요.”
그런 거라면 확실히 조급해할만 했다.
사람들이 애써 미궁 안에 캠프를 차린 이유가 뭐겠는가. 지상이 싸움터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몬스터들의 관심이 구덩이 쪽으로 돌려진다?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만은 기필코 막아야 했다.
“하여간 귀족이랑 기사놈들은 제대로 하는게 없다니까.”
“그러게나 말이야. 쓸데없이 콧대만 높아서는. 쯧쯧.”
엘리시아가 길을 안내하듯 막사를 나서고, 마법사들이 툴툴거리며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용사공, 지원을 와줘서 정말 고맙소.”
“용사님, 저희 가문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용사님! 용사님! 제발 한 번만 이쪽을!”
“야! 저리 꺼져!”
“뭐, 너나 꺼져! 네 녀석 어느 가문이야!”
그와 동시에 주위를 에워싸오는 귀족들.
어떻게든 엘리시아의 눈에 들기 위해 말을 걸고 손을 내뻗는다. 몇 몇은 그러다가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참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모두 진정하세요. 그런데 왜 여기에 몰려 계시는 거죠? 한창 전투중이라고 들었는데요.”
“하하하. 용사공이 온다는데 마중을 안 나올 수가 있겠소. 아, 걱정하지 마시오. 몬스터는 우리의 충성스런 기사들이 착실하게 없애고 있으니.”
음음.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중년귀족이 대표로 그리 말하자 주위의 귀족들이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마중을 나올 여유가 있으면 나가서 몬스터나 쓸어버리라고!
“주니, 그냥 몬스터들 잡으러 가면 안 돼? 포르, 여기에 더 있다간 속 터져 죽을 것 같아.”
“요정아가씨가 좋은 말 했네. 저 놈들을 상대하는 건 용사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몬스터들이나 상대하자고.”
“그래그래. 이 꽉 깨물고 우리한테 눈길도 안 주는 걸 보니 여기 있어봤자 스트레스만 받을 게 뻔해.”
“시벌. 얼른 나가서 스트레스나 풀자고. 막내야, 네가 용사님이랑 친하니까 말하고 와라.”
“막내? 저 말하시는 건가요?”
준이 의아해하며 자신을 가리키자 마법사들은 ‘그래 너.’라는 듯 일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는 언제나 고달픈 법.
준은 자신이 왜 막내냐며 따지려고 했으나 마법사들의 굽은 등, 다크서클, 주름 등을 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님.”
“들었어요. 저는 이 사람들을 따끔하게 혼을 낸 후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 계세요.”
오오!
용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마법사들은 곧장 자신만의 방법으로 캠프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느 마녀는 마녀답게 빗자루를 탔고, 나이를 적잖이 드신 마법사는 양탄자를 탔으며, 몇몇은 ‘플라이’마법을 사용하거나 거대화한 사역마를 타고 캠프 밖으로 향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이한 방법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 없이 제임스의 방법이었다.
푸우우!
그는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마력을 분사시켜 공중을 비행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제임스의 전신갑옷은 강철맨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