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재능만 따지만 그녀의 재능은 준의 재능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주위야 준이 얻은 기연을 모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여기서 잠깐, 궁성이 포르투나와 도화에게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어찌 보면 바로 그 너무나 뛰어난 재능 탓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품고 있는 만큼 궁성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행이 그녀를 길러준 조부가 인성교육을 제대로 해놓은 덕분에 지독한 엘리트주의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조부가 자신의 사심(?)을 위해 일부로 손대지 않은 연인을 보는 심미안은 콧대만큼이나 높아지고 말았다.
그 결과 궁성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짝을 찾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조부가 원하던 대로 평생을 순결한 채로 살아가게 되겠지.
그것만은 싫었던 그녀에게 있어 준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아니 용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생을 홀로살고 싶지 않다면 기필코 준이라는 이름의 용을 사냥해야 했다.
천부적인 사냥꾼인 궁성은 그 즉시 준을 사냥할 방법을 찾았고, 뛰어난 눈 덕분에 머지않아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궁성은 차마 시도해볼 수 없었다.
그 방법을 시도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물이 그녀에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차선책을 꺼내들었고, 그 차선책이 바로 준의 정실과 첩실을 꺾어 준에게 자신의 실력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었다.
하나, 대단히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한 명은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치열했던 전쟁에서 쌓은 경험과 손을 떠난 화살 따위에는 눈도 깜짝 안 할 엄청난 행운을 소유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발아를 하지 못한 수천 년 동안 심심풀이로 쌓은 검술실력과 고기방패가 되어줄 하수인을 소환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준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한다면 코어의 출력을 주황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준이야 경험과 깨달음이 부족하다보니 그 점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두 가지가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포르투나와 도화는 사실상 주황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코어의 등급이 비슷하다면 승패는 경험과 상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법.
그 두 가지 모두 두 사람에 비해 뒤떨어지는 궁성이 두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해. 안 그러면 포르가 혼내줄 거야.”
“...예, 알겠어요.”
“대답이 늦사옵니다. 혹시 언니의 말에 불만을...”
“저, 절대로 아니에요! 적당히! 예, 적당히 할게요!”
“푸핫! 푸하하하!”
“아이고! 아이고 내 배!”
포르투나와 도화가 눈을 게슴츠레 뜨자 궁성이 곧장 식겁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까부터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못하던 부성과 도성이 이젠 너무 웃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당히?
이럴 때는 아예 그만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너무 불쌍하잖아.
-맞사옵니다. 저 여인에게 있어 낭군님을 향한 스토킹은 삶의 이유 중 하나일 터인데.
스토킹이 삶의 이유라니.
준은 그건 좀 아니라고 하려고 했으나 그만두었다. ‘적당히, 적당히.’라고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궁성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그래서! 동생이 정치적인 활동에 동참한 이유가 뭔데!”
눈이 마주쳤다.
궁성이 한숨을 내쉬다 말고 비명과도 같은 고음으로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재차 말했다.
“혹시 정치에 관심이 생긴 거냐?”
“그러면 이 스승님이 조금 도와줄 수 있는데. 평생을 방랑하며 살아서 발이 굉장히 넓거든.”
도성이 그리 말하자 부성도 얼른 자신도 산채식구들을 동원해 도와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에 준은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왜? 우리 산채식구들 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래? 사제지간에 그럴 필요 없다.”
“그런게 아니라 저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물론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 민주국가 출신, 현생 평민 출신으로서 계급제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불러오고픈 마음이 있기는 있었다.
하나, 직접 움직일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았다.
직접 움직인다면 분명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텐데, 그럴 시간에 아내들이랑 꽁냥대는게 훨씬 이득이라고 준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번 계획에 동참한 건 정치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다른 목적?”
“하암∼. 그게 뭔데?”
아저씨들답게 주제가 정치에서 멀어지자 부성과 도성은 대화에 급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까드득!
이 가는 소리와 그와 함께 전해져오는 농도 짙은 살기에 급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모두가 긴장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살기의 주인인 준은 말했다.
“잡아 족쳐야 될 새끼들이 있어서요.”
그의 말 속에는 그가 내뿜고 있는 분위기만큼이나 짙은 살기가 베여있었다.
그에 부성과 도성, 궁성은 경악했고, 뒤이어 궁금해 했으며, 마지막으로...
‘웬만한 일은 최대한 웃어넘기는 도령이 이토록 살심을 품다니.’
‘대체 잡아 족쳐야 될 새끼들이 누구고 무슨 짓을 한 거지?’
‘뭐, 누구고 뭘 했든 간에 편히 죽기는 글렀네. 불쌍하게도.’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느꼈다.
천마, 하늘의 악귀라는 별명이 준에게 붙은 이유를 그들은 몸소 알게 될 테니까.
――――――
“함정일게 뻔해! 믿지 마! 있는 놈들의 속이 까맣다는 걸 그리 속고도 몰라!”
“하지만 저들은 교단이야! 귀족놈들과는 틀리다고!”
웅성웅성웅성
어두컴컴한 밀실 안.
어렴풋이 빛을 발하는 촛불을 중심으로 일단의 무리가 양측으로 나뉘어져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다.
그 와중에 본인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촛불 앞에 앉아있는 사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독주를 한 모금 들이키곤 탁자 위에,
탁!
“...”
조금 강하게 내려놓자 소란스러웠던 밀실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진정되자 양측의 대표자가 한 걸음 나와 사내에게 물었다.
“단장.”
“어쩌시겠습니까?”
“...교단이 진심인 것 같던가?”
“그건 뭐...”
“예,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족들이 모인 곳에서 사람은 평등하다고 외칠 리가 없죠.”
“그게 연극일 가능성은?”
“그것도...”
“없습니다. 그게 만약 연기였다면 지금처럼 귀족들이 위험을 느끼고 결집하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만나러 간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교단으로 찾아갈 기세였다.
‘미치겠네, 진짜!’
반대파 대표자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누구는 교단을 믿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겠는가?
자신 또한 교단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번 결정으로 조직의 미래가 결정될 테니까. 뭐든지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조직과 교단의 관계는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건 간에 자신들은 용사를 세뇌하려했고, 계획이 실패해 용사의 손에 동료들이 죽어나가자 미궁을 무너트려 용사를 없애려 했지 않는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용사가 살아 나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사를 없애려 했던 과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좀 두자고. 응?”
“...저들이 바라는게 혁명이 맞다면, 분명 우리의 뜻을 이해해 줄 것이다. 혹시라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목을 바쳐 피의 맹약을 맺도록 하지.”
그 점을 언급했음에도 사내, 빅토르의 의견은 바뀌지 않았다.
되려 자신의 목을 바쳐 혁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그 점을 동경해 그를 따르고 있는 반대파 대표자이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그런 점이 야속했다.
그렇다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반대파 대표자는 서둘러 머리를 굴렸고, 머릿속에 번뜩인 것을 무작정 입 밖으로 꺼냈다.
“...친구비?”
그 날, 새로운 단어가 이 세상에 탄생했다.
옛 인연들
부성과 도성, 궁성이 준에게 분노의 대상이 누구고 그 자가 무엇을 했는지 물으려는 순간 그들에게 배정된 아카데미의 조교들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부성님! 도성님! 궁성님! 곧 있으면 강의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얼른 준비하러 가시죠.”
“벌써? 시간 참 빠르네.”
“그러게. 몇 마디 안 나눈 것 같은데.”
“첫 강의는 어차피 자기소개 밖에 안 하잖아. 그냥 휴강하면 안 될까?”
가장 짬이 많아 보이는 조교가 대표로 강의준비를 위해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하나, 강의보다는 자신들의 궁금증이 더욱 중요했던 세 사람은 그 제안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를 눈치 챈 조교들은 무척 황당해 했지만, 그렇다고 세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준의 앞에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촌, 누나 같은 세 사람이지만, 그들은 엄연히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이라 일컬어지는 10성.
조교와 교수는 물론이고 아카데미의 학장조차도 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저, 저기. 엘리시아님, 아이리스님.”
결국 자신들만으로는 세 사람을 움직일 수 없을 거라 판단한 조교들은 한 때 조교로서 함께 일했던 엘리시아와 아이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달링.”
“자기야, 한 번만 도와줘. 응?”
두 사람은 그들의 간절한 시선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다만, 아직은 10성들과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설마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는지 조교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지금만 시간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서들 할 일 하러 가세요.”
“쩝. 어쩔 수 없나.”
“귀찮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나중에 꼭 시간 비워나. 알았지?”
준의 한 마디에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세 사람이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동그랗던 조교들의 눈이 이젠 아예 눈동자가 빠져나올 듯 한계까지 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