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1/430)

“...그래도 해야지. 아니, 꼭 하고 말 거네. 설령 레온에게 미움 받는다고 해도.”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모험가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서는 자신과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연인의 소망을 위해 각오를 다졌다.

각자의 의지

“그렇군요.”

준은 아서의 의지를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그의 의지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아들의 미래를 제한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비난 받아 마땅했다.

하나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작용이 많은 구체제를 혁파하고 좀 더 나은 신체제를 정착시키려는 것이었기에 응당 박수를 쳐줘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박수를 치며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었다.

오랜 고난과 무시 끝에 되찾은 권력을 가족에게 비난받을 각오까지 해가며 포기한다니.

도대체 얼마나 의지가 강해야 그리 할 수 있을까?

설령 스킬-마인드컨트롤을 사용해 권력욕을 거세한다고 해도 준은 그리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를 긍정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아직 레온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가족 같은 친구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황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황제직이 조만간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상심할까?

행동이 괘씸해서 위로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차마 비웃을 수도 없었다.

‘뭐, 그것도 녀석이 선을 넘는 순간 달라지겠지만.’

안 그래도 레온의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아서에게 비수를 날리는 격이겠지만, 준은 고민 끝에 그에게 물었다.

“평민들이 그들의 대표들을 주축으로 모이고 있다면 귀족들은요? 제 권리를 박탈당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그 욕심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

조용히 침묵하는 아서.

그런 그의 반응으로 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귀족들이 레온을 주축으로 해서 똘똘 뭉치려고 한다는 것을.

‘그만한 대안도 없으니 당연하겠지.’

지금 귀족들은 감히 평등을 외쳐 자신들의 권리를 위협하는 준을 응징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진즉에 벌떼처럼 일어나 준을 응징하라고 난리를 쳤겠지.

그럼에도 그들이 그러지 않는, 아니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그들에게 준을 응징할 힘과 권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교단에 의해 배덕자들과 그 협력자들, 그 동안 비리를 저질러왔던 귀족들이 정리되고, 암스트롱후작가와 그 일파가 숙청당하면서 현재 귀족들의 힘은 몇 달 전의 절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약해져버렸다.

그렇다고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현재 제국의 실권은 모조리 아서와 교단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기에.

그렇게 된 이상, 귀족들은 하다못해 명분이라도 잡아야했다.

그들에겐 무척 다행이게도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의 말씀이 뭐든 간에 제국의 근간은 계급제였으니까.

다만 그 명분을 쥐어줄 황제가 교단과 무척 친했다.

자연히 귀족들은 유일한 황자, 레온의 곁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폐하, 조만간에 꼭, 진짜로 꼭 레온과 대화를 나누세요. 그렇지 않으면...”

레온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보면 모르싶니까? 황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

같은 희대의 명대사가 이 세상에서도 퍼질지 모른다.

준은 되도록 그런 일이 없었으면 했다.

친구와 존경스런 친구의 아버지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네, 최선을 다해 보겠네.”

“최선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해야 할 거예요. 그럴 기미가 보이는 순간 제가 레온을 황자자리에서 끌어내릴 거니까.”

“...추기경, 방금 그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은데.”

아들이 종이호랑이조차 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아서가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남과의 마찰을 싫어하는 준이기에 평소라면 곧바로 사죄를 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며 한 단어를 조그맣게 읊조렸다.

“레지스탕스.”

움찔!

아서가 허를 찔린 듯 몸을 떨었다.

그리곤 잠시 후, 면목이 없다는 듯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물었다.

“레온이, 그들을 아카데미로 끌어들인 범인인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인물이에요.”

레지스탕스로 인해 용사를 잃을 뻔했던 교단은 제국의 권력을 잡은 뒤 정말 철저하게 사전을 파헤쳤다.

제국이 그를 도우려고했지만, 교단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워낙 큰 사건이기에 제국이 조사를 은밀히 방해하려 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제인 아서조차도 용사세뇌사건의 전말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튼, 철저한 조사 끝에 교단은 레지스탕스를 아카데미 안으로 들인 협력자들을 대충이나마 판가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온은 그 판가름된 인물들 중 가장 유력한 범인이었다.

참고로 2순위는 주안, 그 짐승 자식이고, 교단은 현재 레온과 주안이 협력해서 레지스탕스를 아카데미 안으로 끌어들였다고 보고 있다.

“만약, 혹시라도 만약에 레온이 협력자라면...”

“속았을 것이네. 결단코 용사를 해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야. 그렇지 않다면, 용사와 함께 허무 속에 갇힐 리가 없지 않나. 아니, 애초에 레온이 그들의 협력자일 리가 없어.”

“예, 저도 제발 그러길 바래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댄다면 준은 더 이상 그를 친구취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저와는 별개로 교단은 꼬임에 넘어간 것을 정상참작해 어떻게 황자자리를 건사하게 해주겠지만, 귀족들의 꼬임에까지 넘어가게 된다면 그것도 불가능해질 테니 각오해두세요.”

사실상 레온이 황자직을 유지하고 말고는 아서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아서는 정말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막중한 책임감을 어깨에 얹은 아서가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비밀통로 너머로 사라지고 얼마 뒤, 황궁의 시종이 도성을 비롯한 제국 10성이 강의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알려주었다.

그에 준은 서둘러 훈련준비를 하고서 그들을 찾아갔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제국 최강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가르침은 얼마나 매력적일까?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두근거렸다.

“도령, 미안해.”

“남을 가르치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더구나.”

“으으. 왜 그걸 이해 못하는 거야? 왜 그걸 따라 못하는 거냐고!”

“세상 모든 선생님들이 존경스럽군.”

하나, 준의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땀 한 방울 안 흘릴 양반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산책을 갔다 온 강아지마냥 기진맥진 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게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천재 중의 천재인 궁성은 더욱 그러했는지 소파에 드러누워 연신 투덜거렸다.

“그쪽도 이래요?”

“...예.”

그리고 그것은 비단 평민출신 10성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소동으로 인해 다소 사이가 어색해진 귀족출신 10성들도 힘들어서 가르침을 못 내려주겠다고 시동을 보내 알려주었다.

순간 가르침을 줄 생각이 없어진 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으나 준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창성은 몰라도 검성과 편성은 그렇게 편협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결국 준은 다음 날을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학장의 1대 1강의를 듣기위해 아카데미로 간 준의 앞에,

“...이건 무슨 상황이다냐?”

참으로 기묘하고 더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우웩! 안녕하십니까!

크헉! 추기경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으!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마시는 겁니까? 혹시 특별한 비법이라도?

정문을 넘자마자 한 손에 하나같이 무척 익숙한 냄새가 나는 컵을 든 학생들이 눈물과 콧물, 침이 줄줄 흐르는 몰골을 하고서 인사를 해오는 것이다.

마치 형님의 마중을 나온 조폭들처럼.

‘그건 그래도 폼이라도 나지. 이건...’

“하하하. 많이 놀라셨습니까?”

속으로 질색하는 준에게 안경을 쓴 연약한 인상의 인물이 웃으며 다가왔다.

옷차림으로 보아 학생인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잔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속에 든 내용물은 결단코 아메리카노 같은 고풍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아, 제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죄송합니다, 무척 만나 뵙고 싶었기에 정신이 없네요.”

멋쩍게 자신의 뺨을 긁적인 인물은 뒤이어 자신을 소개했다.

“아카데미에서 기초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토니라고 합니다. 편하게 토니교수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토니교수님. 저는 준이라고 해요. 편하게 준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냥 추기경이라고 부르셔도 되요.”

준은 마주 자신을 소개하며 토니에게 손을 건넸다.

그에 활짝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은 토니는,

꼼지락꼼지락

그 손을 놓지 않고 꼼지락거리며 준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준은 왠지 모르게 몹시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교수님, 이제 좀 놓아주시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잡고 있으면 안 될까요?”

“네, 안돼요.”

각자의 의지

“네, 안돼요.”

준은 단호하게 손을 빼냈다.

그러자 토니가 ‘아∼’하는 소리를 내며 아쉬움 가득한 눈길을 보내왔다.

‘이 사람 설마?’

“수상한 사람! 주니, 얼른 포르의 뒤에 숨어!”

그 순간 불길한 예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는지 머리 위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던 포르투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경계심 많은 고양이마냥 날개를 바짝 세우며 토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 오해입니다! 저는 결코 불순한 의도로 추기경님의 손을 붙잡은게 아니에요!”

“그럼 우리 주니의 손을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주물럭거린 건데!”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토니가 화들짝 놀라며 억울하다 소리쳤다.

하나,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된 포르투나는 그 말을 쉽사리 믿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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