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
“엘프유일주의자? 뭐 하는 놈들이에요, 이 미친 자식들은?”
“그, 그게...”
“이종족우월주의자 와는 다른 놈들인가요?”
엘프유일주의자는 들어본 적 없어도 이종족우월주의자는 들어본 적 있었다.
의미 그대로 이종족 특유의 종족특성에 취해 이종족을 인간보다도 월등하다고 믿는 자들.
대부분의 이종족들이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이곳 엘랑스연합국에 올 때만 해도 준은 그들 때문에 골치가 아플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고, 웬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예? 예옛, 맞아요. 놈들과 이종족우월주의자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예요. 더욱 골치 아픈 존재이기도 하고요.”
“어째서요?”
“그게 그러니까...”
뭔가 걸리는게 있었는지 나히루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나 어서 말하라는 듯 준이 가만히 노려보자 결국 입을 열었다.
“이종족우월주의자들은 인간을 깔보고 혐오하긴 해도 존재자체는 인정하잖아요. 엘프유일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요? 그럼 인간을 모두 없애버리기라도 하겠데요?”
나히루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엘프를 제외한 모든 종족들을 엘프가 ‘사육’하고 그렇게 사육한 종족들을 세계수의 ‘양분’으로 삼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런 꼴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사육당하는 것보다 낫겠네요. 그래도 인격은 지킬 수 있을 테니.”
준은 그리 말하고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종족우월주의자들이 그냥 잘난 체 좀 하는 어린애들로 보일 정도로 엘프유일주의자들의 사상은 과격했다.
우월주의자들은 그래도 인간을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우열이 무의미해 지니까.
그런 우월주의자들에 반해 유일주의자들은 아예 엘프를 제외한 다른 종족들을 모두 가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들의 사상은 마왕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놈들이 멀쩡히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준은 어마어마한 충격과 회의감을 느꼈다.
누군 다 같이 잘 살아보자고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당장, 당장! 없애버려야 해!”
“동의하옵니다.”
“언니들, 참아요. 죽이는 건 놈들에게 관대한 처사라고요.”
“맞아요. 본보기를 보여야 해요. 절대로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 없게끔.”
“시아, 이단심문관을 부르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인 것 같아.”
“주인님, 맡겨만 주시면 제가 이 두 눈으로 놈들을 싹 찾아내겠습니다.”
“그, 그런 분들이 있었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충격을 받은 건 비단 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가만히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그의 아내들 또한 어마어마한 충격을 못 이겨 당장 놈들을 토벌하려고 했고,
마음이 여린 소피아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내들과 한 여인을 달래던 준은 문득 드는 생각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나히루를 바라보았다.
“설마 나히루의장님도...”
“절대로! 절대로 아니에요! 제가 엘프들의 대표니까 충분히 의심스러운 건 알겠지만 저는 절대로 그런 미친놈들이 아니에요! 애초에 제게 그런 사상이 있었다면 엘랑스연합국은 진즉에 엘프들의 나라가 되었을 거라고요!”
맞는 말이었다.
엘랑스연합국의 의장직을 몇 번씩이나 연임한 나히루가 그런 사상이 있었다면 엘프에게 유리한 법안을 은근슬쩍 하나 둘씩 추가해 엘랑스연합국을 엘프들의 나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엘랑스연합국은 엘프들이 주류라는 인식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모든 이종족들이 평등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프라는 종족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준은 쉽사리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에 나히루는 할 수 없이 세계수를 걸고 맹세를 한다는 강수(强手)를 꺼내들었다.
“하아∼. 시작할까요?”
“예, 시작하세요.”
준은 눈을 크게 뜨고 그 맹세를 지켜보았다.
나히루가 말로만 세계수를 거는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엘프가 세계수를 걸고 하는 맹세는 신관이 신을 걸고 하는 맹세처럼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되는 힘이었다.
그리고 준은 천도복숭아를 먹고 반신의 영역에 들어서면서 약간이지만 영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나히루가 정말로 세계수를 걸고 맹세를 했다면 영혼에 힘이 작용되는 순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저는 엘프유일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세계수를 걸고 맹세합니다.”
철컥!
다행이 나히루의 맹세가 끝나는 순간 준은 그녀의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환청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엘프유일주의자였다면...
오싹!
“지, 지금 무슨 생각 하셨나요?”
“...아무 생각도 안했는데요.”
“그런가요! 그런데 왜 제 머릿속엔 저희 나라가 사악한 악룡에 의해서 멸망하는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요!”
“그건 저도 모르죠.”
준은 억울했다.
조금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놈들을 척살할 생각밖에 없었는데!
“으으! 으으! 하아∼. 추기경님, 놈들을 색출해 내는데 최대한 협력할 테니 저희 나라를 멸망시키지만 말아주세요.”
불안감을 애써 삼키며 나히루는 준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약속했다.
그런 반응을 보니 정말로 준이 엘랑스연합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무리인데 말이야.
‘음, 아닌가? 아내들과 교단, 십성들이 도와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오싹!
“지금 견적을 내보고 있는 거죠! 그렇죠!”
오랜 연륜 덕분인지 대번에 준의 속내를 파악해내는 나히루.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매달려올 것 같았기에 준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정보가 사실인가요? 패밀리가 유일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게.”
엘리시아가 나히루로부터 받아온 패밀리의 정보.
거기에는 패밀리가 유일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여전히 그들의 통제 하에 놓여있다고 적혀 있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패밀리.
그것이 사실은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종족들을 사육할 생각 만만인 유일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용되고 있다니.
단체의 목적만 놓고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예, 맞아요. 패밀리는 놈들의 수단 중 하나에요. 그들로 하여금 이종족들에게 인간혐오를 심은 뒤, 그 혐오를 이용해 인간을 사육의 시발점으로 삼을 계획이었겠죠.”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종족들도 하나씩 사육해 나가겠죠. 원래 시작이 어렵지 한 번 시작하고 나면 그 뒤는 수월한 법이니까요.”
나히루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알아내셨으면서 왜 아직까지 패밀리를 치우지 않으신 건가요? 거짓말을 알아내는 종족특성도 있으니 유일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도 뽑아낼 수 있을 거잖아요.”
아니, 아예 엘프들을 불러내 거짓말인지 확인도 해보고 세계수를 걸고 맹세도 해보라고 했으면 안 됐나?
뭐, 안 되니까 그런 놈들이 버젓이 살아있는 것이겠지.
참고로 준은 유일주의자들이 오직 엘프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엘프 말고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는 종족은 없을 테니까.
“패밀리들을 싹 다 잡아서 심문해도 그들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할 거예요. 지시와 자금조달을 전적으로 정령에게 맡기고 있는 모양이거든요. 제 직속 정보조직조차 그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는데 패밀리라고 나댈 줄만 아는 양아치들은 오죽할까요.”
“그럼 패밀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건...”
“유일주의자들이 그들과 직접 접촉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죠. 양아치들도 머리가 있으면 자신들이 버림패라는 걸 알 테니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그들과 직접 대면하려고 할 테니까요.”
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아치 놈들이 생존본능 하나만큼은 알아주니 지시를 무시하는 등 해서 반드시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에 대해 알아보려 할 것이다.
“용케 유일주의자들에 대해 알아내셨네요. 정령을 연락수단으로 사용하는 걸 보니 보통 신중한 녀석들이 아닌 것 같은데.”
정령은 의지가 있는 자연물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그럴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흔적을 숨길 수 있었다.
특히 정령의 속성이 바람일 경우 아예 흔적자체를 남기지 않았다.
“정말 운이 좋아 유일주의자들 중 한 명을 잡아낼 수 있었거든요. 뭐, 말단이었고 정보를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던 모양인지 몇 마디하고 금방 죽어버렸지만요.”
“역시 맹세를 그런 쪽으로 사용한 모양이네요.”
하긴 안 사용하는게 오히려 이상했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감춰져 있어야 할 비밀조직에 그것만큼 비밀을 지킬 수단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맹세, 맹세라...
“일단 고위직에 있는 엘프들을 불러 모아 유일주의자인지 아닌지 맹세시켜보죠.”
“소용없을 거예요. 맹세를 거짓으로 할 수도 있고, 고위직에 앉을 정도면 제법 나이를 먹은 엘프일 텐데, 그럴 경우 엘프의 거짓판별도 속일 수 있거든요.”
“그래도 용사와 성녀의 권능까지 속일 수는 없겠죠.”
“그렇겠죠. 하지만 용사와 성녀가 엘랑스를 집어삼키기 위해 행패를 부린다며 프레임을 씌울 거예요. 당신들이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기는 했지만...”
“엘랑스의 대다수 국민들은 고위직에 앉은 엘프의 말을 더욱 믿겠죠. 저도 알아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거고요.”
“애초에 다른 목적이 있으시군요.”
준은 씨익 웃으며 이세계 합법로리에게 전생의 유명한 병법 하나를 읊어주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긴다.
“좋은 말이네요. 싸우기 전에 우선 상대를 알아야 한다라. 그런데 괜찮을까요? 그렇게 맹세를 시키면 저희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 텐데요. 그럼...”
씨익!
“...그 웃음은 뭔가요! 대체 무엇을 하시려고요!”
악룡의 사악한 웃음을 본 합법로리엘프는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사악한 악룡은 끝내 자신이 떠올린 사악한 생각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징벌
툭!
“자, 장관님. 부탁하신 홍차입니다냥.”
책상 위에 조심히 홍차를 내려놓는 비서.
한창 서류작업 중이던 엘랑스연합국의 외교부장관, 데니스는 작업을 잠시 멈추고 흘긋 홍차를 바라보았다.
진한 꽃내음이 콧속 깊이 스며들어온다.
그 내음이 어찌나 진한지 그저 냄새만으로 취할 것만 같았다.
역시 자연의 종족인 엘프가 정성들여 재배한 찻잎으로 우려낸 홍차다웠다.
냄새만 해도 이런데 그 맛은 어떠할까?
마음 같아선 당장 손을 뻗어 그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그러나 데니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딱 하나의 옥의 티 때문이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엘프인 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는 홍차의 표면.
그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한 가닥의 자그마한 털을.
그 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냐, 냥? 장관님, 왜 그렇게 바라보시나요냥? 뭔가 제가 잘못이라도냥?”
“...아무것도 아닐세. 자리로 돌아가서 마저 일이나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