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이 이상으로 날뛰는 건 막을 수 있겠어. 하지만 어쩌지? 계속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는데.’
자신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눈앞의 괴물을 비롯한 악룡의 여인들을 납치하는 것이지 이를 악물고서 괴물의 공격을 버텨내는 것이 아니었다.
곧 있으면 사악한 악룡이 제 여인들의 위험을 깨닫고 이곳으로 찾아올 터.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해결하고 악룡의 여인들을 납치해야 했다.
“대표! 엘프의 미래를 부탁한다! 실피드, 내 생명을 너에게 바치겠다!”
“꼭 엘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해 주세요! 샐러맨더, 저 또한 마찬가지니 저 괴물을 불태워 없애주세요!”
“잠깐! 분명 다른 수가 큭!”
휘오옹!!!
화륵! 화르륵!
알렉스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두 엘프는 제 생명력을 모두 정령에게 바쳤다.
마나보다도 정순하고 값진 생명력을 받게 된 두 정령은 기필코 계약자의 뜻을 이루어주고 말겠다는 듯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힘이라면...’
동지들의 고귀한 희생.
그 희생으로 만들어진 힘이라면 반드시 저 괴물을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렉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은 괴물의 진짜 정체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 저게 대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순도 높은 신성력.
티 한 점 묻지 않은 순백의 날개.
그리고,
위이잉!!!
저 하늘의, 그 어떤 종족보다도 고귀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의 결정체, 헤일로.
반박할 수 없는 천사의 상징.
괴물의 정체는 바로 그 천사였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신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천사.
그런 천사의 공격을 받는다는 건 하늘의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알렉스는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꼈다.
엘랑스연합국에서 수배령이 떨어질 때도, 하이엘프와 엘프들에게 사상을 부정당했을 때도 이만큼의 배신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러십니까! 신께서 걸어놓으신 개체수를 억지로 늘리려고 해서! 우리보다 못난 종족들을 통제하려고 해서!”
그게 그렇게나 잘못한 일입니까!
알렉스는 피를 토하며 외쳤다.
“응?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명백하게 잘못된 행동이지 않아? 그리고 좀 더 잘난 종족이 못난 종족들을 통제해야 한다면 엘프는 통제를 하는 쪽이 아니라 통제당하는 쪽이 맞지 않을까?”
“...”
알렉스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종족도 아닌 천사가 그리 말하는데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
챙그랑!
“징벌을 받는 건 저 하나로 국한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결국 알렉스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놓고 천사의 앞에 오체투지했다.
천사가 그리 말한다고 해서 이제 와서 사상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하겠답시고 싸워봤자 결과는 뻔했고, 무엇보다도 천사가 등장하는 순간 두 셋 정도의 동지들을 제외한 나머지 동지들 모두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결과가 뻔한 싸움에 이제까지 동거동락해왔던 동지들의 목숨을 희생할 수는 없었다.
――――――
준은 웨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궁성과 합류해 유일주의자들이 내놓은 미끼를 물었다.
아주 버리는 미끼는 아니었는지 미끼가 놓인 장소엔 무려 주황급의 실력자 한 명과 노랑급의 실력자 1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미끼로 내놓는게 이상할 정도로 엄청난 전력이었지만, 목표가 목표이다 보니 그들은 준과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것이 아닌 적당히 싸우다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도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구속되었다.
그럴 수밖에, 공간을 다루는 악룡과 천리안을 지닌 사냥꾼에게서 도망치는 건 도주의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튼 그렇게 미끼를 모두 구속하는 순간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나히루가 특수부대를 이끌고 준을 찾아왔다.
그녀의 옆에 웨일이 서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가 그녀를 끌고 온 듯 했다.
준에게 설득이 통하지 않자 바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인질에 인질로 대응하시려고요? 담력이 엄청나시네요.”
미끼를 사로잡은 준에게 나히루는 딱 그렇게만 말했다.
하지만 차게 식은 그녀의 눈에는 그녀가 굳이 말속에 담지 않은 경멸과 실망이 담겨있었다.
포르투나를 비롯한 연인들을 바로 구하러 가지 않은 것에 실망한 것이겠지.
권력자답지 않은 인간적인 반응에 준은 만족스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장님이 걱정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요.”
“하아∼. 추기경님, 용사님을 비롯한 연인들을 굳게 믿는 모습은 보기 좋은데요. 안타깝게도 그건 무리일 거예요. 제가 급하게 확인해 봤는데 평소 눈 여겨 보고 있던 노랑급의 실력자 몇 명이 은밀하게 모습을 감췄어요. 아마도 유일주의자로서 추기경님의 여인들을 납치하러 갔겠죠. 무엇보다도 유일주의자들의 대표라는 알렉스. 그는 제가 새싹수호대의 단장을 맡길 정도로 어마어마한 실력자예요. 저조차도 방심할 수 없는 자라고요. 아무리 용사님이 경지를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는 없을 거예요.”
헛된 희망은 버리라는 듯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나히루.
뭐라고 해명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기에 준은 괜히 골머리 썩는 대신 도원향의 입구를 열었다.
“그럼 확인하러 가자고요. 의장님의 말이 맞을지 제 말이 맞을지.”
“이, 이게 바로 그...아, 추기경님 같이 가요!”
준이 도원향의 입구로 향하자 나히루가 쭈뼛거리며 그의 뒤를 뒤따랐다.
“우와! 우와아!”
곧이어 친척(라일라, 엘랑스의 전권대사)에게 말로만 들었던 도원향을 보게 된 나히루는 놀이동산에 처음 온 아이마냥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녀도 자신도 그러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의장님, 구경은 나중에 시켜드릴 테니 지금은 하던 일을 마저 하죠.”
“아, 알았어요. 그런데 약속이에요. 나중에 꼭 다시 초대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깥과 연결된 출구를 열었다.
그 출구는 원정 중인 아내들 근처와 이어져 있었다.
원래 도원향의 입구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내들의 자궁 속에 있는 정액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준은 나히루를 비롯한 일행들과 함께 출구를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절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에? 에에에!”
용케 그 신성력의 주인을 발견해낸 나히루가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새된 비명을 지른다.
그럴 수밖에, 신성력의 주인은 무려 천사였으니까.
대전쟁 때나 내려왔던 천사가 뜬금없이 내려와 있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까?
다만, 고작 그것가지고 놀라기에는 많이 일렀다.
곧이어 더욱 놀랄만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주니! 보고 싶었엉!”
“옳지 옳지. 우리 포르, 많이 외로웠어?”
천사가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옆에 있는 용인의 품에 안겼다.
용인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마주 안으며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이제 보니 천사의 얼굴이 많이 낯이 익었다.
용인과 만날 때마다 용인의 머리 위에서 겁 없이 뒹굴고 있던 요정이었다.
그 요정이 사실은 천사였다고?
아니, 그것도 충분히 놀랍기는 한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용사와 성녀뿐만 아니라 천사를 연인으로 두고 있는 거야?
“추기경님,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똑같은 의문에 빠져있을 모두를 대신해 나히루는 질문했다.
그 질문에 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나히루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허망하게 무릎 꿇고 있는 알렉스를 비롯한 유일주의자들을 보자 딱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는 걸.
용봉지회
재앙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진리를 깨닫게 된 나히루는 좀 더 착해지자고 마음먹었고, 현명한 하이엘프답게 그 즉시 실천에 옮겼다.
가장 먼저 알렉스를 비롯한 납치현장에 있는 엘프유일주의자들을 이능력자전용 교도소에 구금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고문하고 고문하여 알아낸 나머지 유일주의자들과 협력자들 또한 모조리 감방동기로 만들어버렸다.
알렉스가 용사파티 납치작전에 유일주의의 사활을 걸었던 지라 나머지 유일주의자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주의자들을 뒤에서 은밀하게 도왔던 협력자들은 꽤나 많았고, 그 대부분이 고위직 종사자이거나 힘 있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자연히 나히루의 길다란 귀에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다 달랐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다 비슷했다.
특히나 같은 엘프니 좀 봐 달라, 이대로면 엘랑스 내에서 엘프의 영향력이 낮아질 것이라는 말은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히루는 자신의 결정을 무르지 않았다.
그에 목소리를 낸 자들이 후회할 거라는 등 같잖은 협박을 늘여놓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기는커녕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그들 앞에서 보란듯이 콧방귀를 끼었다.
목소리를 낸 자들 또한 유일주의자들과 그 협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위직 종사자이거나 힘 있는 집안의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뭐?
귀엽고 깜찍한 외모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나히루는 엘랑스 최고의 권력직인 의장직을 벌써 몇 번째 연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현존하는 하이엘프 중에서도 가장 피를 짙게 타고난 순혈 중의 순혈.
힘이면 힘, 권력이면 권력 뭐하나 빠지지 않았다.
설령 목소리를 낸 자들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나히루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끽 해야 조금 귀찮게 만드는 정도?
나히루는 그 정돈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아무렴 그리 멀지 않은, 아니 바로 옆에 있는 재앙과 마주하는 것보다 조금 귀찮은게 백배 천배는 더 낫지.
그렇게 엘프유일주의자들과 그 협력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감방동기로 만들어버린 나히루는 그 공을 모두 준과 그의 아내들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엘랑스연합국이 보유한 골드등급 아이템 몇 점과 ‘엘랑스의 은인’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유일주의자들을 체포하는데 있어서 그 수단이 조금, 아니 솔직히 아주 많이 과격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준과 그의 아내들이 주도적으로 유일주의자들을 체포한 건 사실이었기에 그 공을 준과 그의 아내들에게 모두 돌린 것에는 군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보상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말이 나왔다.
아이템, 그것도 골드등급.
준과 그의 아내들이 수십 개씩 가지고 있어서 오해할 수 있으나 골드등급 아이템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할 정도로 귀중하고 위력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런 아이템을 하나도 아니고 몇 점씩이나 준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랑스의 은인’이라는 칭호보다는 말이 덜 나왔다.
그럴 수밖에, 그것은 그저 기분 좋으라고 붙여준 호칭이 아니었으니까.
엘랑스의 은인은 딱 한 번 엘랑스에게 부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엘랑스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사실상 국가총동원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칫하면 부탁 한 번으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었다.
말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가진게 많은 권력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를 쓰고 반대를 외쳤고, 가진게 그리 많지 않은 국민들도 그 칭호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