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0화 (360/430)

‘그러지 않고서야 남의 땅(세계)를 욕심낼 리가 없잖아.’

넓음과 좁음의 합.

중국이 중국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차원에서조차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준은 감탄과 경악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준과 마찬가지로 질린 듯이 고개를 흔들고 있던 포르투나가 말을 이어나갔다.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어. 주니, 미궁의 정체가 다른 세계의 침략로인 건 기억하고 있지?”

“응, 기억해.”

“침략로 또한 길이고 길은 자고로 넓고 튼튼할수록 좋아. 미궁-무림은 실제 하는 땅덩어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어. 그래서 이만한 크기로도 우리 세계와 이어질 수 있는 거야.”

반대로 미궁-마왕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땅덩어리이기에 우리 세계와 안정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층을 겹겹이 쌓을 수밖에 없었다고 포르투나는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미궁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엄청나. 무림계의 영역 내에서 무림계 신은 얼마든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에 반해 포르 같은 신성력사용자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어. 그거 때문에 대전쟁때 엄청 화났어.”

그때의 분함이 떠오르는지 복어 마냥 양 볼을 부풀리는 포르투나.

그런 그녀를 달래는 한편 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동양식 성벽.

무림계의 영역에 속하는 그곳은 준이 아무리 레이더의 성능을 높여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했다.

필시 무림계 신의 영향력이 탐지를 막고 있는 것이리라.

‘신력을 사용한다면 탐지가 가능할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영향력을 아무리 강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직접 이 땅 위에 서서 힘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못할 테니까.

강림이나 강신을 하지 않는 이상 신력을 더한 탐지를 방해할 수는 없겠지.

“...포르, 이만 돌아가자.”

그렇게 가능성을 보았지만, 준이 그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해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투에 있어서 적의 정보를 아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적에게 자신의 정보를 주지 않는 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준은 믿었기 때문이다.

‘숨기고 또 숨겨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때야 말로 자신이 신력을 사용하고 또 신력의 존재가 밝혀지는 때라고 준은 다짐했다.

――――――

결연한 다짐과 함께 7일이 지났다.

준은 엘리시아, 새싹수호대와 함께 엘랑스의 2개 성 중 하나이자 이번 용봉지회의 개최지인 미드 3차 성의 성벽 위에 서서 무림 측 인사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무(武)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깃발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그들의 발걸음은 참으로 느긋하고 당당했다.

마치 이쪽을 놀리려는 듯이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싹수호대는 물론이고 성에 주둔하고 있던 엘랑스의 모험가들 모두 입술을 짓씹으며 얼굴을 한껏 구기고 있었다.

어느새 내려앉은 불편한 침묵.

그 침묵을 거두려는 듯 웨일이 준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어조가 아닌 결연함이 담긴 어조로.

“용봉지회가 시작되는 날, 저는 거의 대부분 오늘처럼 저들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건 참...더러운 기분이었겠네요.”

“예, 참 더러웠죠. 저들을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우리가 패배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왔으니까요.”

무림계와 엘랑스의 합의로 다음 용봉지회는 지난 용봉지회의 패자 측 성에서 열리게 된다.

패자 측에게 홈 어드밴티지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신의 개입은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그러한 합의가 만들어진 이유는 합의 당시 무림계와 엘랑스 양 측 책임자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걱정 때문이었다.

우리 후손이 너무 못나서 연패를 하면 어쩌지?

합의 당시 양 측의 책임자는 그러한 걱정을 하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연패 확률을 낮추고자 그러한 합의를 만들어냈다.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실제 효과는 있으니만 못했다. 연패를 막기는커녕 패배자임을 각인시킴으로써 오히려 연패를 유발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이 정말 너무너무 싫어요.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닐 테고요.”

웨일이 주위를 둘러본다.

새싹수호대와 엘랑스의 모험가들 모두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신들을 오랜 기다림에서 벗어나게 해줄 이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우웅∼

“...그러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죠. 이번 기회에 따분하고 지루한 기다림 따윈 저들에게 줘버리자고요.”

신력이 차올랐다.

눈을 감고 그것을 확인한 준은 이내 그에 보답하듯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대답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조금 힘든거 알죠?”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있는 힘껏 도와드릴 테니까. 그렇지, 친구들!”

맞아맞아!

좋아! 한 번 해볼까!

이번에는 기필코 이긴다!

짝!짝!짝! 우와아아!!!

웨일에 물음에 크게 호응하는 새싹수호대.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박수와 환호로 응원하는 엘랑스의 모험가들.

어느새 주위엔 불편한 침묵 대신 뜨거운 열기가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움찔!

그 뜨거운 열기에 막 성문을 통과하려던 무림 측 인사들이 놀란 듯 몸을 떨었다.

그에 반응하듯 한층 뜨거워지는 분위기.

준 또한 그 분위기에 탑승했다. 온갖 폼이란 폼을 다 잡던 이들이 그렇게 놀라는 모습은 준이 보기에도 무척 유쾌했다.

“추기경님, 용사님, 결투장으로 가시죠. 새싹수호대,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잠시 뒤, 무림계 인사들을 마중 나갔던 나히루가 준과 엘리시아, 새싹수호대를 불러 모았다.

결투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결투는 이쪽까지 이동해온 무림계 참가자들을 배려해 1시간 뒤에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그들의 요청으로 예정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문 앞에서 자신들이 기선제압을 당했고,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모양이었다.

의도야 어쨌든 한창 분위기가 고조된 이쪽이 그 요청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준과 엘리시아, 새싹수호대는 성벽에서 내려와 무림계 참가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결투장으로 향했다.

아까 전 그들이 그러했듯 느긋하고 당당하게.

결투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무림계 참가자들의 얼굴이 자연스레 잔뜩 일그러졌다.

채앵! 샤라라

그때 그들의 한가운데 서있던 인물이 난데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부드러운 발검과 함께 피어나는 매화꽃.

그 꽃잎이 흩날리며 퍼지는 매화향은 조금 떨어진 준조차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진하고 선명했다.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아니...

“매화꽃처럼 아름답구려. 소저, 부디 나에게 그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소?”

“절대로 싫사옵니다.”

녀석이 발검 이후 도화 앞에 달려와 그녀의 이름을 묻는 순간 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야, 죽고 싶냐?”

녀석이 자신의 숙적이라는 것을.

용봉지회

“야, 죽고 싶냐?”

감히 자신의 여인을 탐하려드는 숙적에게 준은 진심을 가득 담아 그리 말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보니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드래곤으로서의 탐욕이 모두 여인(정확히는 여인의 젖가슴)에게 집중된 악룡은 도저히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그 분노의 원흉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이름을 가르쳐주시오, 소저. 이름을 알아야 소저와 함께 운우지락을 즐길 때 소저의 이름을 귓가에 속삭여줄 수 있을 것 아니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숙적의 눈과 귀는 도화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얼굴이 새빨간 것이 도화에게 한 눈에 반한 듯 했다.

‘아름답다. 수많은 여인들을 보았지만, 저 여인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보지 못했다. 가히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로다!’

그런 준의 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숙적, 화산파의 천재검객 신풍은 실제로 도화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없지. 소저가 부끄러움이 많은 듯 하니 내가 먼저 이름을 밝히겠소. 나는 화산파의 신풍이오. 과분하게도 사람들은 나를 매화신룡이라 부르오. 이제 소저차례요. 소저의 이름은 어찌되오?”

“귀머거리시옵니까?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계속되는 신풍의 구애.

그에 화가 난 건 비단 준뿐만이 아니었다.

도화 또한 계속되는 구애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그래서 역겹다는 듯 옷소매로 입가를 가리는 동시에 경멸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그 화를 표현했다.

“하하, 좋구려! 그래, 여인이라면 응당 앙칼진 맛이 있어야지.”

다만 효과는 없었다.

아니, 없는 걸 넘어서 신풍의 욕망을 더욱 자극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는 듯 신풍은 도화의 반응을 새롭고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준은 참으로 보기 역겨웠지만, 그렇다고 아까처럼 발작하지는 않았다.

제 남편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더없이 차가운 무녀님이 자신이 알아서 처리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의념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과연 무녀님이 어떤 방식으로 신풍을 참교육할지 준은 잠자코 팔짱을 낀 채로 기다렸다.

“앙칼진 맛이 좋다 하셨사옵니까? 그럼 쭉 앙칼진 맛만 보여 드리겠사옵니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나는 기왕이면 다른 맛도 보고 싶소. 특히 소저가 뜨겁게 달아오른 모습이 기대되는구려.”

“제가 알기로 화산파는 사파가 아닌 정파인데, 그 문파에 속한 이가 어찌 사파에 속한 삼류 건달처럼 행동하시는 것이옵니까? 혹 화산파가 사파로 전향하기라도 한 것이옵니까?”

파르르

사파로 전향했냐는 물음은 차마 좋게 넘어갈 수 없었는지 신풍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 그것도 잠깐, 신풍은 애써 미소 지으며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우리 화산파는 정파 중의 정파요. 다만 멋과 낭만, 즐거움에 있어서 다른 정파보다 좀 더 솔직할 뿐이오. 그리고 그 대신 의와 협 또한 다른 정파보다 뛰어나오.”

“그렇사옵니까? 그렇다면 남편이 있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일도 절대로 없겠사옵니다. 그것은 명백히 옳지 못한 일이지 않사옵니까.”

“...그렇소.”

말은 그렇게 해도 신풍은 떳떳하지 못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장담컨대, 남편이 있는 유부녀를 건드려 그 스릴과 배덕감을 즐긴게 한 두 번이 아닐 테지.

그런 그의 반응을 도화는 대놓고 비웃었지만, 해놓은 말이 있기에 신풍은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저 기필코 저 도도한 여인을 제 아래에 깔아뭉개 짐승마냥 울부짖게 만들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순간 어째서 이렇게까지 저 여인에게 집착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이어진 그녀의 행동 때문에 그 의문은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포옥!

“그럼 더 이상 소첩에게 말 걸지 마시옵소서. 소첩에겐 이미 몸과 영혼, 사랑을 모두 바친 낭군님이 있사옵니다.”

준의 품에 기대고는 상냥하게 그의 뺨을 매만지는 도화.

그 손길과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사랑에 둔감한 사람조차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사랑과 애정이 가득했다.

쩌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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