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화 (400/430)

용살자로서의 명예, 또는 그저 용의 피와 살을 얻기 위해서 용을 찾아 헤매는 놈들.

그런 놈들이 상대적으로 연약한 새끼용을 일부러 노리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들이 새끼용들을 일찍 독립시키는 건 그 때문이었다.

마치 사자가 제 새끼를 절벽 아래로 내몰 듯이 새끼룡이 시련을 통해서 강한 용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눈물을 머금고 내치는 것이다.

그러다 새끼용이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으면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에 나서는 거고.

신좌에 오르지 못한 도마뱀의 복수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지만, 애초에 저 반푼이 용이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내릴 여력이 없었다.

그 정도 시련은 강신이 아니라 강림을 해야지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만큼 반푼이 용신이 가진 힘은 강력했다.

-그 정도 힘을 가진 주제에 이제야 탈피를 겪다니. 가진 힘 때문에 진즉에 겪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이제야 겪게 된 건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애송이가 시련다운 시련을 겪는게 이번이 처음일 거라는 소리다. 가진 힘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수월하게 넘겼겠지.

정답이나 다름이 없는 헌원의 예상.

무림맹주는 그 예상을 듣고서는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도 아니고 고작 아랫것 몇이 죽은 걸 가지고 시련으로 여기다니. 어지간히도 곱게 자란 모양입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널리고 널린게 아랫것들인데.

무림맹주와 헌원은 진심으로 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그 나라답게 무림계의 인구수는 억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많았고, 자연히 생명의 무게감도 지나치게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무림계의 최고권력자이고, 심지어 한 명은 무림계에 직접 생명을 불어넣은 장본인이었다.

널리고 널린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필요하면 만들어낼 수 있기까지 한데 어찌 생명의 무게를 무겁게 느낄 수 있을까?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충고해주마. 천마라는 광오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던데, 좋은 말로 할 때 그 이름은 버려라. 제왕은 네 녀석처럼 작은 것에 연연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신좌는 더더욱 그렇지. 어찌 한낱 미물 따위에게 정을 붙인단 말인가.

탈피를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림맹주와 헌원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신나게 입을 털었다.

그 정도는 시련 축에도 들지 않을 거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예상과 다르게...

부르르!

두 사람의 입방정은 용에게 확실한 시련이 되어주고 있었다.

――――――

환생 전후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친분 있는 누군가를 눈앞에서, 그것도 힘이 모자라 무력하게 잃는 것은.

그래서일까?

-아악!

-살려줘!

-천마님! 제발 복수를!

그들이 생애 마지막에 내뱉은 단말마가 귓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미안하다.’

죄악감이 자라난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죄악감을 양분 삼아 분노가 새롭게 자라났다.

고오오!

무섭게 덩치를 부풀리는 분노.

코어와 드래곤의 권능, 신력이 분노에 물들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무척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준은 잠자코 내버려두었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반신이 되었음에도 답보상태에 있던 코어의 등급이 올랐다.

그것도 한 등급이 아닌 무려 두 등급이나.

신의 축복을 받은 용사가 아니고서야 오를 가망이 없다는 빨강급에 오른 것이다.

도대체 왜 이제 와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 준은 헛웃음과 함께 반성했다.

주황급에 오르게 되면 아주 조금이나마 제 의지를 세상에 표출할 수 있게 된다.

쏘아진 화살에 동물의 움직임을 모방시키거나 체온을 이용해서 불꽃을 일으키거나 검을 휘둘러 일으킨 바람으로 태풍을 불러오거나.

제국십성들로부터 배운 기술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리고 빨강급부터는 일시적으로나마 세상의 이치를 비틀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야 하는 물의 흐름을 역전시키거나 하늘과 땅의 위치를 바꾸거나 죽었던 자를 되살리거나.

역대 용사들의 전설이 대개 그러했다.

아무튼 그런 이적(異蹟)들을 준은 노랑급임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있었다.

그걸 가능케 해주는 수단을 그는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노랑급 이상의 경지로 오르지 못했다.

간절함.

그에게는 경지를 올려야 한다는 간절함이 부족했다.

아무리 잘 차려진 밥상(드래곤의 권능과 신력, 리얼라이즈)이 마련되어 있어도 밥숟가락을 들 의지(간절함)이 없다면 배를 불릴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신도들의 죽음으로 채워졌다.

이제와서 빨강급으로 오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말 미안하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준은 또 한 번 목숨을 잃은 신도들에게 사죄했다.

자신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위를 노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들이 이 자리에서 그렇게 덧없이 죽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천마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신도들이 원하는 천마, 제왕은 절대로 자신 같은 현재에 만족하는 돼지새끼가 아니었을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도 아니고 고작 아랫것 몇이 죽은 걸 가지고 시련으로 여기다니. 어지간히도 곱게 자란 모양입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널리고 널린게 아랫것들인데.

저렇게 오만에 빠져 미래를 보지 못하는 머저리들도 아니었을 것이고.

‘고맙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 신도들에게, 그리고 나쁜 예시가 되어준 맹주와 헌원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제 다시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겠다고,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충고해주마. 천마라는 광오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던데, 좋은 말로 할 때 그 이름은 버려라. 제왕은 네 녀석처럼 작은 것에 연연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신좌는 더더욱 그렇지. 어찌 한낱 미물 따위에게 정을 붙인단 말인가.

오만에 빠져 미래를 보지 못하는 저런 머저리 같은 신이 되지도 않겠다고.

다짐(의지)과 함께 이제까지 따로 놀던 빨강급의 코어와 드래곤의 권능, 신력이 손을 맞잡았다.

하나만 있어도 반신에 오르기에 충분한 요소들.

그것들이 그렇게 손을 잡아버리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

화아아!

준은 드디어 필멸자로서의 껍질을 탈피했다.

새로운 신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결판

팡!

하늘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검은 용오름이 구심점을 잃은 것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용오름이 뿜어내던 존재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더욱 무겁게 주위를 짓눌렀다.

제국십성과 나히루 등.

용케 기절하지 않고 눈을 뜨고 있던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정신줄을 애써 부여잡으며 용오름이 몰아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딜 감히 고개를 드냐고.

마음 한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끝끝내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두 눈에 선명하게 새기는 것.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그 존재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예우이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필멸자에게 맡겨진 역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오오!”

“세, 세상에. 정말로 올랐어.”

그렇게 그들은 목격했다.

필멸자의 탈을 탈피하고 기어이 신좌에 오른 신룡의 모습을.

“도대체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고작 탈피 한 번 했다고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신좌는 낮지 않단 말이다!

맹주와 헌원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소리친다.

잔뜩 핏줄이 선 두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시샘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겉모습은...딱히 변한 게 없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룡, 준은 자신의 모습을 살피기 바빴다.

맹주와 헌원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이익!”

-이제 막 신좌에 오른 주제에 기고만장하기는!

그런 준의 모습은 안 그래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던 인간과 신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 존재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준을 향해 진심어린 일격을 날렸다.

슝!

그 일격은 시공간을 어지럽힐 정도로 빠르고 매서웠다.

단순히 빠르고 단단하기만 해서는 절대로 그 일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일격을...

“...뭐?”

-이게 대체!

“그에 비해 속은...이건 뭐 그냥 신력덩어리잖아.”

준은 너무나도 가뿐하게 피해냈다.

더 나아가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맹주의 뒤로 홀연히 나타나 제 몸에 대한 감상평을 이어나갔다.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다고!”

무림맹주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똑같은 일격을 연이어 날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준은 다른 곳에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터무니없군. 네 녀석은 신력이 남아도는 것이냐.

“오. 눈치챘어. 과연 한 세상을 다스리는 주신. 눈썰미가 대단한 걸.”

맹주의 발버둥이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헌원이 준의 수를 간파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제 몸에 대한 점검을 마친 준은 칭찬과 함께 어디 한 번 알아맞춰 보라는 듯 헌원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역천(逆天). 하늘(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를 제 마음대로 수정하는 기적. 네 녀석이 사용한 기적은 그게 아니더냐.

“하하. 정답.”

그랬다.

준은 헌원이 말하는 역천을 사용해서 인과를,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바꿔버렸다.

맹주의 검이 아무리 시간을 어지럽힐 정도로 빠르고 매서워도 그렇게 위치를 바꿔버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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