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한 것은 잡아먹힌다-9화 (9/97)

9====================

로첼리아

수프가 가득 들었던 나무 그릇이 돌바닥에 내던져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로첼리아는 붉게 부풀어 오르는 뺨을 가렸다. 눈물이 팽그르르 돌았지만 흘릴 수 없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앙카는 그녀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로첼리아,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 네가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긴 것도 모자라 남자를 간호한다고? 감히! 이 신성한 곳에서?”

“티, 티시스님, 그건 치유의 방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언제부터 내게 변명을 할 수 있게 되었지, 오만한 로첼리아? 왜 마렐님이 시키셔서 그랬다고 말을 못하니? 응? 항상 네가 잘도 드는 핑계잖니.”

로첼리아의 작은 어깨가 덜덜 떨렸다. 티시스의 오른손이 언제 또 그녀의 몸에 닿을지 모를 일이었다.

“겨우 아이 하나 살려낸 것에 무척이나 들떠 보이는구나. 그래, 이 모든 것이 네가 혼자 해낸 일이라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비앙카는 크게 콧방귀를 꼈다.

“마렐께서 너만 아끼고 도는 것을 등에 업고 교만하게 굴지 마라. 네 약학 지식은 한없이 부족한데다, 티시스도 되지 못한 네가 멋대로 읽게 놔둘 만큼 나는 규정에 불충실한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어딜 시스 주제에 약학서에 손을 대고 멋대로 조제 하지?”

어린 시스 중에서도 정식으로 티시스가 되기 전 약학의 재능 여부에 따라 미리 학습할 수 있었다. 신전 내 가장 약을 잘 제조하는 페이 티시스가 로첼리아에게 이를 허락하였고, 때때로 직접 그녀에게 약과 오일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으므로 사실상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비앙카는 로첼리아에게 만큼은 허락해주지 않으려 했고 사사건건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티시스.”

“오만한 것. 마렐을 직접 모신 걸로 교만 떨지 말거라. 네 주제도 모르는 행동 때문에 아침부터 정말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어.”

“…예.”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위대한 마렐의 위치에 올라갈 수 없단 말이다, 알아듣겠어?”

로첼리아는 그녀가 자신에게 퍼부어 대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렐을 모신 것이 아니라 에릭이 조금 더 편하라고 도운 것뿐이었다. 단 한번도 마렐이 되고 싶은 적도 없었다. 그저 여신님의 곁에만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10년을 넘게 당한 비앙카의 비난과 폭언에 로첼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새 무력해 졌다. 비앙카의 그림자만 나타나도 움츠러들었다. 평소에도 말이 많지 않은 두 입술이 비앙카 앞에서는 아예 벌어지지도 못했다. 게다가 오늘은 처음으로 손찌검까지 당했다. 로첼리아는 목까지 차오르는 눈물과 무서움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비앙카는 그 후로 잔인한 말을 더 던지고는 주방을 빠져나갔다. 로첼리아는 쏟아진 수프를 닦아내고 새 그릇에 새 수프를 담았다.

“아, 정말 이게 무슨일이야. 비앙카 티시스는 도대체 왜 너한테 이러는지. 로첼리아, 괜찮아?”

“응…괜찮아…. 고마워.”

“내가 마렐에게 말해야겠어, 아무래도 안되겠어, 로첼리아.”

“아냐, 내가…내가 할게.”

주방에 들어선 다른 시스가 그녀를 달랬지만, 로첼리아는 끝까지 울지 않고 참아냈다. 하얀 베일을 뺨이 가려지도록 깊게 내리고 쟁반을 들고 진료실로 향했다. 그러나 하얀 뺨에 생긴 붉은 자국과 눈물로 충혈된 눈동자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얼른 넘겨주고 나오려 했지만 마렐의 눈치가 더 빨랐다. 마렐이 허리를 숙여 로첼리아의 얼굴을 살피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로첼리아,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마렐님. 괜찮아요.”

로첼리아는 눈을 피하며 수 아주머니께 수프와 스푼이 놓인 쟁반을 전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에릭을 향했다. 베일로 부은 볼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거 다 먹어야 빨리 낫는 거야, 에릭, 알았지?”

“응, 시스누나.”

에릭은 누워있는 상태에서 미열에 시달리면서도 옅게 웃어보였다. 로첼리아는 아직 힘이 없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걱정하는 눈동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잠시 나를 보고 갈까, 로첼리아?”

복도까지 따라온 마렐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로첼리아는 머뭇거렸다. 차마 몸을 돌려 마렐을 똑바로 볼 수 없어 그녀는 예의가 아님을 앎에도 그대로 말했다.

“저, 조금 피곤해서…먼저 올라가 쉬어도 괜찮을까요?”

“그래, 수고했다 로첼리아. 얼른 가서 쉬렴.”

그녀의 태도가 평소답지 않자 마렐은 걱정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로첼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자신의 방에 가서 아직도 잠들어 있는 이베트의 돌아누운 등을 보았을 때에야, 로첼리아는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주르륵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난 매번 이럴까.’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으며 홀로 아픔을 삭였다.

에릭은 하루정도 더 신전에 머물다 완쾌하여 가족과 함께 돌아갔다. 에릭의 가족들은 자신들을 돌봐준 신전 사람들에게 매우 고마워했다. 특히 에릭은 로첼리아의 손을 잡으며 활짝 웃어보였다.

“우리집에 또 오면 그때는 맛있는 거 줄게요, 예쁜 시스 누나!”

‘예쁘다’는 말에 로첼리아는 당황했으나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고마워, 에릭.”

***

“웬 짐이 이렇게나 많아?”

다음날 새벽부터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는 로첼리아 곁으로 이베트가 다가왔다. 매일 늦잠을 자는 그녀치고 무척이나 이른 기상이었다.

“오라버니 결혼식이니 이것저것 챙겨갈게 많네.”

“좋겠다. 보러갈 가족도 있고….”

이베트의 말에 짐을 싸던 손이 멈추었다.

“이베트.”

이베트는 고아였다. 마을을 전전하여 구걸하며 살다가 열 살 무렵에 삐쩍 마른 몸에 허름한 넝마차림으로 신전을 찾아왔다. 지금은 얼굴에 살집도 있고 푸석푸석했던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다. 처음 만났을땐 키도 비슷비슷했지만 지금은 로첼리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다. 친구 앞에서 저도 모르게 가족을 만난다는 데 너무 들떠 있었던 것 같아 로첼리아는 미안해졌다.

“이베트, 빨리 다녀올게.”

“한 달이나 걸린다며. 무슨 혼인식을 그렇게 오래 한담? 이 동네는 하루 반나절이면 충분한데 대도시는 다른 건가? 페른은 정말 신기한 곳인가 보다. 게다가 너랑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

이베트가 서운한 듯 로첼리아를 끌어안았다. 같은 방을 쓰는 친우가 페른에 가족이 있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갔다 온다니 실감이 났다. 로첼리아는 여태껏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한 적이 없었다. 세 살 때 이곳으로 와서 지금까지 단 한번 가족을 만나봤다는 것에서 ‘이 아이도 나랑 같이 가족에게 거의 버려진거나 다름없구나.’ 하며 스스로 위안을 찾았었다. 그런 친구가 가족을 보러간다는 것에 축하보다는 시기 질투심이 느껴졌다. 이런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려고 이베트는 일부러 더 친구를 꽉 안았다. 자신보다 큰 키의 이베트가 매달리는 것에 로첼리아가 웃으며 친구의 등을 다독였다.

“이베트. 내기할래?”

“내기?”

“저번에 못 다한 뜨개질 말이야. 누가 먼저 완성하나.”

그 말에 이베트가 빙그레 웃었다.

“좋아. 누가 많이 했는지 시합해서 지는 사람이 그날 저녁밥 굶는 거다? 네가 바쁜 척 하고 있을 때 내가 열심히 다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난 이 시골 촌구석에서 할 일이 전혀 없거든.”

“여유로운 걸? 아직 시작도 제대로 못한 거 아니었어, 이베트? 그럼 나대신 정원과 약초밭도 돌봐 줘. 부탁할게.”

“흥, 몰라. 내 입에 빵 한쪽 넣는 것도 바쁜데 내가 풀떼기들한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니. 매번 너 따라서 하긴 했지만 솔직히 귀찮았다고.”

“꽃이랑 약초랑 다 죽으면 우리가 밀가루를 살 수가 없게 되는데 괜찮겠어? 약재로 팔아야 하잖아.”

“아, 맞네. 하긴 해야겠구나. 아아, 싫다.”

일이 늘었다며 투덜거리는 이베트를 뒤로하고 마차에 탄 로첼리아가 창문을 열고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걱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정말, 이베트. 나 없을 동안 비앙카 티시스에게 밉보이는 건 제발 하지 마. 마렐님도 네가 나갔다 온 거 다 아신단 말이야.”

‘비앙카’를 말하는 로첼리아를 보며 이베트는 잠시 생각했다. 바로 어제 마렐이 그녀를 직접 서재로 불러 로첼리아가 혹 누군가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며 조용히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베트는 실컷 비앙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신뢰를 득한 적 없는 자신의 말을 마렐이 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으나, 그녀 나름은 최선을 다했다. 한참을 조용히 듣던 마렐은 이베트의 말을 멈추게 했다.

-네가 한 말은 다 이해했다, 이베트. 나도 더 알아보겠다. 그런 일이 있는 줄…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전혀 몰랐어.-

그렇게 말하는 마렐의 표정은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로첼리아가 공주라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렸어야 했다. 아무리 몰랐다 하지만 이는 왕족에게 상해를 입힌 것,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타인을 그렇게 막 대하는 이들이 신전 안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로첼리아는 싹싹하고 바른 아이여서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렐님 앞에서야 항상 깍듯하고 착한 척 하는 사람일 테니까요, 티시스는요.-

이베트는 툴툴댔다. 윗사람에게는 가식적으로 굴면서 로첼리아같이 약한 아이들에겐 한없이 잔인한 비앙카는 역시나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은 조심하렴, 이베트 시스. 아직 비앙카는 네게 선임이 아니냐. 그리고 너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실관계를 좀 더 알아보고 싶구나.-

-설마 로첼리아가 비앙카 티시스에게 잘못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버럭 화내는 이베트를 마렐은 진정시켰다.

-그런 뜻은 아니란다.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야 나 또한 잘 알고 있으니. 다만…명확히 알 필요는 있단다. 이에 대해선 제대로 조사할 것이다.-

결국 자신의 진술 따윈 믿지 않는 거라면서 이베트는 입을 내밀었다. 마렐은 한숨을 쉬며 이베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내가 널 믿는다고 하였으니, 부디 내 말 또한 믿어주렴, 이베트. 그리고 당분간은 로첼리아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당연하죠, 마렐님.-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다. 이베트는 이 대화의 결과가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되도록 비앙카가 이번 일로 내쫓기기를 바랐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줄 필요는 없지. 가족을 보러가는 길에 쓸데없이 걱정만 늘어날 테니.’

이베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첼리아에게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걱정 붙들어 매! 절대 안 걸리고 잘 할 테니!”

“그게 아니잖아.”

“부럽다, 로첼리아! 비앙카의 마수에서 멀리멀리 도망가라! 네가 없는 동안 내가 다 욕을 먹을테니, 넌 다신 오지 말고!”

“아이, 정말, 이베트!”

그녀의 외침을 남기고 마차는 페른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어서 분명 기쁜데, 묘하게 엄습하는 두려움에 그녀는 손을 모았다. 도나크를 떠나본 경험이 거의 없기에 막연히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언제까지고 두려워해선 안 돼. 마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무 신전에만 머물러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게 좁은 걸지도 몰라. 페른은 나의 가족도 있고, 평범한 사람들도 사는 곳인걸. 근거도 없이 무서워하기만 하면 여신님께서 분명 실망하실 거야. 그리고 마렐님께선 죄를 짓지 않은 남성들 또한 여신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니, 그들을 무턱대고 미워해선 안 된다고 하셨어. 그곳에도 렐 아저씨나 카를 아저씨처럼 좋은 분들이 분명 있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로첼리아는 양손을 모았다. 마렐이 준 작약 목걸이를 꽉 잡은 채 그녀는 기도했다.

‘여신님, 제발 제가 다른 이들을 무서워하거나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지혜롭게 이겨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제게 힘을 주세요.’

미지의 세계로 가는 마차는 새벽의 안개를 뚫고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blaustern입니다!

밤새 놀랄일이 벌어져서 감사하기도 하고 앞으로 더 잘해야 할텐데 걱정이 많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추코와 많은 응원 감사드리며,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쓰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드디어 길고 긴 '로첼리아'챕터가 끝났습니다.

비앙카 피하려다 레오나드를 만나게 되는 운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