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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것은 잡아먹힌다-29화 (2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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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대공과의 혼인이라니.’

로첼리아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깨어났어도 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습관처럼 온실에 갔지만 공주는 꽃에 물을 주는 것도 흙을 갈아주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있다가 돌아왔었다. 혼인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혼인이라니, 살면서 그 단어가 자신을 향해 오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녀는 어젯밤 환궁하자마자 결례를 무릅쓰고 아바마마를 뵈었다. 그 앞에 바짝 엎드려 읍소했다. 왕은 건조하고 딱딱하게 그녀를 내려 보며 말했다.

-로첼리아. 네 신분을 말해 보거라.-

-저는 도나크 신전에서 고테베르다 여신님을 모시는 시스입니다.-

-아니, 너는 알렌사 국의 공주다.-

그녀는 간절히 말했다.

-아바마마, 저는 이미 여신님께 인생을 바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저의 소원은…-

-여기 와서 한 맹세는 잊었느냐. 분명 너는 네 입으로 공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하였다.-

-그건….-

-그냥 인사치례로 한 말은 아니어야 할게다. 왕족의 발언은 황금보다 귀하고 바위보다 무겁다. 십여 년간 여신을 모셨으니 네 할 도리는 끝난 것이며, 여신께서도 이 길을 걷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실 것이다. 그것이 네가 이 알렌사 왕실에 나의 딸로 태어난 이유니라. 그러니 이제 알렌사국의 왕녀로서 네 역할을 다 하거라.-

무릎 꿇은 로첼리아는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딸아.-

왕은 공주가 있는 자리로 내려갔다. 허리를 숙이고 나직이 공주를 부르자 로첼리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왕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비는 이제 늙었다. 조만간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울지도 모르지. 그때에도 네가 신전 안에서 홀로 지낸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구나. 국왕이기 전에 아비로서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에 둘러 쌓여있는 걸 보고 싶구나.-

-아바마마, 저는…-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차마 하지도 못한 채 결국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왕은 그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안다, 나의 딸아. 이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분명 당황스럽겠지. 그러나 대공은 내가 보기에 네게 나쁘지 않은 혼처감이다. 그의 부와 삶에 대한 경험은 분명 널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어찌 아비가 딸에게 나쁜 길을 손으로 가리켜 가라 하겠느냐. 그러니 너는 나의 선택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너의 언니인 샬롯도 혼인생활을 만족해하고 있으며, 베르트 또한 결혼에서 행복을 찾고 있지 않느냐. 혼인은 두려운 게 아니란다. 오히려 축복이지.-

그리고 왕은 잔인하게 말하였다.

-17세의 생일을 축하한다, 딸아. 이것이 네게 가장 좋은 생일 선물이 되길 신께 기도드리마.-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공주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베개에는 그녀가 흘린 눈물이 젖어 얼룩을 만들었다. 자신의 앞길을 비추던 빛이 사라지고 깜깜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여신에 관련된 책들을 수십 권이나 꺼내 보았지만, 그곳에도 길은 없었다.

“할 수 없어. 하기 싫어…결혼은, 싫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클란 대공과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은 도나크에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하여도 왕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만 피할 수 있을지 내내 생각했다. 도망? 허나 무슨 수로 어떻게 도망을 간단 말인가. 로첼리아는 이곳에서 살아온 게 아니기 때문에 길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의 짐과 옷가지만 들고 나간다 해도 여긴 궁 안이고 돌아다니는 귀족들과 시종들이 많고 궁을 지키는 기사들도 많다. 게다가 모두들 공주의 얼굴을 안다. 운이 좋아 걸리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다 치더라도 과연 도나크까지 가줄 마차를 구할 수 있을까? 그 비용은 어떻게 구하지? 베르트 왕세자 혼인을 위해 페른에 왔을 때 그녀가 받은 보석과 돈이 일부 있었다. 그걸로 숙박까지 가능할까? 혼자서 가능할까?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이 일을 시도니는 절대 몰라야한다. 공주가 없어지면 가장 먼저 의심 받을 테고, 괜한 오해만 살 수 있다. 그러니 어디 다른 곳에 심부름이라도 보내놓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레오나드에 생각이 미쳤다. 자신에게 늘 따듯하고 친절했던 공작이라면 도와주겠다고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기대는 건 안 돼. 시도니 다음으로 친하게 지낸 유일한 사람이야. 날 도왔다간 그도 곤란해 질 것이 뻔한데. 정말, 로첼리아, 너는 뻔뻔하기도 하지. 조금 친해졌다고 바로 도움이나 청할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왕이 직접 명한 일이었다. 단순히 도망간다고 하여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주를 믿는다 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딸에게 부탁한다 하셨다. 여신의 딸이면서도 왕의 막내딸인 그녀는 어느 것이 진리의 길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고, 여신을 저버린 데 대한 벌은 물론이요, 향후 있을 왕의 분노를 견딜 자신 또한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왕이자 아버지로서 ‘혼인’은 요청할 수 있는 사항임을 로첼리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를 거절했을 때, 한 나라의 왕이 아닌 아버지의 면을 깎음으로써 그가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딸’이라고 불러주던 따듯한 손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혼인을 해야 한단 말인가, 여신님의 뜻을 저버리면서? 아니, 이것이 여신님의 뜻인가, 내가 이리 하기를 그분께서 원하시는데 내가 내 욕심으로 고집만 피우고 있는 것일까?'

막막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로첼리아의 손이 도서관 창가에 있는 작은 화분안의 애꿎은 풀잎만을 매만졌다. 차라리 이 꽃이고 싶었다, 그저 여신께서 불어주는 바람에 자유로이 흔들릴 수 있는 이 꽃 같은…. 양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여신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찌 자신의 기도에 침묵하신단 말인가. 제발 무어라고 말씀해주셨으면…기어이 눈물이 로첼리아의 뺨을 가르고 흘러내리려는 순간이었다.

"공주님…?"

레오나드의 두 눈동자 가득히 공주의 눈물어린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어딘가 바쁘게 움직였던 듯 약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주의 뒤에 서 있었다. 로첼리아는 놀라 손으로 눈물을 지우며 살짝 뒤를 돌았다. 작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 잠시만요, 카엔 공. 제가 좀…"

“어찌 된 일입니까.”

심각해진 얼굴의 레오나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로첼리아는 부끄러움에 창문의 커튼 뒤로라도 숨어버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 미안합니다, 오늘은 말씀을 함께 읽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지금…그러니 오늘은 제발 돌아가 주세요….”

“공주께서 온실에도 안 계셔서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괴로워하고 계신데, 제가 그저 모른척하고 그냥 떠나는 것이 어찌 도리겠습니까. 공주님을 찾아다닌 노력을 봐서라도, 무슨 일인지 제게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나 울었던 건지 공주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레오나드는 간절히 요청했다.

“공과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하시는 게 오히려 제가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도 말입니까?”

그는 단호했다. 공주가 말해주지 않으면 이 도서관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로첼리아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 의자에 레오나드가 앉아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공주는 결국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자클란 대공이 청혼해 왔다는 것부터 아버지인 브누아 왕이 혼인을 명한 것까지.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는지 몰랐다며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에 심히 자책하고 있었다. 맞잡은 두 손은 불안함에 떨려왔다.

“전 이제부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엇이 여신님의 뜻인지. 제가 모르는 것인지 무엇인지.”

그녀의 말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로첼리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 위로 조심스레 공작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신심이 부족한 저는 아직 여신님의 뜻은 모르겠으나, 공주께선 모르고 계신 게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무엇을 말인가요?"

"공주께서 지금 왜 괴로운지에 대한 것 말입니다."

로첼리아는 눈물 가득한 눈을 들어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제 부족한 신앙…때문이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닙니다. 공주님의 신앙이 깊은 것을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태도…이것도 말고 다른 원인이 있다는 말인가요?"

레오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주께서는 지금 이 모든 문제를 홀로 해결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라 보입니다.”

빙 돌려 말하는 레오나드를 물기어린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도 복잡해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의 생각을 감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로첼리아의 긍정의 표시에 레오나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공주님과 함께 여신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그 시간동안 제가 알아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공주께서는 답을 내시기 전까지 혼자 그 짐을 다 짊어지고 고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작게는 말씀에 대한 해석부터, 공주님을 어렵게 만들었던 여러 일들까지도 말입니다. 물론 그 고민의 시간을 폄하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공주님께서 홀로 서서 이겨내고 극복하고자 하는 그 모습에 여신님께서도 분명 감격해 하셨을 터이지요.”

“…”

“그러나 때로는 그 문제가 혼자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 다말서 2장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로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가는 길보다 둘이 함께 갈 때 그 자갈길은 짧아진다. 여신께서는 자신의 딸에게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고, 함께 걸어갈 이를 내려주신다.’”

둘이 한 목소리로 구절을 읊었다. 레오나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것의 뜻 또한 공주님께서 제게 알려주셨는데, 기억나십니까?”

로첼리아는 긍정했다. 잊을 리 없었다, 바로 며칠 전 카엔 공작과 함께 읽으며 나누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여신은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주고, 함께 이겨나갈 수 있는 자를 내려준다고 하며 마렐이 겪었다고 하는 경험담을 공작에게 전해 주었었다.

“하지만 그건,”

“왜 그 말씀이 이 상황에서 공주님께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을 잇지 못하는 로첼리아에게 레오나드는 계속해서 그의 생각을 전했다.

"저는 이 순간, 여신께서 왜 제게 공주님과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말을 하게 인도하셨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이는 지금 이 순간의 공주님을 돕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카엔공. 전…이곳에서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만일 저를 돕는 걸 들키게 되면 아바마마로부터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분의 뜻을 어기는 데 공작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도망이라, 그는 턱을 쓸었다.

“도망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그리고 저는, 공주님께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하시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왕명에 거역한 죄는 최악의 경우 죽음, 공주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차악의 경우 병사들을 보내 강제로 모셔올 겁니다. 결국 혼인을 하실 수밖에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로첼리아는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알고 있음에도 그것 밖에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절박했다. 공주의 절망한 얼굴에 공작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마주 보고 싸우는 것 또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주보는 것…이요?”

“차라리 정면 돌파해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요?”

"예를 들면, 썩 유쾌한 방법은 아니나 자클란 대공이 선택할 수 있도록 공주님을 대신할 다른 이를 보내거나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는 약간의 경고를 할 수도 있지요. 여신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로첼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하고 싶지 않아요.”

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흠…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볼까요."

"반대, 로요?"

“저를 공주님 곁에 두십시오.”

“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고, 로첼리아의 눈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커졌다. 하지만 공작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아시는 바입니다만, 우리 알렌사국에서는 어찌되었든 결혼은 오직 1인과만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자클란 대공의 혼약을 무효화 시키려면 그만큼의 지위를 가진 자를 내세워 먼저 혼인할 기회를 주었다고 해야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왕실을 제외하고는 카엔가가 가장 높지요. 저 정도의 지위라면 헤슈텐의 대공과 견주어도 부족할 게 없지요. 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제 보호를 받으세요. 왕으로부터 공식연인을 허락받고 지내며 시간을 버는 겁니다. 자클란 대공이 완전히 포기 할 때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되면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를 종료하면 됩니다.”

로첼리아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제게 해주시는 것인가요, 공.”

레오나드는 한숨을 쉬었다. 진심어린 걱정이 그의 얼굴에 묻어났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만…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자클란 대공 그는 여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께 공주님을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이는 여신께서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입니다. 아니, 여신께서는 분명 이 일을 막지 않은 저에게 큰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자클란 대공이…”

“여신의 뜻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자입니다. 저보다도 무지한 자입니다. 흉포하며 여인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이입니다. 듣기로, 전의 부인을 멋대로 강압하고 강요한 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이가 과연 공주님께서 여신님의 신전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놔둘까요? 이 교리집을 매일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할까요? 안타깝게도,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과연 여신님께서 공주님께 허락하신 길일까요? 아닐 겁니다. 여신께서 당신의 딸을 그리 되도록 놔둘 리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말은 로첼리아를 혹하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말에 설득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처럼 고테베르다 여신님의 말씀을 이행하는 자라는 것에서부터 어느 순간 그를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하는 말은 바로 로첼리아가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말의 걱정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그건 공작께 너무 실례되는 일 아닌가요. 거짓 연인이 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공작의 평판에도 문제가 될 수 있을 텐데요.”

레오나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공주님, 당신께서는 너무 다른 이들을 배려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신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러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교계에서 좀 더 오래 경험해 본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공주께서는 공주님보다 낮은 지위의 자들을 조금 더 이용하실 줄 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황에서 제일 곤란한 것은 공주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는 공주님만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공주께서 그렇게 바로 생각을 전환시키기란 쉽지 않겠습니다만, 전 지금은 공주님이 욕심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공주님, 오늘 전하로부터 무슨 말씀을 들었다 하셨지요?”

“제가 여신님의 딸이자…공주이니, ‘공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 말인가요.”

“예, 여기서 한 가지 간과된 게 있습니다. 공주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권리가 있습니다. 공주로서의 의무도 있지만 공주가 가질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그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온통 책임뿐이었다. 여신의 딸로서의 본분과 공주로서의 의무만이 그녀에게 요구 되었다. 그러나 카엔 공작은 그녀에게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레오나드는 둘 사이에 놓인 탁자에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체스 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악한 이들에게 쉽게 이용되거나 휘둘려지지 않고 여신님의 딸로서 사시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공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가장 좋은 말은 바로 접니다.”

로첼리아의 고개가 공중에서 가로 저어졌다.

“아니에요, 공작. 제가 어떻게 공작을 이용하나요. 그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공주님께서 계속 간과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겁니다. 왜 절 이용하실 수 없지요? 전 공주님보다 지위가 낮은 자입니다. 당연히 공주께서 내리시는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공주께서 여신님의 말씀을 거역치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공주님께 그러합니다.”

울 듯한 얼굴이 그를 마주향했다.

“이 혼인, 하고 싶으십니까?”

로첼리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계속해서 진실을 요구했다.

“그것이 공주님께서 정녕 원하시는 것입니까?”

결국 로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저를 이용하시는 것을 두려워하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로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오나드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사실 한 가지의 이유를 더 추가하자면, 실은 이번 거짓 연인 행세는 제게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말인가요?”

“저희 카엔령 안에서 가장 잘 팔리는 특산물 중 하나로 룬베리가 있습니다.”

로첼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 것을 좋아한다는 공주의 말에 공작이 한번 꼭 맛보이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곧 있으면 룬베리를 수확할 때가 돌아옵니다. 가장 맛있을 시기이죠. 그런데 저희는 딱히 라이벌로 생각하진 않지만 제멋대로 카엔령의 룬베리랑 감히 맞서겠다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자클란 대공의 헤슈텐 영지에서 나는 룬베리지요. 질은 나쁘나 싼 가격 때문에 대량 생산하여 물량공세를 하고자 항상 알렌사 국의 무역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공주께서 자클란 대공과 결혼하게 된다면 룬베리의 모든 상권이 대공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야 다른 광산에서 그 손해를 메꿀 수 있다지만 룬베리를 수확하는 영지의 농민들이나 교역하는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피해가 갈 것입니다. 공주님. 이번 상권은 저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부디 저를 돕겠다는 뜻으로 이번 일을 함께 하여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공작의 제안에 응한다면 공주는 두 가지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여신의 딸로서의 위치와 공주의 위치 모두 버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거짓으로 연극을 해야 한다니…로첼리아가 아무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고민하자 레오나드가 그녀의 옆에 가까이 섰다.

“괜찮습니다, 공주님.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제가 꾸민 일이니, 공주께서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작…그건,”

레오나드가 허리를 숙여 공주의 손에 조심스럽게 체스 말을 쥐어주었다. 검은 나이트였다. 로첼리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그녀를 향해 듬직한 미소를 건네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만약 말을 해야 하는 게 있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이건 모두 저 카엔 공작과 그 가문을 위한 것이라 생각 하면 됩니다. 어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공주의 오른쪽 귓가를 울렸다. 두터운 손이 공주의 손을 이끌어 체스판에 말을 두게 했다. 나이트는 두 손에 의해 상대편 말을 밀어냈고, 넘어진 하얀 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요한 도서관에는 굴러가는 체스말 소리만이 들렸다.

"그러니 부디,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십시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blaustern입니다.

네, 지난 2화에서 열심히 욕을 먹고 있는 그분을 피하기 위한 노력 제1장.

찾아온 기회는 놓치지 않아요. (로첼리아 도망쳐!)

오타 확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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