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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것은 잡아먹힌다-35화 (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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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머리를 기둥에 겨우 대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과 살들이 한 곳에 뭉쳐져 그녀의 온 장기를 모두 짓눌렀다. 조여 오는 고통에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읏."

로첼리아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자신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조여드는 고통은 그녀의 앙 다문 입술을 기어이 열리게 만들었다.

"아, 아파…읏."

"더 조여라, 그리고 가슴도 더 올라오게 조정해."

"예, 공주님."

로첼리아가 고통을 호소했으나 로잘린의 명령에 시녀는 말없이 더 끈을 당겼다. 더 이상 조일 것도 없는 가느다란 허리와 배는 줄로 단단하게 묶였다. 로첼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크게 호흡을 해봐도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붙잡고 있는 기둥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에 겨우 힘을 주었다.

로잘린은 동생의 방 이곳저곳을 들추는 가운데서도 이것저것 명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코르셋을 입느라 동생이 집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작은 보석함이며 살펴볼 것도 없는 방을 샅샅이 뒤지고도 만족스럽지 않자, 기어이 로첼리아의 교리집 마저 뒤적이고 탈탈 털어보기까지 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이 보석들이야 카엔 공작이 생일 선물로 주어서 받았다고는 하는데, 겨우 이것뿐이야?'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카엔 공작이 다른 여인들에 비하여 동생에게 애지중지 공을 들이고 있는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에 비해 로첼리아가 가진 패물은 극소에 불과했다. 사랑의 밀어가 적혀있는 연애편지조차 없었다.

'정말 둘이 연애하는 건 맞는 건가? 공작이 예전에 다른 여인들을 취할 땐 그렇게 큰 보석들도 아낌없이 주었으면서…왜 이 아이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거지? 아무리 로첼리아가 거절했다손 치더라도, 이상하잖아.'

그렇게 의심하다가도 로잘린은 고개를 저었다. 카엔 공작의 행동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 눈빛이며 태도는 사랑에 푹 빠진 남자의 그것과 똑같았다. 남자라면 곁에 있기만 해도 덜덜 떨던 로첼리아가 그와는 멀쩡한 상태로 대화를 했다. 게다가 이름을 부르며 무려 입도 맞췄다 하는 증인까지 있으니, 이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꺼림칙한 로잘린은 증거라도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끈들을 모두 꽉 묶은 후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로첼리아는 무심코 코르셋을 내려다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부끄러워하던 그녀의 두 가슴이 바짝 올라서서 하얀 둔덕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두 가슴 사이의 깊은 함정과도 같은 골을 로첼리아는 차마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만일 악이 흘러든다면 그 검고 검은 골 사이가 바로 그 악의 신이 머물 곳이었다. 수치심에 빨개진 얼굴로 서있는 그녀에게 시녀가 들고 온 것은 깊게 파인 드레스였다. 붉은 실크와 화려한 레이스가 그녀의 하얀 피부를 가리기는커녕 더욱 도드라져보이게 할 바로 그런 드레스.

"언니 전 이런 옷은 너무…"

억지로 입혀지는 와중에 로첼리아는 힘껏 거부하려 애썼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부채질을 하면서 시녀들과 담소를 나누던 로잘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탁, 로잘린은 부채를 접으며 옷이 입혀지고 있는 로첼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로첼리아, 내가 이런 말은 안하려 했는데…실망이구나."

실망한 듯한 기색에 로첼리아는 바짝 긴장했다. 덕분에 시녀들은 로첼리아의 옷매무새를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사교계에서 지금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지?"

"엘렌 왕세자비님과 로잘린 언니…지요?"

"아니, 틀렸어."

로첼리아의 눈을 마주하며 그녀는 교만하게 턱을 들었다.

"'나'와 엘렌 왕세자비지."

엘렌은 외국에서 들여온 그녀만의 스타일로 유행을 주도 하고 있었고, 로잘린은 특유의 화려한 머리 장식과 과하게 보일 정도로 깊게 파인 드레스가 그녀의 특징이었다. 둘이 입거나 쓰는 모든 것은 사교계의 유행이 되었다. 특히 얼마 전 로잘린이 자신의 상체만큼 높은 가발과 가발 위에 어여쁜 새집 장식을 얹어 모두의 극찬을 받은 후, 파티장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거대한 가발과 온갖 창의적인 머리 꾸밈장식을 하고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로잘린이 가진  패션에 대한 자부심은 가히 대단했다.

"이런 나의 동생인 네가 옷차림에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구나. 그것도 나 로잘린 알렌사의 동생이 말이야. 당연히 너 또한 이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니. 그렇지 않니?"

"맞습니다, 공주님."

"로잘린 공주님의 동생이신데, 당연히 그래야죠."

로첼리아 주위를 감싸며 극찬을 하던 로잘린의 데임들이 말했다. 로첼리아는 그녀들의 칭찬에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옷은 저보다는 역시 언니에게 더 예쁘게 어울릴 것 같아요."

로첼리아가 애써 말했지만, 로잘린은 가차 없었다.

"그럴 리가 있니. 이 언니가 특별히 왕실 재단사인 앙로에게 부탁해서 너를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었는데 네게 안 어울릴 리가 있나. 앙로는 무척 실력이 좋은 사람이란다. 아니지, 설마 이 언니의 선물이 맘에 들지 않는 거니?"

로잘린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로첼리아가 당황하여 로잘린에게 다가갔다.

"아니에요, 언니. 그런 게 아니라…정말 예쁜 드레스지만 제가 소화해 낼 만큼 저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니, 잘 보렴. 얼마나 네가 사랑스러워 보이니. 네게 아주 잘 맞는단다."

로잘린은 로첼리아의 양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거울조차 쳐다보지 못하는 로첼리아의 턱을 로잘린의 손가락이 살짝 들었다.

"네가 내 동생이라면 이런 걸 부끄러워할 필요 전혀 없단다, 로첼리아. 이 얼마나 매력적이야."

그녀의 손이 로첼리아의 목과 쇄골 쪽을 쓸었다.

"이렇게 어여쁜 것을 왜 숨기려고 그러니. 이는 분명 축복이야, 우리 알렌사 왕실의 여인들이 받은 특권이고."

"전…이런 건…."

"다 너를 위한 것이란다. 남자들에게 이 가슴이 가장 중요하단다. 그들은 여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매우 단순해. 예쁜가, 가슴이 큰가, 허리가 잘록한가, 입술이 도톰한가, 그리고…성적으로 매력적인가."

로첼리아의 가슴, 허리, 입술을 부채로 톡톡 치는 손길에 로첼리아는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로잘린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그들에겐 많은 걸 알려줄 필요가 없단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가, 어떤 것을 더 잘 만들 수 있는가, 시는 어떻게 쓰고 피아노는 어떻게 잘 치는가. 남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줄수록 그들은 혼란스러워 하지. 그러니 이 정도가 딱 좋단다.”

화려한 리본을 좀 더 꽉 잡아당겨 모양을 바로잡아주며 로잘린은 매력적이게 웃었다.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네 연인인 카엔 공작이 널 버리지 않고 너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 있어 주지 않겠니?"

'그와 오래 있지 않아도 되는걸요. 저흰 그저 연기하고 있는 것뿐인데….'

하지만 로첼리아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둘이서 합의한 바와 같이 아직 거짓 연인관계는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대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원치 않게 흘러가는 상황과, 이에 따라 점점 늘어나는 거짓말에 로첼리아는 요즘 마음속 불안감도 같이 부풀어 가고 있었다.

로잘린은 자신의 앞에 앉은 동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질투심에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사교계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건 로잘린도, 엘렌도 아닌 바로 동생 로첼리아였다. 그것도 카엔 공작을 등에 업고서 말이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한다! 지금껏 모든 일의 중심이었던 그녀가 느끼는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아름답기로는 자신이 카엔 공작과 어울렸다. 바람둥이 기질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 사교계를 지배하는 여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가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엘렌이 말한, '로첼리아 공주는 다른 여자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 보여요. 순진해 보이는 것? 그게 어쩌면 카엔 공작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 건 아닐까요.'라는 말에서 그녀는 지금의 행동을 이끌어갈 근거를 마련했다.

'그래. 그 '색다름'을 없애면 그가 이렇게 로첼리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금방 사그라지지 않을까? 카엔 공작이 어차피 한 여자를 오래 만날 리도 없는데 말이야.'

패션을 살펴보았을 때 그녀는 지나치게 몸을 가렸다. 원래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일부러 더 들춰보고 싶은 법. 선물 포장을 풀 때는 신이 나지만 내용물을 확인하고 나면 금방 시들어버리는 게 사람 마음 아닌가! 그녀는 동생의 몸을 그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카엔 공작은 여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자였으나 한번 정을 떼어버린 후에는 가차 없었다. 지금까지 만나 정을 통한 여인들에게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이번에도 같을 것이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우리 착한 동생아."

로잘린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 미모와 애교로 남성들의 마음을 빼앗아 왔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순진한 여동생을 꼬실 차례였다.

"난 사실 너와 네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단다. 네가 남자에 대해 흥미를 가지다니, 언니는 무척 기쁘구나. 드디어 네가 어른이 되는 것이야."

"아, 아녜요, 로잘린 언니. 관심이라뇨, 그런 건…“

“그렇게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 혹 종교적 신념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너는 여신의 딸이기 이전에 분명히 알렌사의 공주이며 엄연한 왕실 사람이야. 우리 왕족의 의무가 뭔지는 잘 알고 있지 않니. 우리는 실과 같은 존재란다. 두 가지 천을 하나로 이어 알렌사라는 옷을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란다. 그걸 잊지 말거라.”

로첼리아에게는 그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기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로잘린도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설마, 혼자서 아무 책임도 없이 신전 구석에 박혀서 편히 살 생각은 아니겠지? 너는 성실한 아이니 말이다.”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어 감정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남편감이 결정되거나 바뀌는 언니오빠들의 모습을 곁에서 보며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4명의 언니오빠들은 크게 거절하지 않고 다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왕국에 더 이득이 되는 혼인을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자신은 이 의무에서 한발 떨어져 살아왔었다. 분명 직무 유기다.

“카엔 공작은 꽤 괜찮은 사람이란다. 왕실의 일원과 인연을 맺기에 적절한 인물이지. 나는 너희들의 관계를 적극 찬성한단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하지만 얼마 있으면 끝날 사이인걸요.’

우물쭈물 하는 로첼리아의 팔을 끌어 로잘린은 자신의 옆에 앉혔다. 로첼리아의 하얀 얼굴과 옅은 홍조는 백분을 바르고 장미를 빻아 만든 가루로 화장을 한 자신의 피부보다 곱고 아름다웠다.

“널 불러놓고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에오윈과 그데발린>은 다 읽었니?”

“네 언니.”

그렇게 말하는 로첼리아의 양 뺨은 붉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처녀 에오윈을 열렬히 사모하는 청년 그데발린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다시 만난 이들이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현재 가장 유명한 궁정시인이자 작가인 보이티에의 작품으로, 살롱의 부인들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킨 로망 최신작이었다. 전에 억지로 한번 참석한 살롱모임에서 로첼리아는 귀부인들이 이 책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말에 작은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로첼리아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그곳은 신전과 달랐다. 로망은 귀족들의 유희였고 유연한 대화를 위해 당연히 갖추어야 할 필수 지식이었다.

거짓 사랑을 극도로 혐오하는 비앙카 티시스가 알면 분명 크게 노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로첼리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펴들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을수록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어 내려갔다. 물론 여러 번 책을 닫고 숨을 돌려야 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이 책에서 성애의 묘사를 읽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북이 속에서 울리듯 쿵쿵댔다. 다리 사이가 아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달아오른 뺨을 식히려 그녀는 손등을 갖다 댔지만, 이미 열기는 온몸을 감싸 안은 후였다. 아, 이베트가 말하던 감정이 이런 건가. 혹 이런 책을 읽은 게 남에게 들킬까 두려워 베개 아래 책을 숨길 때 이미 침대 곁에 둔 초가 다 녹아 있었고,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첫 번째 로망을 완독한 순간이었다.

“그 책에서 에오윈이 그데발린을 위해 한 것이 생각이 나니?”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그를 찾아가 달밤에 함께 춤을 추는 것, 말씀이시죠?”

“그래. 만약 우리 로첼리아가 연인을 만들게 된다면 말이지, 에오윈과 그데발린처럼 서로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것이란다. 상대가 내게 헌신하여 즐거움을 준다면, 우리도 이에 따라 베풀어 줌이 옳지 않겠어? 그게 바로 연인이 하여야 할 의무란다.”

그러면서 그녀는 동생의 부드러운 살결을 간지럽히듯 쓸었다.

“그는 분명 네 이 모습을 좋아할 거다.”

‘의무…나를 도와준 공작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과연 이것 뿐일까. 연인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말이야.’

“자, 그럼 얼른 갈까?”

“네? 어디로 말인가요?”

로첼리아는 부끄러웠다. 어디론가 사람이 없는 데에 숨고 싶었다. 로잘린이 곁에 없었더라면 분명 도망이라도 갔을 것이었다. 로잘린은 마치 그녀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왕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힘들지도 않은데 자꾸 쉬자고 하거나, 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두리번거리거나, 괜히 호수정원을 돌아보자고 하는 등의 일이 반복되었다. 점점 발이 아파오고 옷이 조여 왔지만 로첼리아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지나가는 남성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눈이 자꾸만 자신의 봉긋 솟은 가슴과 허리, 그리고 옷으로 부풀려진 엉덩이를 쓸고 간다는 느낌에, 로첼리아는 그저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런 건 싫어. 하지만…'

그녀는 곁에 선 언니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로첼리아와 다르게 로잘린은 특히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만나는 모두에게 인사를 받고, 담소를 나누며, 로첼리아를 당당하게 소개했다. 로첼리아를 이렇게 곁에 두고 행복해 하는 언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휴, 너무 힘들구나. 우리 어디 정원에라도 앉아서 쉬지 않으련? 사람들을 시켜 차라도 들자꾸나."

한참을 걸어 다닌 끝에 로잘린도 지쳤는지 그렇게 말하며 정원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공주님."

누군가가 뒤에서 그들을 불렀다. 아니 사실은 로첼리아만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로첼리아는 당황했다. 레오나드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멀찍이, 뒤에는 오빠인 베르트가 앉아 있었다. 공작 또한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볼까 싶었던 그때, 그가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바로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는 로첼리아의 어깨를 가려주었다. 그는 로첼리아의 맨 살이 코트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공주 자체를 바라보지도 않고 옆으로 눈길을 내리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날씨가 쌀쌀한데요. 춥지 않으십니까? 부족하나마 이거라도 부디 두르시지요.“

옷에서는 평소에 레오나드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다. 페퍼민트와 로즈마리, 라벤더 향이 섞인 듯한, 신전에서도 자주 맡았던 향기였다. 로첼리아는 옷깃을 매만졌다. 어쩐지 따듯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주는 것 같았다. 춥다니, 오늘 날씨는 무척 따듯한데. 공작의 배려가 느껴져 로첼리아는 생긋 웃으며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레오나드."

진심이 담긴 인사에 레오나드도 마주 웃고는 로첼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편하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제가 로첼리아 공주님을 잠시 모셔가도 될지요, 로잘린 공주님?"

“어, 어 알겠다, 로첼리아. 이따가 보자꾸나.”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던 레오나드는 고개를 다시 들면서 날카롭게 로잘린을 바라보았고, 로잘린은 정말로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그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로첼리아를 바라보았을 때, 아까전의 차가운 기운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그럼 언니, 저는 먼저 가볼게요."

동생은 순한 양처럼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로잘린은 이 상황이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은 카엔 공작이 으레 그리하였듯 여인의 몸을 감상하고 즐기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옷을 벗어주기까지 하면서 로첼리아를 감싸다니? 게다가 날 노려봤다고! 그녀는 사교계에 몸담은 지 8년 간 보아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오늘 일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로첼리아는 곁에 서서 걸어가는 레오나드에게 물었다. 그가 인도하는 방향이 평소와 달랐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레오나드?"

"공주님의 궁입니다."

"네?"

"옷을 갈아입으시는 편이…좋지 않겠습니까?"

"아…."

로첼리아는 그의 옷을 좀 더 잡아당겨 옷 안에 몸을 파묻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있었다.

"역시 이런 옷…제게 어울…이 옷차림이 역시 유행이겠죠?"

"유행이건 아니건 이는 상관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앞을 본 상태로 단호히 말했다.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인 후 생긋 웃어보였다. 공주의 궁에 도착하자, 로첼리아는 그를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온실에서 잠시 기다려 줄래요? 금방 갈게요."

“물론입니다.”

로첼리아는 평소에 정원을 돌볼 때 입는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는 그가 벗어준 겉옷을 손에 들었다.

‘이런 일상도 이제 얼마 뒤면…더 이상 없겠구나.’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을 매만지던 로첼리아는 이내 궁을 나섰다. 레오나드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대신 들겠다는 시도니의 말도 거절하고, 그녀는 직접 레오나드의 옷을 들고 걸어갔다.

그는 먼저 온 온실을 한 바퀴 돌며 생각했다. 공주는 무엇을 하든 그의 눈에는 가장 아름답기는 했지만, 오늘 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어색한 미소를 짓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확 파인 드레스와 그대로 노출된 동그마한 어깨를 누군가 보았을 거란 사실은 그를 심히 불쾌하게 했다. 그들의 넋 나간 표정이야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았다. 만약 망각의 약이 있다면, 영혼이라도 가져다 팔아서 그들의 입에다 부어주고 싶었다. 레오나드는 입술 끝을 깨물었다.

'어떤 놈들과 마주쳤는지 싹 다 알아봐야 겠군. 그놈들 눈을 파 버릴테다.'

공주가 곧이어 나타났다. 레오나드가 걸쳐준 자켓을 직접 곱게 손에 든 채였다. 평소에 온실을 돌볼 때 입는 하얀 모슬린과 물색의 얇은 앞치마를 허리에 꽉 조여 맨 그녀의 미소는 자연스러웠다.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에 안심했다. 그녀는 이런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다. 저 얼굴, 저 표정, 그리고 저 사랑스러움은 오로지 지금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어야 했다. 오래도록.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blaustern입니다.

동상이몽, 좋을 때 즐겨라 레오나드!

그리고....감사합니다! 코멘트가 1000을 넘었습니다 ㅠㅠ

정성스러운 코멘트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읽을 때마다 힘이 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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