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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것은 잡아먹힌다-53화 (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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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황금 사자문양의 마차는 고테베르다 신전 앞에 멈춘 채 떠날 줄을 몰랐다. 그 앞에서 금발의 청년이 조그만 몸의 소녀의 손을 맞잡고 달콤한 눈빛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왕세자님의 부름만 아니었다면 제가 끝까지 예배에 참석하였을 텐데요. 송구할 따름입니다.”

“오라버니께서 급히 부르셨다면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요. 같이 예배드리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요. 제가 공 대신 더 많이 기도할게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레오나드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쉽다느니, 더 같이 있고 싶다느니 말을 늘어놓는 그에게 로첼리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요, 레오나드. 오라버니가 기다리실지도 모르는데…”

그는 이제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아아, 안되겠습니다. 여신님의 말씀이 듣고 싶어 몸이 달 지경입니다. 아무래도 못가겠다고 왕세자께 전언을…”

“전 멋지다고 생각해요, 레오나드가 오라버니와 함께 일하는 모습이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다 죽어가던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로첼리아는 생긋 웃어보였다.

“네, 레오나드. 레오나드가 오라버니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아 기뻐요. 분명 능력이 있으니 오라버니께서도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공주님. 분명 알렌사 국 전체서 저만큼 출중한 이는 없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대답에 로첼리아는 강하게 긍정했다.

“네, 믿어요, 레오나드. 오라버니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레오나드가 함께 있어주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부디 알렌사 국과 왕실을 위해 많은 도움 부탁 드려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공주께서 계신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공주님. 모시러 올 터이니 그때까지 편히 기도하고 계십시오.”

“네, 끝나고 아포테카리에서 엘마렐님을 도울 거니까요, 천천히 오세요.”

싱글벙글 웃으며 레오나드는 급히 말에 올랐다. 로첼리아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입 끝은 거의 귀에 걸릴 정도였다. 왕궁에 발 도장만 찍고 그대로 돌아올 기세로 그는 달려갔다.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지, 저 멀리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로첼리아가 신전으로 되돌아가려던 차였다.

“로첼리아 시스.”

익숙한 목소리에 로첼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반가움에 얼굴이 환해졌다.

“비앙카 티시스님.”

그녀는 급히 비앙카에게 다가갔다. 밝은 로첼리아와는 달리 비앙카는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세상에, 티시스님! 페른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마렐님은요? 다른 분들은 안녕하시고요?”

“전국의 신전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자리가 비어 인원이 필요하다고 전국의 신전에 연락이 왔었다. 여신님의 땅들이 타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지원했다. 다른 분들이야 물론 잘 계시겠지.”

비앙카는 날이 선 상태로 로첼리아의 몸을 훑었다. 그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널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젠 네게 옷차림 지적하는 것도 지치는구나. 도나크에서 떠나 사니까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냐? 게다가 아직 저 친척이라는 남자와 친하게 지낸다니,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비난조의 말에 로첼리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도나크의 마렐은 물론이고 엘마렐님까지 네가 속이고 있는 것을 난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지켜볼 것이야. 네가 여신의 길을 더럽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야.”

“네, 티시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대답에 비앙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입을 비틀어 올린 비앙카가 자리를 뜨자 로첼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가운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심장이 두근댔다. 자신도 모르게 난 용기로 대답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비앙카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게다가 카엔 공작의 방문을 그녀는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어린 시스들이 레오나드를 보고 비명을 질러 공작이 상처 입었던 일이 생각났다. 비앙카 티시스의 저런 반응을 봤다면 또 마음을 다쳤겠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레오나드에게는 미안하지만 당분간 신전에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전해야 겠어. 여신님의 말씀은…따로 같이 나누는 게 좋겠지. 그가 아쉬워 할 테니까.’

로첼리아는 시도니와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공작이 보내온 사람에게는 공주가 먼저 궁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도록 했고, 그녀는 무거워진 마음을 뒤로하고 엘렌을 만나러 갔다. 왕세자비는 아이를 위하여 화려한 수를 놓고 있었다. 황금실로 놓인 여섯 송이의 백합은 곧이라도 활짝 필 것 같았다.

“로첼리아, 왔어요?”

“네, 왕세자비님. 몸은 괜찮으세요?”

“그럼요, 로첼리아가 챙겨준 약과 향초 덕분에 편안하게 쉬고 있는 걸요. 역시 고테베르다 여신의 최상급 약초는 뭔가 다른가 봐요.”

“왕세자비님 몸에 맞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엘렌은 로첼리아가 임신 사실을 알려준 이후부터 종종 그녀를 불러 함께 하곤 했다. 로첼리아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것이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같이 정원 산책이라도 할까요?”

**

트리스탄은 해상 제국 협약서에 대한 보고를 마친 직후였다. 베르트와의 대화는 흥미로웠지만, 그와 왕세자가 모두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지는 못했다. 그의 보고 바로 뒤는 카엔공작이었다. 서류들을 잔뜩 준비해온 자신과 달리, 카엔 공작은 빈손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애초에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카엔 공작이 자신과 똑같은 업무를 하게 된 것이 트리스탄은 못마땅했다. 게다가 근거도 없이 레오나드의 뭔가 이긴 듯한 얼굴이 불쾌했다. 지친 몸으로 복도를 지나던 그는 맞은편에서 오는 두 여인과 마주쳤다.

“엘렌 왕세자비님, 로첼리아 공주님.”

그가 예를 올린 후 왕세자비와 공주의 손등에 한번 씩 입술을 대었다. 엘렌은 밝게 웃었다.

“더베른 후시군요. 전에 파티 때 보고 두 번째지요.”

“예, 왕세자비님.”

이제는 배가 불러오는 왕세자비는 배를 한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정원으로 가시는 길이라면, 제가 에스코트 해드려도 될지요.”

“물론이에요, 더베른 후.”

그는 왕세자비를 인도하여 정원으로 향했다.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오는 로첼리아 공주가 신경 쓰여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도, 그는 이내 왕세자비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데 집중했다. 지금 그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왕세자라도 같은 침대를 쓰는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는 왕세자 뿐 아니라 왕세자비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겨야 했다.

늦가을의 찬바람을 피해 온실 안으로 들어오니 따스함이 그들을 반겼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후께서 도와주셨으니,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바쁘지 않다면 티타임을 갖는 건 어떨까요? 잔을 하나 더 준비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왕세자비님. 기꺼이.”

차가 준비 되고 셋은 온실에 마련된 자리에 둘러앉았다.

“그런데 후작, 무척 피곤해 보여요.”

엘렌의 말에 로첼리아는 걱정하는 눈으로 트리스탄을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눈가에 피곤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갈렌드 국에서 돌아온 이래로 최근 여러 업무 일정이 겹쳐서…곧 끝날 것인데, 괜한 일로 왕세자비와 공주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낯빛이 너무 어두운걸요.”

“로첼리아의 말이 맞아요. 여독이 아직 안 풀렸는데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지. 왕세자께서 후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왕세자비님.”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계셨다고 하던데…너무 무리하시면 안될텐데요.”

걱정이 가득 담긴 로첼리아의 물음에 트리스탄은 옅게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에 약속하신 필사는 안하셔도 되어요, 제가 다 하면 되니까요.”

“아닙니다, 제가 하기로 한 것은 마무리 짓겠습니다.”

실은 그를 만나면 정말로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는 듯 굳건한 대답에 로첼리아는 더 이상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아, 로첼리아, 그 때 제게 주었던 것, 기억나나요?”

“네, 왕세자비님.”

“그걸 더베른 후께도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엘렌의 제안에 로첼리아가 트리스탄과 눈을 마주했다. 공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불쾌하지 않는다면 저희 고테베르다 신전에서 자주 이용하는 약이 조금 있는데…드려도 괜찮을까요?”

“내가 써봐서 알아요. 로첼리아 특제의 약은 효과가 얼마나 좋은데요.”

곁에서 엘렌이 거들었다. 안 그래도 기회만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추천을 해주고 있던 그녀였다.

“왕세자비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으니, 염치불구하고 공주님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트리스탄이 부탁하자 로첼리아가 안도하며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시도니, 혹시 도와줄 수 있어요?”

“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공주의 데임은 명에 따라 바로 움직였다. 셋은 살랑거리는 바람이 부는 정원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 남편 때문에 카엔 공작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어쩌지요? 로첼리아 공주와 만나는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회의를 끝마쳐주지 않으면 엄청 심통이 난 얼굴이 된다던데요, 호호호.”

“그, 그럴 리가요.”

“정말이랍니다, 오후 내내 공주를 못 만나면 그 책임은 어찌 질 거냐며 가만있지 않을거라며 매번 으름장을 놓는다더군요. 남편은 그렇게 화를 내는 공작이 신선하다고까지 말하기도 했고요. 더 골려주고 싶다고 하던데요 호호. 어쩜 공작은 그리도 우리 공주님께 헌신적인지. 내가 다 뿌듯하네요.”

로첼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엘렌의 짓궂은 농담은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공작 때문에 공주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확실히, 예전에는 혼자가 편했는데-공작이 없으면…때때로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해.’

로첼리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엘렌의 입을 통해 들으니 어쩐지 더 부끄러워졌다.

“로첼리아는 공작과 결혼할 것이지요?”

“예, 예?”

화들짝 놀란 로첼리아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엘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에요? 이제 연인이 된지 거의 8, 9개월이 다 되어가니…혼인 이야기가 나올 법 한데, 둘 사이에서는 그런 조짐이 안보여서요. 뭔가 이유가 있나요?”

궁금하다는 듯 트리스탄의 시선도 공주를 향했다. 로첼리아는 양손을 크게 내저었다.

“아, 그, 그러니까, 아직 서로를 다 알지 못했고, 혼인이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니 신중히,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아직 제가 고테베르다 여신님의 시스이기도 하고…요.”

“하긴, 18세가 될 때까지 결정할 수 있으니 아직 시간은 있군요. 그리고 혼인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도 공감해요. 난 로첼리아의 선택이 어떠하든 응원할 테니까요. 하지만 너무 카엔 공작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될 텐데 말예요? 대답은 빠르게, 그리고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 좋아요, 로첼리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로첼리아는 불안감을 느꼈다. 카엔 공작이-자신의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그는 단 한 번도 청혼한 적도 없다. 아니, 일단 진짜 연인이 아니기에 그럴 일이 없지. 그런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분명 로첼리아와 레오나드의 실제 관계를 모르는 엘렌의 지레짐작에서 나온 말일 것이라 로첼리아는 생각했다. 엘렌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요즘 후의 어머니께서도 좋은 여인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더베른 후도 혼인을 생각 중인 것이지요?”

트리스탄이 로첼리아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녹안이 저를 왜 빤히 보는지 모르는 로첼리아는 마주친 눈에 생긋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트리스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왕세자비를 향했다.

“예, 조만간, 할 생각입니다.”

“어머니신 후작부인께서 걱정이 많으시더라고요. 이렇게 멋진 아드님을 두었으니, 누가 차기 후작부인이 되더라도 부담이 될 텐데. 제가 여동생이라도 있었더라면 분명 후작을 소개시켜 주었을 거예요.”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왕세자비님.”

“그럼 어떤 여인이 좋아요? 내 주위에 있는 혼기 찬 영애들이 많으니 찾아봐 줄게요.”

열정적인 엘렌이 오랜만에 흥미진진해 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저와 비전을 같이 하고 함께 더베른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여인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혜롭고 성실하며 신의로 함께 할 수 있는 여인 말입니다.”

왜 그런데 자신을 향하는 것일까, 다른 여자가 이 자리에 없어서? 로첼리아는 그의 눈이 마치 자신의 얼굴을 꿰뚫을 듯 날카롭게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살짝 눈을 돌려 피하는 것으로 불편함을 대신했다.

“취향인 외모는요?”

“상관없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자신 있는 외양을 갖춘 것은 아닌지라 상대방께도 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나, 그건 거짓말. 더베른 후가 얼마나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는지 본인이 모른다고 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남녀간의 ‘신뢰관계’가 더 로맨틱해 보이기도 하네요! 하긴, 후작의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였다 하는데, 후작도 그런 뜻이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신선하네요! 그래요, 나도 찾아볼게요. 그러고 보니 마트린 후작가의 코르넬 양은 어때요? 어쩐지 상단도 운영하고 있으니 대화거리도 많을 것 같은데요.”

“마침 코르넬 영애는 한번 만나 뵐 일이 있었습니다. 무척 지혜롭고도 아름다우신 분이더군요.”

로첼리아는 기억 속에서 코르넬 양을 기억해 냈다.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인이었다.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공주님.”

시도니가 작은 나무상자를 가져왔다. 로첼리아는 감사의 말을 하고는 뚜껑을 열었다. 작은 병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로첼리아는 진한 녹색 알약이 가득 든 병을 꺼냈다.

“이건 약이에요. 조금 드시고 잠들면 숙면을 취하실 수 있을 거예요. 신전을 방문하는 아픈 분들을 위해 쓰는 약이라 맛이 좋지는 않지만요. 엘마렐께서 직접 제조하신 것이니 분명 좋을 거예요.”

병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트리스탄은 받아든 물건을 보고는 싱긋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그리고,”

로첼리아는 두 번째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시원한 향이 퍼졌다.

“이게 정말 좋아요. 제가 효과는 보증하지요. 덕분에 두통 없이 푹 잘 수 있었거든요.”

엘렌이 흥분해서 말했다. 트리스탄은 상자에서 작은 병을 꺼내는 하얀 손을 지켜보았다.

“이렇게…목이나 손목에 한두 방울만 떨어뜨리면 됩니다.”

새하얀 목덜미에 톡, 액체가 묻어났다. 트리스탄의 눈이 공주의 귀와 목선을 훑었다. 물방울이 가느다란 목에 긴 줄을 그리며 내려갔다. 그때였다. 목 줄기에 낮선 손길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니 트리스탄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챙그랑! 병이 바닥에 떨어져 파열음을 냈다. 방 안 가득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넘쳤다.

“아, 그, 그게, 흘러서 드레스가 더러워질까 싶…죄송합니다.”

그는 공중에서 멈춰 있는 손도 거두지 못한 채 횡설수설했다. 그의 손끝에는 오일 한 방울이 묻어 있었다. 로첼리아는 손으로 목을 가리며 떠듬떠듬 말했다.

“아, 네, 괘, 괜찮아요.”

얼른 바닥에 떨어진 파편들을 주우려는 손을 트리스탄이 막아냈다. 로첼리아가 놀랄 새도 없이 그의 커다란 손이 얼른 도망치듯 떨어져 나갔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공주님. 다치십니다. 부디 멀리 떨어져 계십시오.”

‘어머, 어머, 어머머머.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이게? 그런 건…설마 아니겠지?’

엘렌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트리스탄을 향해 있었다. 그는 얼굴조차 들지 못한 채 병조각을 손으로 치우고 있었다. 로첼리아 뿐 아니라 시도니 마저 다가오지 못하게 한 채 말이다. 푹 숙인 얼굴에서는 오직 빨갛게 달아오른 귀만 보였다. 엘렌은 부채를 부치며 속으로 꺅꺅 소리쳤다. 아무래도 남편에게 오늘 밤 이야기 할 것이 많게 될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마지막으로 1편 더 올릴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선추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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