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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조
"뭐, 뭐?"
후작부인은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트리스탄이 재빠르게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크게 다쳤을 것이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아들에게 물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로첼…리아 공주라니. 설마 세 번째 공주를 말하는 것이냐?"
"예, 맞습니다, 어머니."
"아니 왜…진심이냐, 아들아?"
후작부인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로첼리아 공주는 그녀의 리스트에도 없던 존재였다. 따로 조사를 해본 적은 없지만 가문도 가문이거니와, 자신의 뒤를 이어 후작가의 안주인으로서는 적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공주는 네가 원하던 함께 비전을 꿈꾸는 여인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건 함께 배워나가면 됩니다.”
“게다가 몸도 좋아 보이지 않던데. 건강이 나빠 신전으로 보내졌을 정도라고 하니…너는 함께 상단일도 할 수 있는 여인을 원치 않았니.”
조심스런 질문에 트리스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건강은 미리 관리하면 됩니다. 저희 후작가가 그렇게 부족하지 않지 않습니까. 게다가 공주께서 약재에 능하다 하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나-고집이 셌던가. 후작부인은 처음으로 아들의 단단한 마음을 확인했다.
“고테베르다교는 순결을 중시한다는데…아이를 못 낳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혼인한 여인이 설마 관계를 거부하겠습니까? 즉 혼인을 하기 전까지 마음을 되돌리면 됩니다. 따로 순결 서약을 하진 않았다 들었으니, 아직 공주의 확고한 의사는 모르는 법이지요.”
후작부인은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를 꺼냈다.
“게다가 그 유명한 카엔 공작의 여인이 아니냐.”
“그것은,”
트리스탄 입술 비틀면서 대답했다.
“아직 혼인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렇다면 바뀔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소문이 이미 자자한데, 곧 혼인할 것이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공주께서는 공을 아직 잘 알지 못하고 그에 따라 혼인에도 신중할 것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공작과의 혼인은 확정된 것도 아니니, 아직 고려할 문제는 아닙니다.”
“트리스탄, 얘야.”
리즐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가 왜…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분명 네겐 원하는 꿈이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공주는…로첼리아 공주는 너와…어울리지 않아. 너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여인이 아니란다. 그런데 어째서-”
트리스탄은 두 손으로 리즐리의 양 어깨를 감싸 쥐었다. 전보다 더 마른 것이 그녀의 평생의 고뇌를 아들에게 알려주었다. 트리스탄은 따스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공주는 우리 가문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왕족을 등에 업는 것만큼 가문에 득이 되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상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부와 권력을 모두 얻은 가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가 꿈꿔온 더베른가의 부흥은, 일개 가문과의 혼인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어머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마디씩 말하면서 그는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다. 지난날 마트린 가의 영애에게서는 받을 수 없었던 확신이 그를 지배했다.
‘그래, 공주와의 혼인이 필요했어. 그거다.’
“정말…그 뿐인게냐?”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트리스탄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선택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절 믿어 주십시오, 어머니. 가문을 위해,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다음날 트리스탄은 바로 왕궁을 향했다. 어머니인 리즐리는 어제의 충격으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고, 덕분에 어제의 일들은 병상에 누워 있는 선대 후작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부모의 뜻을 어긴 적 없던 그였다. 양친이 모두 힘들어 하거나 싫어할 이 결정을 했음에도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리고 오늘은 공주를 만날 예정이었다. 어머니께 부탁해 미래의 아내를 위해 준비해 둔 반지 또한 마련했다. 마음을 정하였을 때 빠르게 실행하는 것은 그의 특징 중 하나였다.
여인의 하얀 목이, 그리고 고맙다 웃어주는 그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며칠 간 공주가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공주는, 우리 가문에 필요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왕실의 인척이 된다는 것, 그것만큼 가문을 위한 일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생각이 났던 것이었어. 공주야 말로 적임자다.’
한참 말을 달리던 그는 고삐를 잡아당겨 멈춰 세우고야 말았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으로부터-그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
"와아아! 정말 예뻐요!"
로첼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왕궁에서 빠져나와 있는 올렌 숲에서 공주는 환하게 웃었다. 꽃밭사이로 걸어 나가는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레오나드는 적이 안심했다. 최근 공주는 무척이나 기운 없어 했다. 레오나드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후식도, 정원의 꽃들도 그녀를 웃게 하지 못했다. 레오나드는 고심 끝에 그녀를 왕궁 밖으로 데려왔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컹!"
셔벳이 꼬리를 치며 공주의 뒤를 따라가 드레스 자락을 이로 물어 잡아당겼다. 로첼리아는 그런 셔벳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자꾸 공주에게 매달리는 셔벳을 보다 못한 레오나드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셔벳, 이리 와."
셔벳은 눈치를 보다 컹컹 짖으며 레오나드에게 달려왔다. 레오나드는 몸을 숙여 셔벳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혀를 길게 내민 셔벳이 헐떡거렸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순진한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였다. 분명 레오나드가 평소처럼 막대기라도 던져 줄까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이번기회에 버릇을 단단히 고치기로 했다.
“너. 그러지 말라고 말했지?”
그는 무섭게 눈을 떴다. 그를 올려다보던 까만 눈동자가 슬프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봐주지 않았다.
“어제도 공주께 그랬지 않나. 잘못하면 공주님께 드린 드레스가 상할 뻔했단 말이다. 게다가 공주께서 네놈의 거친 행위와 무게를 견뎌내실 수 있다고 생각되느냐? 공주님은 무척이나 연약한 몸이란 말이다. 나도 부드럽게 손을 대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네놈이 감히."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느꼈는지, 열매처럼 동그란 눈동자가 또르르 굴렀다.
“어딜 눈을 피하고 그래? 어제 공주님을 네놈이 거칠게 쓰러뜨린 거, 내가 잊어버린 줄 알았나?이 요망한 것.”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의 턱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 진짜 주인이 지켜보는데도 그딴 짓을 해? 네놈이 아주 배가 불렀구나. 감히 내 명을 거역하다니. 널 그 전쟁터에서 구해내 온 것은 바로 이 몸이란 말이다. 네놈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다는 걸 잊었느냐?"
혼이 나는 걸 알긴 아는지 까만 눈동자가 그를 직접 바라보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했다.
“나 아직 용서한 거 아니다. 공주께서 널 많이 아끼시고 네놈이 있으니 많이 웃으셔서 지금은 너른 마음으로 네놈의 행동들을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주께 뽀뽀를 하는 것도, 공주를 덮치는 것도 금지다. 그건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제대로 듣고 있나?”
아직 제대로 그녀를 안아보지도 못한 그였다. 개보다도 자신이 진도가 낮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못할 터이니, 그 누구도 하면 안되었다.
"자, 앞으로는 내 명을 제대로 들을 것. 공주를 건드리지도, 덮치지도 말 것. 알겠느냐?"
멍!
대답처럼 셔벳이 크게 짖다가 그를 지나쳐 내달렸다. 레오나드가 급히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셔벳은 자신이 인정한 여주인에게 그대로 달려가 컹컹 짖으며 매달린 것이었다.
"꺄아! 셔벳! 꺄, 간지러어. 진정해 셔벳. 응응, 알았어, 줄게 줄게. 꺄아아아!"
작은 몸이 자신의 반을 덮을 정도로 거대해진 셔벳에게 밀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이내 셔벳은 그녀의 얼굴을 혀로 핥으려고 덤벼들었다. 로첼리아의 작은 손이 간지러운 혀를 막고자 애를 썼다. 레오나드의 눈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셔벳의 두툼한 두 앞발이 보솜하게 오른 로첼리아의 가슴을 짓눌러, 도톰한 가슴이 움푹 패여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순결한 가슴이 아끼는 개에게 밟힌 것도 모른 채 로첼리아는 입술을 핥아대는 혀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아이, 간지러워, 셔벳. 흐응, 안 돼에, 셔어베엣!"
순간 그녀를 묵직하게 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켕켕거리는 셔벳을 번쩍 들어 안은 레오나드가 다시 로첼리아에게 달려들려는 셔벳의 눈앞에서 천으로 만든 공을 꺼내들었다. 순간 셔벳의 눈이 번뜩였다. 레오나드가 있는 힘껏 던지자, 셔벳은 신나게 공을 쫓았다. 레오나드는 곧장 풀밭에 누워있는 로첼리아를 일으켜 주었다. 그의 눈이 깊게 어두워진 것 같아, 로첼리아는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안 좋아요, 레오나드.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닙니다, 공주님. 별 일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은 강아지로 드릴 걸 그랬다, 레오나드는 부글부글 끓는 질투로 피가 마를 정도였다. 셔벳을 전쟁터에서 데려왔을 당시에는 레오나드의 손바닥 안에서 부들부들 떨 정도로 작은 강아지였다. 로첼리아의 품안에 폭 안길 정도로 작았던 것이 어느 새 공주만큼이나 거대해졌다. 새끼였을 때부터 그렇게 공주를 핥고 매달리더니 그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 저 큰 덩치로 공주를 매번 덮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렇게도 예뻐하는 셔벳을 어떻게 하기도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셔벳을 곁에 두고 난 뒤부터 공주가 웃는 일이 더 많아졌고, 행복해했기 때문이었다.
"공주께서 행복하시다니 다행입니다만…역시나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공주의 애견이 저렇게 주인에게 버릇없이 행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공주님을 지키라고 곁에 두시게 한 것인데, 오히려 공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까지 되다니요."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걸요. 정말인데."
"그럼 제가 데려가서 전문 담당자를 통해 교육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적적하지 않으시도록 다른 작은 강아지를 구해 오겠습니다. 공주께서도 가볍게 들어 안을 수 있도록 파피용 종이나 푸들 종은 어떨까요. 아니면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한다는 페르시안 고양이는 어떨까요."
컹!
그때였다. 입에 물고 있던 공을 레오나드의 손에 올려놓은 셔벳이 크게 짖고는 둘 사이를 파고들어 이리저리 뛰었다. 말이 끊겨서 불쾌해진 레오나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로첼리아는 자신에게 달려들어 헥헥거리는 셔벳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공을 쥔 레오나드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번에는 입술까지 깨물면서 아까의 배로 힘차게 던졌다, 그것도 일부러 언덕 쪽으로 말이다. 공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셔벗은 신이 나서 내달려갔다. 적어도 한동안은 다시 방해받을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하며 힘을 주어서 일그러졌던 얼굴을 다시 펴고는 레오나드는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로 로첼리아를 향했다.
"그래서 제 제안은 어떠신지요."
"아녜요. 전 셔벳이 제일 좋아요. 다른 강아지와는 바꾸지 않을래요."
웬만한 일에는 레오나드의 말에 눌려 따르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완강히 거부했다. 거절감에 레오나드는 잠시 당황했다.
"셔벳이 맘에 드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실은…"
부끄러운 듯 말을 흐리자 레오나드는 진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답을 재촉했다.
"…닮았단 말예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레오나드랑 셔벳…닮아 보이는걸요."
레오나드의 반응이 나오기도 전, 로첼리아는 양손을 크게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게 레오나드가 개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셔벳의 털이 꼭 레오나드의 예쁜 머리카락이랑 비슷…그러니까 레오나드의 머리가 막 거칠어 보인다는 게 아니라! 셔벳의 털이 정말 부드럽거든요. 근데 레오나드는 셔벳보다 몇 백배는 더 예쁜 금발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래서…"
빨개진 얼굴 앞으로 레오나드가 무릎을 숙이고 고개를 가까이 했다.
"만져보십시오, 공주님."
"예?"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 머리카락이 겨우 셔벳의 털과 비교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군요. 제대로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제 머리카락이 셔벳보다 더 좋은 것은 확실하니까요."
"하지만…꺄."
작게 비명을 지른 것은, 로첼리아의 가는 팔목을 레오나드가 붙잡아 자신의 머리 쪽으로 손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로첼리아의 손끝에 닿는 부드러움에 놀라워하며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정말 너무 부드러워요! 어쩜!"
로첼리아는 감격한 듯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톡톡 건드렸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그의 백금발은 보석을 뿌린 듯 반짝였다. 항상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드디어 손에 대어본 로첼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레오나드는 머리끝까지 느껴지는 짜릿함에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 마치 머리카락 끝에도 촉각이 있는 듯, 그 섬세한 손길이 그를 번개 맞은 듯 떨리게 했다. 머리칼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어 두피에 닿는다. 그 살랑거림이 저릿저릿해질 만큼 좋았다. 이대로 계속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 깊숙이 파고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표정에 욕망이 드러날까 싶어 그는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더 만져주셔도 됩니다. 이렇게."
그녀의 작은 손짓이 감질나, 그는 로첼리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젠 그만해도 되는…"
"공주께서 만져주시니 어쩐지 기분이 좋군요. 이래서 셔벳이 공주께 그렇게 귀염을 부리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공주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셔벳과의 애교경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먼저 공을 잡아오나를 시합해도 좋겠군요. 그러면 이렇게 잘했다고 쓰다듬어 주실 겁니까?"
"아, 정말, 레오나…!"
컹컹!
벌써 달려온 셔벳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레오나드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으악! 레오나드가 균형을 잃으며 로첼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풀밭이 들썩이고, 나비를 쫓아간 셔벳이 떠나간 뒤에야 겨우 로첼리아는 눈을 떴다. 풀밭에 뉘여진 자신의 위에 느껴지는 묵직함 때문이었다.
서로의 코가 거의 닿을 만큼 가까웠다. 레오나드의 가슴 아래 느껴지는 그녀는 부드럽고 풍성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아래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녀의 가슴과 닿기까지 했다. 얇은 두 겹의 옷의 살 떨릴 지경이었다. 이 옷만 벗겨내면 그 말캉한 살에 바로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자극이 너무 강했다. 예상치 못하게 닿은 그녀의 몸이 상상한 이상으로 그를 녹이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입술은 피보다 붉…피?
"레, 레오나드!"
레오나드는 황급히 손으로 자신의 코를 가렸지만, 흘러내리는 피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의 코에서 떨어진 핏줄기가 로첼리아의 입술에도 톡 떨어졌던 것이었다. 그는 나머지 한손으로 얼른 자신의 피를 그녀의 입술에서 닦아냈고, 곧이어 로첼리아가 내민 새하얀 레이스 손수건은 붉게 피로 물들었다.
"어떡해요, 레오나드. 혹시 아까 셔벳 때문에 다친 거 아니에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안되겠어요, 레오나드 말이 맞았어요. 셔벳이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게 교육을 시켜야겠어요. 아, 정말 어떡해요, 이건 셔벳을 너무 풀어놓은 내 잘못이에요! 레오나드. 많이 아파요? 사람을 불러올까요?"
로첼리아의 굳은 결심이 고마운 것이긴 했지만, 지금 이 사태는 정말로 원치 않는 구도였다. 꼴사납게 코피가 뭐란 말인가! 하필이면 공주님 앞에서! 매순간마다 멋져 보여야 할 판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걱정해주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도 의외로 짜릿했다. 몸에 닿은 것만큼의 자극은 되지 않았지만 공주가 걱정하며 피를 닦아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로첼리아는 피를 닦아주며 겨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까 레오나드에게 밀려 넘어졌을 때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래서 아까 레오나드가 위험하다고 했던 것일까. 눌린다는 것은 심장에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셔벳이 달려들어도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심장이 터질듯 쿵쿵 뛰어서, 그에게까지 들릴까봐 조마조마했다. 게다가 가까워진 공작의 얼굴이 너무도 조각 같아 숨이 멎는 듯 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밀려 뒤로 넘어진 게 자신의 심장에 뭔가 무리를 안겨준 것 같았다.
"레오나드, 괜찮아요? 아직 피가 많이 나나요?"
"음…아직은 그렇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줘야 할까요. 역시 의원을…"
"아뇨, 곁에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이렇게요.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확실한 치료책이 있는데…"
"뭐 말인가요?"
그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듯한 눈빛에, 레오나드는 속으로 신나면서도 짐짓 진지하게 대답했다.
"공주께서 제게 무릎베개를 해 주시면 다 나을 것 같습니다만."
로첼리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정말, 레오나드는 항상 이상한 이야기만 해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언제 그랬단 말씀이십니까? 타발론전에서 고테베르다 여신께서 죽어가는 청년을 무릎에 뉘이고는 입을 맞춰줌으로써 죽음에서 구원한 일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이는 아픈 이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공주께서 얼마나 저의 치유를 바라는지, 이 자리에서 시험해 보아도 될까요."
"아이, 정마알! 레오나드, 장난치지 말아요. 나는 여신님이 아니에요. 여신님처럼 치유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닌걸요."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토닥이며 밀어내려 하자, 레오나드는 남은 다른 손으로 로첼리아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농담입니다, 공주님. 이미 피는 다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작게 속삭였다. 평소보다 낮고 은근한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공주님. 예전에 만난 더베른 후작은...어떠십니까?”
“어떤 의미에서요?”
“그러니까...아무래도 남성이다 보니 불편하시다면 더 이상 공주님께 접근치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과 같이 말입니다.”
로첼리아의 얼굴에 순간 떠오른 미소에 레오나드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후후. 실은 저도 참 이상하게 생각한 일이긴 한데요, 더베른 후는 덜 무서워요. 오히려...재미 있어요.”
“....예?”
레오나드는 한 대 맞은 듯 품안의 공주를 바라보았다. 재미, 있다고? 다른 남자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더베른 후는 분명 이지적이고 냉철하다고 들었는데, 자꾸 뭔가 쏟거나 넘어뜨리거나 해서 긴장이 풀려버리는 거 있죠. 그러다 보니...도나크의 고아원 아이들도 생각나서요.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공주께서는 남자들이 무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는데-제 앞에 있는 분 덕분에 많이 극복했는걸요.”
“네?”
“레오나드가 제게 알려주었잖아요. 모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준 것이, 레오나드인데...”
공주의 두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레오나드의 심장이 쿵 쿵 뛰었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말한 것이겠지만, 그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더 이상-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 이 아닌가. 다른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진 것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다른 걸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쿵 쿵 쿵. 레오나드의 손이 조심스럽게 공주의 턱을 덧그렸다. 의아한 듯 물빛 눈동자가 올려다본다. 아 저 고운 입술이 사랑스럽다. 레오나드의 숨이 공주의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으르르르 왕왕!
갑자기 셔벳이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 정말 저 개가! 오늘 정녕 제삿날이 되고 싶은 건가! 레오나드는 좋은 분위기를 다 깨버린 셔벳에게 속으로 할 말 못할 말을 다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셔벳이 짖어대는 언덕 위를 올려다보고는 차게 식었다. 은발의 냉한 표정을 지은 트리스탄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경멸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악몽의 원흉이 바로 저기 있다, 레오나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트리스탄이 그들을 잠시 노려보다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로첼리아를 품에 감싸 안고는 놔주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blaustern입니다.
강아지에게도 무관용원칙을 준수하지만 동물학대범은 아닙니다....
변태긴 하지만 그리 나쁜 놈은 아니에요. 진짜진짜루! ㅋㅋ
선추코 늘 감사합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