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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별장
고요했던 렌베르성의 아침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계절이 바뀔 때만 가구의 천을 색을 맞추어 교체하고, 먼지가 없도록 청소하는 정도였다. 허나 평온했던 겨울별장은 주인이 아름다운 공주를 모시고 온 뒤로 바뀌었다. 화려한 성은 매일 새로운 꽃과 실크 장식으로 꾸며졌다. 공작은 공주의 기분부터 식사, 하루의 휴식시간까지 모든 것을 보고 받고 그 다음 일을 명령했으며, 조금의 실수나 착오가 없도록 했다. 성의 구성원 모두가 오직 공주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며 움직였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공주는 까다롭지 않았고, 쉽게 만족해했고, 칭찬을 잘했다.
아침이 되자 공주를 전담하게 된 베키는 문 앞에 서서 어제처럼 아주 작게 노크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공주의 옷이며 씻는 것을 돕기 위함이었다.
“공주님, 잠시 들어가…”
시녀는 그대로 굳었다. 분명 침대 위에…누군가 더 있었다. 그때였다. 손 하나가 문을 얼른 닫았다.
“보았습니까?”
“아, 저, 저는…”
시도니의 눈이 가늘어지자 베키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네, 어서 가세요. 오늘 아침엔 제가 있겠습니다. 두 분을 위해 중요한 일이니, 부디 이 사실은 비밀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무, 물론입니다!”
베키가 급히 나간 후 시도니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야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될 텐데.’
어느 쪽이 공주를 위해 더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모시는 공주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조건을 갖춰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 공작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일은 좀 곤란하다. 시도니는 벽 뒤에서 괜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자신을 향해 멋쩍게 손을 흔드는 공주의 친구를 노려보았다. 여하튼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밖에서 이런 소란이 있는 줄도 모르고 공주의 방안은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햇살은 커튼의 틈을 타고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작은 노크소리는 그 고요한 방의 침묵을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으응…”
갈증을 느낀 로첼리아가 힘겹게 눈을 떴다. 떠듬떠듬 감았다 뜨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셔츠?’
침대 밖으로 쳐진 캐노피가 보여야 할 텐데 하얀 천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천 사이로 갈라져 속살이 눈에 들어왔다. 모로 누워있는 공주는 이게 대체 무언가- 한참을 생각했다. 셔츠 안에는 꽤 탄탄해 보이는 근육이 있었다.
‘남자 가슴…어? 남자?’
그 순간 정신이 확 든 공주는 눈을 크게 떴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넓은 가슴 위에는 곧게 뻗은 쇄골이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조금씩 눈을 위로 향했다. 굵고 긴 목을 지나 매끈한 턱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큰 입술, 곧은 콧날과 남자치고 길게 뻗은 속눈썹과 가지런히 잘 정돈된 눈썹, 이마위로 흘러내린 백 금발. 분명 익숙하고 로첼리아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잠자고 있는 사람을 빤히 보고 있다는 걸 느낀 로첼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꽁꽁 싸맸던 드레스 끈들이 느슨하게 풀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걸 보고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이, 이게…뭐야. 내가…설마…’
“음…공주님, 일어나셨습니까?”
상황판단을 하는 공주의 머리 위로 레오나드의 숨결이 닿았다.
“나, 나…어제! 저기…그러니까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호, 혹시 기억을 해야만 하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우리?”
물론 전혀 없었습니다. 라는 대답이 바로 나와야하는데 레오나드는 공주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공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자 공작은 웃으며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셔츠를 꽉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손을 놓았지만,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셔츠가 잔뜩 구겨져있었다.
“어, 어…이, 이게…”
“죄송합니다. 어제 잠이 드신 공주님을 이 방으로 모시고 왔습니다만, 공주님께서 저를 놔주시지 않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깨어 있는다는 것이, 그만 새벽에 잠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군요.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레오나드의 산뜻한 사과와 달리, 로첼리아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다. 도저히 맨 정신에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 공주는 몸을 돌려 누웠다. 무슨 일이 없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그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 그녀를 깊은 충격에 빠뜨린 것이다.
‘나 어떡해, 정말!’
“공주님.”
“…네?”
레오나드가 한 팔을 공주 앞으로 짚으며 다가왔다. 로첼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답했다. 빨개진 공주의 귓가에 레오나드의 입술이 다가왔다.
“공주님은 앞으로 술은 절대 금지입니다.”
성 한쪽에 있는 작은 예배당 안, 오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영롱했다. 그 빛 가운데 무릎을 꿇고 양 손을 곱게 모은 채 기도하고 있는 것은 로첼리아였다. 새하얀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징하다, 징해. 너도 정말 대단하다, 로첼리아.”
그런 고요한 기도시간을 깬 것은 이베트였다. 그녀는 로첼리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기도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당하고도 여신님께 기도할 정신이 있어?”
“날 잘못 대한 것은 비앙카 티시스인걸. 여신님이 아니고.”
“그래, 그렇긴 하지. 난 비앙카한테 맞았을 때 여신님에 대한 신앙이고 뭐고 다 싫어서 죽겠던데.”
이베트는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로첼리아는 친구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래도 이베트도 결국은 여신님이 싫은 건 아니잖아.”
“그거야 뭐…하도 오랫동안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맘대로 버려지진 않긴 하더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베트는 로첼리아를 끌어 마주 보게 앉게 했다.
“로첼리아, 어젯밤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 전혀?”
“응, 정말로 레오나드는 내가 깰까봐 나가지 못했던 거래.”
방안의 상태나, 친구의 평온한 상태를 봐서는 예상한 일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뭐 하나라도 걸려라-하는 마음으로 캐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허탈해졌다.
“너의 공작님은 정말이지…존경스럽다고 해야 하나…하도 패기 있게 널 데려가 길래 난 변화된 너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막 공작이랑 확 이렇게 되어 버려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거지!”
“그만해, 놀리지 마. 이베트으!”
“아이고, 우리 로첼리아가 어제 얼마나 귀여웠는데! 레오나드라앙~ 이베트라앙~세명 씩이야아앙! 아주 귀여워서 읍, 읍.”
이베트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며 술 취한 발음을 그대로 따라했다.
“마, 말하지 마, 정말 미워 할 거야, 이베트!”
“아, 알았어, 알았어. 아무 말도 안할게! 근데,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나?”
로첼리아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잠결에 들은 그의 목소리의 파편을 조금은 기억해 냈다.
-저는 당신의 ‘아베르랑드’ 아닙니까.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실 때까지 지켜드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나의 ‘아베르랑드.’ 그렇게 말한 그가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을 할 리 없다. 로첼리아는 열기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어, 어. 너 왜 그래, 로첼리아. 뭐야, 진짜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모, 몰라. 이베트한테는 말 안할 거야!”
“야, 진짜 너 그럴 거야?”
공주는 이베트와 있을 때는 평범한 17세 소녀로 돌아갔다. 행복했고 즐거웠다. 이런 날들이 계속 되길 바랐지만 이베트는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났다. ‘공주와 공작의 모습을 보니 간질거려서 도저히 못 있겠다. 나도 내 남편이 보고 싶다. 나도 신혼이다’ 말하는 친구를 계속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대신 로첼리아가 듀란으로 가거나 이베트가 또 놀러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원래 여행의 목적이었던 이베트도 만났으니 이제 페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공주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레오나드는 몇 주간 더 머무르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해왔다.
“실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이곳에 있습니다. 공주님 혼자 페른으로 보내드리기에는 제가 불안합니다. 그러니 업무를 마친 후에 함께 움직이시는 건 어떨지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겠습니다.”
“레오나드, 실은…”
그녀는 머뭇거렸다.
“레오나드가 너무 급히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레오나드가 싫지만 않다면 내 생일까지만,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요?”
공주는 작년 생일 즈음, 자클란 대공과 잘못 엮일 뻔했었다. 분명 그때의 나쁜 기억이 남아있는 듯했다. 이번에도 페른으로 돌아가면 또 혼인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강제적인 혼약은 선물이 아니었다. 레오나드는 그 대답이 내심 반가웠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때까지, 언제든 계셔도 괜찮습니다. 편히 머무십시오.”
렌베르에서의 시간들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공주는 빠르게 카엔 공작 저에서의 삶에 적응했다. 삼일 만에 공작 저에 있는 마흔 명이 넘는 모든 시종과 시녀들의 이름을 외웠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데 얼굴이나 이름 하나 기억 못하면 안 되지 않느냐며 마음 쓴 결과였다. 겨울저택의 온실 속 식물들도 그녀의 손을 거쳐 무럭무럭 자랐다.
까탈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가가기엔 어려움이 있는 주인이 모시고 온 공주라 저택 내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로 공주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공주는 신전생활을 오래한 탓인지 신전에서 무척이나 검소하고 조용했다. 화려한 궁전 생활을 맛보고 나서 사치스러워 졌다는 말들도 있었으나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것이 단연코 헛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공주는 웬만한 일들은 스스로 처리하려고 해서 이것을 내버려둬야 하는지 그래도 공주이고 손님이니 모든 것을 다 해드려야 하는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곁에 있는 시도니가 정말로 가도 좋다고 시종들과 시녀들을 돌려보냈다. 돌아가면서도 찜찜한 기분에 의심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생각에 귀족들이란 대부분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고, 그에 따라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공주라 하니 더 그럴 것 이라 지레 짐작하였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모두들 금세 공주의 순진함과 진심을 파악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부탁조의 공손한 말투로 물어 와서 모두들 두 팔 걷고 도와주려했다. 몇몇 어린 시녀들은 빨리 공주가 공작부인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수다를 떨다가 고참 시녀에게 입조심 하라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주인인 공작은 공주가 하고 싶어 하는 건 뭐든지 하라고 말했지만 어린 공주의 행동은 항상 규칙적이었고 예상 가능범위에서 이루어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식사 전에 성 한쪽에 마련된 작은 예배당으로 가서 아침을 들기 전까지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그 예배당에는 항상 공작도 참석했고, 그 모습이 모두에겐 신기하기만 했다. 젊은 공작은 건강하고 튼튼한 남성이었으나 원래는 야행성인 사람이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법은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공주를 따라 이른 새벽에 기도하기 위해 예배당에 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공작과의 아침식사가 끝나면 공주는 아침부터 정원을 살폈다. 공작이 바쁘지 않다면(물론 공작은 만사를 제쳐두고 무조건 시간을 마련했다) 점심식사를 하였고, 해가 많이 내리쬐는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고 기도문을 읽었으며 가볍게 티타임을 가졌다. 친구인 이베트가 한차례 더 방문하여 며칠을 보내다 가기도 했다.
오후에는 셔벳과 산책하거나 놀아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원을 살폈다. 공작과 저녁식사를 한 후 공작과 공주는 꽤나 긴 대화를 나누었다. 몰래 문에 붙어 들어본 한 시녀의 말로는, 대화 내용은 별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은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식물이 자랐으며 어떤 책을 읽었는데 흥미로웠다는 등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듯 집중하여 들었고 공주가 내는 목소리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집중하면서도 적절하게 열렬한 반응을 해서 몰래 듣던 이들을 놀라게 했다.
남들의 눈에는 단조롭고 심심해 보였을 테지만 로첼리아는 그 삶을 만족해했다. 감정을 숨기는 일이 없는 순진한 얼굴에는 항상 따듯한 미소가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공작은 움직이던 깃펜을 멈췄다. 들어오라는 말에 문 뒤로 로첼리아의 갈색 머리카락이 보이더니 곧, 사랑스러운 두 눈과 레오나드가 마주쳤다. 레오의 얼굴을 본 공주의 눈매가 예쁘게 접혔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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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