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이야기를 끝마치기 전에 (2)
"가끔 생각하는 건데……오빠는 살짝 글러 먹은 것 같아요."
"……아마 서윤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할걸."
"뭐, 사귀기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지만."
괜찮은 거야?
"궁금할 때가 있거든요. 나랑 만나기 전엔 어떻게 살아있었는지."
"어떻게 살아있었냐고 한 거야 지금?"
"그렇게 말했는데요?"
어떻게 살아있었냐니, 생존 방식을 묻는 건가?
"그냥 뭐, 평범하게 보통으로 살았는데? 별로 특이할 것도 없고."
인스턴트와 배달음식. 혈관에 카페인이 흐르는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지.
"오빠 그렇게 계속 살았다간 분명 서른 전에 죽었을 거라니까요?"
"죽으면 뭐, 운명이겠거니 했겠지. 어쩌겠어."
"여자친구 앞에서 꼭 그렇게……"
"지금은 서윤이가 챙겨주니까 괜찮아."
연하에게 너무 어리광을 부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게 의외로 잘 먹히거든.
나와는 달리 꼼꼼하고, 똑부러지고, 계획적이고 사소한 것까지 잘 챙기고.
잔소리가 심하고 참견쟁이에……아무튼 뭐, 착한 아이라는 거다.
못 미더운 남자친구로 여겨지는 건 달갑진 않지만……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럼 나랑 헤어지면 평생 혼자겠네요?"
게다가, 이런 식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장을 다짐해두는 게 진짜로 귀엽거든.
"전에도 말했죠? 세상에 오빠 성격 받아주는 사람 몇 명 없을 거라고."
그 세상에 몇 명 없는 사람 중에 자기가 있다는 어필도 참.
잘도 저렇게 부끄러운 말을 하는구나……싶네.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평소엔 같이 뒹굴뒹굴하다가도, 이럴 땐 은근히 나이 차를 실감하게 된다니까.
"그래그래. 미움받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네."
"또 그렇게 대충대충 대답하고."
좀 봐주라.
오빠는 이제 그런 분위기를 못 따라가겠어.
"……됐어요. 어제오늘도 아니고. 다음부턴 조심해주세요."
예쓰!!
"그리고 쇼핑하는 건 괜찮지만 너무 이상한 건 보지 마요. 메슥거린단 말이에요."
"아니, 원래 SM은 앱노멀인데……알았어. 노려보지 마. 평범한 거 볼게."
괜히 같이 구경하자고 했나.
"그리고 장바구니 꼭 비워요. 이따가 확인할 거야. 이상한 거 사면 안 돼요."
"……내가 언제 이상한 걸 샀다고 그래."
"며칠 전에도 나 몰래 이상한 냄새 나는 로션 샀잖아요."
"피, 필요한 거라니까 그러네. 좀만 기다려 봐. 조만간 보여줄 테니까."
"내 말은, 사는 건 좋은데 왜 숨기려고 하냐는 거죠.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야 거짓말이라도 안 하면 못 사니까……라고 하면 안 되겠지?
"아무튼 오빠는 취향 진짜 이상한 것 같아요."
"……오빠도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
간신히 일단락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평소 버릇처럼 무심코 대답을 배배 꼬아 던져버린 나는 아차 싶었다.
젠장,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러자 그녀는……아니나 다를까, 입이 다섯 발쯤 튀어나와서는,
"오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아니에요?"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럼 무슨 의미로 한 말인데요?"
"아, 아니, 서윤아. 잠깐만."
"나한테만은 듣고 싶지 않다니, 뭐가요?"
그, 그게 그러니까……
"오빠, 잠깐만 여기 내려와서 앉아볼래요?"
맞선임과 여자친구 앞에서의 동작은 늘 신속할수록 좋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한테 흥미 위주로 SM을 가르친 건 누구예요?"
"……접니다. 네."
"그렇게 말하면 누군지 모르잖아요."
"성서윤 씨의 남자친구……되는 사람입니다."
힐끗 곁눈질하자, 그녀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고압적인 태도는 날 보고 배운 거겠지만……이렇게 어설퍼서야.
서윤이 너는 평생 남의 머리 꼭대기에 서있을 팔자는 아닌 것 같다.
"누가 웃어도 된다고 했어요?"
"죄송합니다."
"긴장 안 할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도권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서? 남자친구면서 뭔데요?"
"주인님……이지. 응."
"방학 동안 오빠 말도 잘 듣고, 해달라는 플레이도 다 해줬는데."
"그건 서로 합의 하에……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와서 그렇게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면 안 되잖아요?"
지당하신 말씀.
"아니면 이제 나한테는 질렸다는 거예요?"
"그, 그럴 리가 있겠니."
"그럼 왜 그런 말을 해요?"
"진심은 아니었어. 그냥 무심코."
스스로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다짐하듯 말했다.
"분명히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잊으면 안 돼요."
"……알았어."
"되게 마지못해서 하는 말 같다."
"죽기 전엔 헤어지자고 안 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순조롭게 내 인생을 저당 잡고 난 뒤에야 만족스런 얼굴이 되었다.
"이제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약속했으니까."
뭐, 현실은 이렇다는 거지.
주인님의 명령이 삶의 전부인 노예는 플레이가 끝나면 여자친구가 된다.
침대 위에서 삽입을 조르는 암컷도, 목줄을 차고 짖는 암캐도.
반나절 가량의 짧은 판타지를 경험하게 만든 다음, 다시 꼼짝 못하는 상대가 되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언제나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과정을 즐긴다고 하면 듣기엔 좋지만, 제대로 그 다음까지 생각해두는 게 좋겠지.
조교, 속박, 능욕……SM을 다룬 세상의 많은 작품과 달리, 현실은 중단도 엔딩도 없으니까.
"그래그래. 알았어. 약속할게. 약속할 테니까 이리 와."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여자친구는 빨리 달래줘야 후환이 안 남는 법.
"……혹시 오빤 안아주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가지고.
하지만 강경한 태도에 한발 물러나는 건 반드시 내 얘기만은 아니다.
"싫어?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싫다고는 안 했잖아요."
이럴 때 괜히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건 진짜 다행이지 뭐야.
"맨날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려고……"
서윤이는 토라진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머뭇머뭇거리며 다가와 안겼다.
일반적인 포옹과는 조금 다른, 완전히 이쪽에게 몸을 맡기는 식이다.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다는 듯 몸에 힘을 빼고 응석 부리는 것처럼.
물론 그것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사이즈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만.
"……지금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이상한 생각이라니?"
"몰라요. 그냥 그럴 것 같아."
그녀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면서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냥 그럴 것 같다니, 뭐야. 트집 잡는 거야?"
"오빤 맨날 야한 것만 생각하잖아요."
"안 그러면 너도 만족하기 어려울 테니ㄲ……으극!"
설마 안겨있는 상태에서 머리로 들이받을 줄이야.
"자꾸 그러면 나 오늘 집에 갈 거예요."
그건 오히려 이쪽이 바라 마지않는 바지만……입 밖으로 냈다간 큰일 나겠지?
벌써 이틀째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가뜩이나 좁은 방에 그녀의 짐이 늘어나고 있는 건 난처하다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아기자기한 머그컵이나 담요 같은 게 증식하더라고.
"그게 싫으면 빨리 머리 쓰다듬어줘요."
그런데도 강하게 불만을 말할 수 없는 건, 무서워서……는 아니다. 일단. 응.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주제에 은근슬쩍 장래의 이야기를 조르는 데다,
잠자리에선 평생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고,
가끔……아니, 꽤 자주 사랑이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지만,
뒷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바라는 대로 들어주고 싶어지는 건
"오늘은 한 번도 안 해줬잖아요."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졌기 때문이겠지.
"서윤아."
"네헤."
옷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인지 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일부러 느릿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 대낮인데 이렇게 응석 부리는 건 괜찮은 거야?"
"누가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런 거야?"
"그런 거예요."
말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그렇다고 밤에 응석을 안 부리는 건 아니잖아."
"내가 언제 밤에 뭐라고 한 적 있어요?"
"그럼 밤에는 뭐든 맘대로 해도 되는 거야?"
그녀는 잠시 의미심장한 침묵 후, 불분명하게 중얼거렸다.
"……안 된다고 해도 맘대로 할 거면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짜로 귀엽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깨물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거 진짜 아팠어."
"서윤이는 살짝 아파야 잘 느끼는 것 같던데."
"그런 건 플레이로 충분하잖아요."
"그럼 평소에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평소에는……좀 더 다정하게 사랑받고 싶어요."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깝게 붙어 있는 탓인지,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플레이할 때 말고는 엄청 신경 써주지 않나?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끔 아플 때가 있어서……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팠으면 말을 했어야지. 전부 오빠한테 맡기면 안 돼."
"……정말로 아픈 건지, 기분 좋은 건지 구분이 안 된단 말이에요."
"미안. 아직 삽입으론 느끼질 못하는 것 같아서 자꾸 괴롭히게 되더라."
전희에 너무 공을 들인 나머지 시작도 하기 전에 체력이 방전 난 적도 몇 번 있었고.
"그리고 아직은……뱃속이 꽉 차는 느낌이 좀 낯설어서."
"몸이 작아서 그런가?"
"내가 작다고 하지 말라고 했죠."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그녀는 팔을 뻗어 내 코를 살짝 꼬집었고,
"뭐 어때. 작은 건 사실이잖아."
"사실이라고 막 말하면 안 돼."
"이젠 반말하기로 한 거야?"
나는 답례로 그녀의 뺨을 양쪽에서 "으에에……" 꾹꾹 눌러주었다.
"볼따구 쫀득쫀득한 것 봐라. 손바닥에 막 달라붙네."
"사람을 무슨 갓 구운 빵처럼……"
"말 나온 김에 한입만 먹어보자."
"왜 갑자기 무서운 소릴 하고 그래요."
"아니, 진짜로. 한 번만 깨물어 보면 안 돼?"
"오빤 안 봐주고 아프게 꽉 깨물 거잖아요. 싫어요."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어차피 맛은 맨날 보고 있으면서……새삼스럽게?"
"갑자기 핥아보고 싶어졌다고 하면 화낼 거야?"
"이미 말해놓고 뭘 물어봐요."
"혹시 기분 나쁘면 어떡하나 싶어서."
"딱히? 오빠한테 듣는 건 별로 싫지 않아요."
그녀는 기특한 말을 하며 쓰다듬기 편하도록 몸을 뒤척였다.
"플레이할 땐 훨씬 심한 말도 많이 듣는데요 뭘."
"……그거, 진심이 아닌 건 알지?"
"오빠 하기 나름?"
"우리 사이에 야박하게 그러기야?"
아무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우가 따로 없다니까.
"그래 뭐, 들어나 보자. 조건이 뭔데?"
"오빠."
"응?"
"……커피, 마시지 마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암시에, 나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젠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게 느껴지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짧은 키스였다.
"에헤헤."
하지만 정작 부탁한 당사자는 쑥스러웠는지 입을 가리고 배실배실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요즘 네가 이런 식으로 날 조련시킨다는 생각이 드는데. 기분 탓이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빠는 다 들어주잖아요."
"버릇 나빠질까 봐 걱정이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오빠가 혼내줄 테니까."
얘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램프의 요정?
"근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일어나기 싫은데……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팔자가 늘어지셨어 아주."
"지금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기분."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우리 집에선 말하는 강아지는 안 키웁니다."
"멍멍. 멍! 멍!"
"이럴 때만 고분고분하지?"
그러자 그녀는 배부른 얼굴로 뺨을 내 손바닥에 문질렀다.
꼭 심심한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라붙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젠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
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배를 보이고 누운 그녀의 턱을 긁어주었다.
"강아지가 배를 보여준다는 건 복종의 의미라던데. 서윤이는 어때?"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긴 한데……함부로 건드리면 화낼 거예요."
보기 좋게 속내를 들켜버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그런 날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튼 틈만 나면 만지려고 한다니까. 이해를 못 하겠어."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군살이 붙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베스트 체중인 그대로니 모르겠다는 거다.
난 그저 말랑몰캉한 그 느낌을 즐기고 싶을 뿐인데……왜 저렇게 싫어할까.
"안 그래도 요즘 오빠 때문에 허리가 늘어난 것 같단 말이에요."
"……그거 내 잘못이야?"
"오빠가 맨날 주무르니까 그런 거잖아요."
"오랜만에 잘못한 것 없이 진심으로 억울하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뱃살만 늘어날 리가 없으니까.
하루가 멀다고 주무르는데 왜 가슴은 그대로냐고.
조금이라도 사이즈에 변화가 있어야 정상 아냐?
빵 반죽도 그렇게 주물렀으면 벌써 부풀어 올랐겠다.
"그런 걸 보면 너도 어지간히 살이 안 붙는 체질이긴 하다."
나는 여전히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을 쥐고 흔들었다.
그동안 열심히 먹은 것 같은데, 왜 변함이 없지.
질량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거 아냐, 이거?
조금이라도 군살이 붙어야 주변에서 끌어모을 텐데.
"나랑 같이 하루 세 끼, 간식까지 다 챙겨 먹는데 왜 이러지?"
"원래 타고난 게 그런 체질인 걸 어떡해요."
"나는 좀 더 살집이 있는 편이 좋은데."
"그래서 나 대신 2kg나 찐 거예요?"
"……체중계는 언제 훔쳐본 거야."
"샤워하고 나왔을 때 뒤에서 살짝?"
하긴. 고작 8평짜리 원룸에 프라이버시란 게 있을 리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