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이야기를 끝마치기 전에 (3)
"하루 종일 붙어있으니까 서로 모르는 게 없네."
"오빠도 내 몸무게랑 다 알고 있잖아요."
"손목 사이즈부터 목 둘레까지 외우고 있지."
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수갑이나 목줄 때문에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다.
여자친구의 약지 손가락 사이즈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면……좀 이상한가?
선물에 담겨있는 의미 자체는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하긴. 반대로 노멀한 여친에게 목줄을 선물한다고 하면 즉각 수라장이 되겠지.
"뜬금없는 말이란 건 아는데, 평범하다는 건 뭘까?"
"우리 오빠 또 쓸데없는 거 고민한다."
"……너 진짜 가차 없어졌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그런 거 생각해봤자 소용없어요."
차라리 시원스럽게 느껴질 만큼 딱 잘라 말한 그녀는 내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런 것보다,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아무거나 금지."
"서윤이가 만들어준 거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어."
"그럴싸하게 넘어가려고 해도 안 통해요."
"점심 먹은 게 소화도 안 됐는데, 먹고 싶은 게 있겠냐."
벌써 5시가 가까웠지만, 덥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있는데 배가 고플 리가.
"말 나온 김에 산책이나 갈래? 나오는 김에 저녁도 먹고."
"오늘 최고 기온이 33도라는데요?"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날씨가 시발."
나쁜 말은 안 된다고 태클이 들어올 법도 한데……조용한 걸 보니, 같은 심정인 듯했다.
"올여름은 진짜 에어컨 없었으면 어땠을지 상상이 안 되지 않냐?"
"난 왠지 알 것 같은데. 일단 오빤 나한테 엄청 짜증 냈을 거예요."
"……더워 죽겠는데 달라붙으면 짜증 나지."
"오빠 가끔 여친보다 에어컨을 더 사랑스럽게 보는 거 알아요?"
"당연히 사랑스럽지. 안 그랬으면 너는 겨울까지 출입 금지였어."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몸을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아마 시시한 농담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과장 없는 100퍼센트 진심이라고 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에어컨도 없는 원룸 자취방에 두 명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가뜩이나 여름엔 신경이 곤두서니까……잘 됐지 뭐. 싸울 일이 없어서."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귀 뒷부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천천히, 천천히. 손끝으로 피부를 덧그리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흐으으." 흔들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자 있다고 해서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그렇죠. 어차피, 전기세는 똑같을 테니까아……."
"시원한 건 좋은데, 서윤이 감기 걸릴까 봐 좀 걱정이긴 해."
가뜩이나 몸도 약한 데다, 환절기엔 감기를 달고 사는 체질이니 걱정될 수밖에.
"괜찮을, 걸요? 읏! 몸에 좋은 거 많이 먹었고."
"……하긴, 서윤이 덕에 몸보신을 좀 과하게 하긴 했지."
아마 더위를 잘 타는 남자친구에게 맛있는 걸 먹여주고 싶다는.
오히려 그 외의 이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맘씨 고운 여자친구에 의해……진짜 많이도 먹었다.
그러니까 두 달 사이에 몸무게가 2kg씩이나 늘어난 거겠지.
근데 생각해보니, 가장 많이 먹었던 건 장어……였던 것 같은데?
"……"
과연 그것은 정말로 단순히 몸보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쪽의 자양강장을 노렸는지.
난데없이 불거진 의혹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그리고, 이렇게 하면 따뜻하니까 문제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가슴 위로 끌어당기더니, 또 다른 팔을 가져와 그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두 팔 사이로 얼굴을 내밀더니 "어때요?"라고 묻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올려다보았다.
나로선 일부러 옴짝달싹할 수 없는 포지션을 자처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오빠한테 잡혀버렸다!"
뭐, 본인이 만족스러워 보이니까 내버려 두도록 하자.
"근데 붙잡혔으면 좀만 얌전하게 있지 않을래? 자꾸 꿈틀거리지 말고."
"꿈틀거린다고 하지 마요. 편한 자세를 찾고 있잖아요 지금."
"……그렇게 불편하면 그냥 내려오지?"
하지만 서윤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빠 성격에 순순히 놔주겠어요?"
단순히 붙잡혔다는 설정을 말해보고 싶은 듯 했다.
"근데 서윤아. 이런 생각은 안 해봤어?"
"무슨 생각인데요?"
"나한테 붙잡혔다는 건."
나는 한쪽 팔로 단단히 끌어안은 뒤, 다른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거의 가슴 부근까지 올라간 파자마 아래로 하얀 살갗이 드러났다.
"이런 짓을 당해도 아무 말 못 한다는 건데?"
"왜 못해요. 하지 마요."
"……네. 그렇겠죠. 아무렴요."
같이 분위기 좀 타주면 어때서.
"낮에는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기회만 보이면!"
"아야야, 아파. 때리지 마. 그냥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이해가 안 간다니……뭐가요."
"목소리는 밤에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자 그녀는 "어……"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오히려 해가 진 다음이 더 위험하지. 다들 자느라 조용하니까."
"그, 그거야……뭐, 그렇긴 한데."
"게다가 서윤이도 전보다 잘 느끼게 됐고."
"아니, 오빠. 잠깐만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 안 들린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괜히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최대한 참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노력만 하면 뭐해. 전부 들린다니까?"
"오, 오빠가 너무 집요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사귀기 시작한 직후부터 성감의 개발과 병행하여 조교하는 것은 물론,
조금씩이지만 나도 그녀의 몸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모든 게 처음인 그녀로선 섹스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게 절대로 나쁜 일이 아니라고 교과서적인 정답을 가르쳐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게 아니지. 서윤이는 마조히스트니까, 참는 게 반대로 흥분되는 거잖아."
일단은 뭐, 스스로도 좀 더 철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안고 있는 동안엔 무척 얌전하니까……기회를 놓치는 것도 아까운 짓이잖아.
"억지로 참으면서, 누군가 들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걸 상상하면서 느끼는 거지?"
"……됐어요. 일어날래요."
"순순히 놔주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나는 반쯤 몸을 일으킨 그녀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두 팔로 강하게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달아나려다 오히려 뒤에서 끌어안긴 그녀는……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뻔하지 뭐.
제대로 낭패라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있거든.
쉽게 놔주진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힘으로 뿌리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도.
"오, 오빠. 일단 놓고 얘기하지 않을래요? 이따가 해줄 테니까……"
그러니 일단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한테 몸을 맡겼다간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니까.
그렇다고 적당히 물러날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이따가 뭘 해주는데. 응? 말해봐."
"그러니까……"
"똑바로 말해야지?"
"그게, 그……잠깐만. 오빠?!"
나는 그녀의 옷자락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손이 살갗에 닿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항상 느끼는 건데, 서윤이는 학습능력이 없네. 내가 어떻게 가르쳐줬지?"
"확실하게……말, 하라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네, 그럼 일부러 무시한 거야?"
"아니에요! 무시……한 거 아니라. 그냥 잠깐, 잊어버려서."
피부 위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훨씬 더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전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니까 내버려 둘까.
"오빠, 슬슬 그마안……하지 않을래, 요? 잘못했으니까……"
나는 느릿하게 그녀의 몸을 쓰다듬는 동시에, 흠칫거리는 반응을 즐기며 물었다.
"내가 몇 번이나 가르쳐줬는지 기억해?"
"모르겠어요. 많이. 되게 많이."
"되게 많이 말했구나?"
"네헤에에……"
"근데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자, 잘못해ㅅ……서요. 주인님."
오빠에서 주인님으로.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그녀의 경우엔 호칭이다.
대부분의 서브미시브들은 비슷한 종류의 심리적 트리거를 갖고 있다.
평소의 자신과 구분할 수 있는 열쇠. 혹은 스위치.
그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잘 길들여진 암컷으로 떨어진다.
스스로, 혹은 주인에 의해 학습된 신호나 동작은 각인처럼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서윤이는 가끔 주인님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아닛……에요! 절대로 안 그래요."
"조금만 만져줘도 기뻐서 떠는 주제에. 이것 봐. 벌써 느끼고 있잖아."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볍게 훑은 정도로 느낄 리가 없잖아.
덜덜 떨리는 것도 손이 닿아서 긴장하는 바람에 그런 거고.
하지만 이런 건 말로 못을 박아둔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다.
분위기를 잘 타는 아이일수록, 한 마디 한 마디에 영향을 받으니까.
"내가 지금 어딜 만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해봐."
"가슴……에, 닿고 있어요. 그러니까아……이잇!"
가볍게 유두를 비틀자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똑바로 말하라고 했지. 자꾸 그럴 거야?"
"꼭지……젖꼭지."
"꼭지가 뭐 어쨌는데."
"주인님이, 빙글빙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어요."
아무튼 손이 많이 가는 여자친구라니까.
"서윤이는 나한테 만져지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닌데……흐읏!"
가볍게 어깨에 입을 맞추자 그녀는 잔뜩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내가 말은 안 해도, 서윤이가 쌀쌀맞으면 많이 서운하거든?"
"싸, 쌀쌀맞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워서."
"무서워? 왜. 뭐 때문에? 내가 무섭게 한 적 있어?"
여기까지 왔으면 늪에 몸을 반쯤 담근 거나 마찬가지지.
"하, 항상 분위기 타게 되면……그게, 마지막까지 가버리니까."
"이것 봐. 똑바로 말하라고 했는데 또 그렇게 얼버무리고."
"으우윽……"
"마지막까지 간다는 게 뭐야. 응?"
"그러니까, 섹……ㅅ, 섹, 스요."
"고작 섹스라고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플레이 중엔 더 야한 말도 하면서 왜 그래."
"그, 그건 주인님이 시키니까……!"
"그럼 지금은 명령을 안 받아서 그런 거야?"
나는 일부러 그녀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얌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면 차라리 높은 곳을 보게 하는 편이 낫다.
심리적으로 몰린 사람은 우선 자신의 몸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불안할 때 손톱을 씹거나,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것처럼.
그런 버릇을 막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럼 서윤이는."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간격을 둔 두세 호흡 정도의 침묵.
간신히 오후의 끝자락에 접어든 주택가는 조용하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와 창밖의 매미 소리.
그리고 그녀의 귀에도 똑똑히 들리는 스스로의 가쁜 숨소리.
어느 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그녀의 처지를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몇 초다.
"서윤이는 명령을 받으면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지, 지금은 플레이……도 아닌데."
"조금 전에 그랬잖아. 몸도 마음도 주인님 소유라며."
입장의 차이를 가르쳐줬다면, 다음은 조금 더 궁지에 몰아넣을 차례다.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 상황을 모면할 궁리밖에 없을 테니까.
분위기를 탄다고 해도……결국 거기까지.
무리한 요구를 해봤자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다.
금세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고작이겠지.
"몸에 상처를 남겨달라고 했던 건 어떤 의미였어?"
중요한 건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님이……흐읏! 꼬집지 마……아아."
"됐으니까 대답이나 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든 간에, 곧장 자신의 발언을 공격하기란 어렵다.
논리나 정합성과는 별개로, 무의식적인 자존심이 막아서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선, 우선 자기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까.
"사, 상처……남겨도 된다고, 했던 게 아니라……"
"내가 들었던 거랑은 다른데?"
"진짜로 해달라고 했던 거……아니고."
"그럼 뭐야. 그냥 주인님을 시험해본 거야?"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찌를 수 있는 무수한 허점을 낳게 된다.
"어차피 못할 걸 아니까 찔러본 거구나?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아, 아니야! 비웃었던 거……아니에요. 절대로."
"서윤이한테는 미안한데, 그렇게밖에 안 들리거든?"
파고드는 건 이성이 아니라 감성.
무의식의 깊숙한 곳.
논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단호하게 말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서윤아. 대답해볼래. 내가 누구야?"
"주인님……이요."
"그렇지?"
권위는 언제나 논리보다 우선하며,
"주인님을 시험하는 건 잘못이야 아니야?"
"잘못……이에요. 엄청 큰 잘못."
"알면서 왜 그랬어. 내가 실망했으면 좋겠어?"
죄책감은 이성을 앞선다.
"그렇게 귀여워해 줬더니 아예 기어오르려고?"
"아니, 아니야. 주인님……정말로 아니에요."
"서윤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네, 네에. 아니에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전부 나 혼자 오해한 거다?"
거기에 더해, 의도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공격적인 질문.
평소라면 억지 부리지 말라며 화를 냈을 거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단순한 트집. 억지.
그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녀 스스로 인정한 권위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그럼 말해봐. 주인님한테 왜 그랬어?"
"그, 그게……"
"왜 그래. 말 못하겠어?"
권위를 앞세운 질문.
파고드는 죄책감.
강한 스트레스.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약자라는 입장.
이성적인 사고를 망가트리기 위해선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서윤이가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지 않아?"
"지금은 플레이하는 게 아니니까……"
"먼저 주인님 소유라고 선언한 건 누구야?"
조금만 냉정해져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 거다.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으니까.
거기서 앞뒤를 맞추려는 노력은 글쎄.
망치로 종이를 자르려는 시도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뻔한 함정에 빠질 때도 있지.
"정말로 주인님을 시험하려던 게 아니었는지, 잘 생각해봐."
이미 가장 그럴듯한 대답을 미끼로 던져주지 않았는가.
"서윤아?"
"……"
"우리 서윤이, 대답도 안 하고. 안 되겠네."
거기에 살짝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압박이 더해진다면,
"잘못……했어요, 주인님."
사람은 놀랄 만큼 쉽게 생각을 그만두고 머리를 숙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