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1) (5/43)



〈 5화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1)

"────그러니까, 남자친구로 삼아 달라는 거야. 사귀어 줘. 후회는 안 시킬 테니까."



각오하면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간신히 허락할  있는 호텔 레스토랑.


이야길 듣는 사람마다 센스 없다며 그녀를 동정하게 만든 옷차림.


그리고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여자친구의 입에서

"자꾸 그러면 나 후회하는 수가 있어요."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 고백.



"……네."

그녀는 연상의 여유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만약 책으로 만든다면 25권 정도의 분량이 나올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비로소 연인이 되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오빠……뭐라고 불러야 돼요?"


"그냥 하던 대로 하자. 바꿀 필요 없잖아."

"애칭 같은 거……안 만들어요?"


"왜 아쉽다는 표정이야. 혹시 기대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 여자친구는 스무 살. 그것도 남자는커녕 동성과도 제대로 대화를 못하는 인간이었다.

당연히 애인 같은  있어본 적도 없고, 1학기가 끝날 때까지 변변한 친구도 사귀지 못한 아싸.

사람만 보면 겁을 집어먹고, 긴장해서 말이 안 나오는데다 이불 속이 가장 마음 편한 찐따였다.



"……찐따라고 하지 마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피차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 이해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마찰이 적었다는 거다.


설마 사귀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던 만큼 알게 된 것도 있고 말이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이 아가씨는 틀림없이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했겠지.

"나는 절대로 연애 같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던 주제에 로망만큼은 잔뜩 있었던 것 같으니.



"자기야, 라고 불러주면  돼요? 진짜로.  한 번만. 네? 네?"


"……차라리 죽여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겐 못하겠다."


물어보고, 타협하고, 거절하고, 토라지고, 싸울 뻔 하다가 화해하고,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

다행히 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금방 우울해졌고, 언제나 이쪽의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다.

같은 말을  번 하게 만들진 않았지만 그만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딱 한 번만이야. 한 번만 해줄 테니까 더 이상 조르지 마. 알았지?"

덕분에 꽤 많이 양보를 해야 했지만……아슬아슬한 순간도 제법 있었다.

연애를 해봤다면 이해하겠지만, 입장의 차이란 결국 시각의 차이다.


쓸데없는 고집이나 자존심이 아니라도 양보할  없는 이유는 생긴다.


그리고 그런 이유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볼  이해하기 힘든 편이다.

"그, 그러니까……오빠, 이제부턴 나랑 사귀는 거잖아요?"




사귀기 시작한  대략 일주일하고도 좀 더 지났을 무렵, 6월의 마지막 날.

이미 각오했다는 듯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꽈악 주먹을  그녀는

"데이트……같은 건 잘 모르기도 하고, 사람 많은 곳은 무서우니까."

"이, 일주일에  번은……역시 외로워서 죽어버릴 테고."


"그리고 오빠는 어차피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집에서 데이트 해주는 여친이 있다면 결혼도  수 있다고 했었죠……?"
.
.
.
.
라며 매일 왕복 2시간 거리를 찾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허락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설득에 지쳐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한 거다.

도저히 말을 들어먹어야……아니, 말이 통해야 말이지.

평소엔 고분고분하면서 왜 이럴 때만 고집을 부리는 건지.


그리고 그 행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권하기 전까진 정말로 매일 같이 찾아왔거든.

그 뒤로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사흘 넘게 돌아가지 않게 됐지만, 그건 조금 더 나중의 이야기다.



"오빠……이거, 맛없어요. 잘못 샀어."

"그러게. 실패했네. 바나나 젤리."

"……가루약 같은 맛이 나."

"다음엔 서윤이가 고르는 걸로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연인다운 일을 하거나, 시종일관 달라붙어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가끔 쓰다듬으면 난처해하면서도 솔직하게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손을 뻗으면 깜짝 놀라고,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단순히 빌려온 고양이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덕분에……뭐랄까, 때때로 감시라고 해야 하나. 관찰당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반드시 기분 탓이라고 치부할 문제는 아니다.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면 부자연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모습을 몇 번이고 목격했으니까.

대체 남자친구를 몰래 훔쳐보면서 무슨 만족을 얻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었지만……관두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여자친구란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같았기 때문이다.




"멜론 맛도 있었는데, 그걸로  걸 그랬나?"

조금 별난 구석이 있는  확실했지만, 그녀에 대한 내 인상은 단순했다.


무엇을 말해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얌전한 아이. 성격은 좀 어둡지만.

처음 만났을 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떠들게 됐고.


앞으로도 내 페이스로 느긋하게 해나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안 돼."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윤아, 잠깐 이리 좀 와줄래?"


"네, 네헷. 부르셨어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던 그녀는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팔짝 뛰어올랐다.


아직 남자친구에게도 목소리를 잘 들려주지 않던 때라 혀를 깨문  덤이다.



"……"


불쑥 솟아오른 한심한 기분을 꼭꼭 씹어 삼킨 나는 그녀에게 "아앙" 입을 벌리도록 했다.



"조심 좀 하자. 맨날 혼자 다치지 말고. 불안해 죽겠다."

"네에엥……제성해여."

"대답만 하지 말고. 응? 제발 부탁이니까."

나는 그대로 뺨을 쭉쭉 잡아늘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글쎄, 상처는 안 보이는데. 많이 아프진 않지?"

"……얼얼하고 조금 욱신욱신."


"그 정도면 괜찮아. 그나마 다행이네."

아무튼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이러면 꼭 내가 다치게 만든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잖아.

잘못한 게 있다고 하면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이럴 바엔 차라리 시선 바깥에 두는 편이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슬슬 그만 놀랄 때도 되지 않았냐?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대?"


"아,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죄송해요."


"뭐가 익숙하지가 않은데?"

"오빠가 이름 불러주는 거……?"

"너 혹시 출석 부를 때도 깜짝 놀라고 그랬냐?"


"그건……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있어서 괜찮아요."




아무리 연애는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말이야.


출석체크에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하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네.


"뒤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쿡 찌르기라도 하면 기절하는 거 아냐?"


"호, 혹시라도 하지 마요. 진짜로. 말했어요 분명."


"내가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오빠 말고는 그런 장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죠."



장난을 쳐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리고 어차피 친구 없어서……걱정 안 해도 돼요."


"오빠는 지금  말을 듣고 좀 다른 걱정이 생겼는데."

물론 여자친구의 교우관계까지 신경 쓰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쓸데없고 불필요한 참견이라는 이유는 차치해두더라도,


최근 점점 그녀가 딸이나 조카처럼 느껴져서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상 남자친구가 아니라 아버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오빠?"

아니, 가족이나 형제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굳이 표현하자면……길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서 맡아 기르게 됐다고 해야 하나.


유독  많고 경계심 강한 고양이와 친해지기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기분이다.



"저기, 오빠? 계속 보고만 있으면 부끄러운……데."

처음 만났을 때라면 몰라도……사귀고 있는데 여자친구에서 조카나 동생으로, 다시 기르는 고양이로.


날이 갈수록 피보호자를 넘어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윤이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향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애완동물 같아서,

"아……"




무심코 손을 뻗자,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졸지에 폭력을 휘두르려는 남자친구가 된 나는……뭐 어때.


아랑곳 않고 천천히 겁을 집어먹은 그녀의 뺨에 손등을 문질렀다.

서윤이 역시 단순히 스킨십이 목적이란 걸 깨닫자 곧 희미하게 웃었다.



"서윤아, 오빠 방금 진짜로 섭섭할 뻔 했거든?"

"……죄송해요. 깜짝 놀라서 그랬어요."


"오해 받는 게 무서워서 너랑 같이 다니겠냐."

만약 사람이 많은 장소였다면 벌써 상당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을 거다.

설마 신고까진 당하지 않겠지만……달갑지 않은 의혹을 받게 되겠지.

나중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역시 먹이로 길들이는 게 빠르려나."


"네?"

"아냐. 아무것도. 그냥 혼잣말."




나는 사람한테 통하는 츄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으아은어에오."

"뭐라는 거야."

"뭐, 뭐하는 거냐구 했어요."



좀 전의 복수도 겸해 통통하고 말랑말랑한 뺨을 꾹꾹 눌러 반죽하듯 문질렀다.


주무를 때마다 탄력 있게 손에 달라붙는 이 감촉……중독되겠어.

대놓고 말할 순 없지만, 사귀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하나다.

만약 허락만 해준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만지작거리거나 잡아당기고 싶을 정도로.

"오, 오빠, 슬슬 그만……"

"키스할래?"

"……"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곤 귀까지 새빨갛게 붉힌 채, 음소거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래."



목소리가 작아서  들렸다며 조금 심술을 부려볼까 싶었지만,

이미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 후였다.

그것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게다가 입술은  왜 저렇게 깨물기 좋게 내밀고 있는 건지.

"……?"



 모습에 잠시 한눈을 팔자, 그녀가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떴다.



"안 해요……?"

"미안 미안. 살짝 타이밍을 놓쳤어."


아무래도 혼자만 준비 만전의 자세로 가슴 졸이던  부끄러웠는지,

여봐란 것처럼 뺨을 부풀린 그녀는 뿌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아아아 오빠는 왜 항상……흐엑."


"그래그래. 착하다."

나는 손으로 빵빵하게 부푼 뺨을 꾹 눌러 바람을 뺀 다음,



"뭐해. 눈 감아야지."

"네, 네헤에엣……"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은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천천히 끌어당긴 다음, 건조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흐, 흐으으……으읏!"




한 번. 그리고 두 번.

끝났다고 생각할 때쯤 다시 한 번.

딱딱하게 굳은 몸에서 긴장이 빠져 부드러워질 때까지 반복한다.

 번이고 입을 맞추는 동안 자연스럽게 입술 사이가 벌어지게 되고,


그렇게 적당한 일체감이 만들어졌을 무렵 천천히 그녀를 떨어트린다.



"하악, 하악……"

그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에 젖어있는 입술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거의 30초 가까이 숨을 참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키스하는 동안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나?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는데……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오, 오빠아……"

"그래그래."


거의  것 같은 표정을 한 그녀는 허물어지는 것처럼 내게 안겨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심장 박동보다 느린 템포로 토닥여주었다.


헐떡이던 호흡이 잦아들고 충분히 느려졌을 무렵,




"이제 그만 놀라면  돼? 은근히 상처받는데 그거."


"……오빠 손 커다래서 좋아해요. 크고, 따뜻해서."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아니, 됐다."


이렇게 녹아버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상, 이미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릴 거다.

평소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지만……실은 엄청 좋아하거든.

아직 스스로 졸라대진 못하지만 완전히 푹 빠진 상태다.

왜 성실한 성격일수록 일탈과 비일상에 흥미진진하다고 하잖아.

사귀기 시작하고, 괜찮다는 핑계가 만들어지자 그 다음부턴 일직선이었다.



"이렇게 해주는  좋아하지?"

이런 식으로 귀를 어루만져 주거나, 목덜미를 쓰다듬기도 하고,


살짝 몸서리칠 정도로만 어깨를 따라 손끝으로 훑어내리기도 하면서.



"간지러워어……"

살짝 긴장이 풀린 것처럼 보이면 그대로 입술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좀 전의 키스로도 충분할  같으니 오늘은 관두도록 하자.


어디까지나 릴렉스가 목적인 만큼 달아오르기 직전의 타이밍.

그녀에게 있어선 약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그만두는 게 좋다.


"아……"


말없이 손을 떼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좀 더 해달라며 조르진 않았다.

얼굴엔 이미 발갛게 열이 올랐고, 호흡도 아직 흐트러진 채다.

여기서  밀어붙여진다면 어떻게 될지는 그녀가 더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참자. 아직은 손이 닿는 곳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일 테니까.



"죄, 죄송해요. 많이 무거웠죠. 지금 바로 일어날게요."


"알았으니까 서두르지 마. 저번처럼 넘어진다."

"네에에……"


여전히 잠이 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천천히. 그래. 다치지 않게. 발 조심하고."


"……나 스무 살이에요."

"정말로? 언제 이렇게 컸어."


"그, 그렇게 애기 다루는 것처럼 하지 말란 소리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무척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무릎에서 내려왔다.

엊그제처럼 서두르다가 화려하게 나자빠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진짜……옷  구겨졌잖아요."



탁탁 두드려 스커트 자락을 정돈한 그녀는 투덜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무래도 머리카락이 길다 보니 자주 입에 들어가거나, 엉키는 듯 했다.


게다가 빠지기도 엄청 빠지고 말이야.


집에 찾아오기 시작한 뒤로 세면대나 침대가 머리카락 투성이야 아주.



"있잖아요, 오빠."

"말해. 왜."


"……나 머리카락, 자르는 게 좋을까요?"




상기된 얼굴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가닥을 떼어내던 그녀가 물었다.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은 확실히 이런 계절엔 거추장스럽다.


게다가 관리하기도 귀찮고……오래 걸리고, 무거워서 목 아프고.

묶으면 묶는 대로 짜증스럽지. 흔들리고, 자고 일어나면 엉켜버리고.


155cm가 조금 안 되는 그녀의 작은 체구로는 확실히 부담스러울 거다.


"안 돼. 자르고 싶으면 나랑 헤어진 다음에 해."

하지만 나로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래? 그럼 자르자."라고 말했다간 토라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맞다. 오빠는 긴 머리 좋아했죠?"


"……뭐, 그렇지. 응. 좋아해."



남들만큼은.



마치 깜빡했다는 것처럼 되물어보는 그녀는……실로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한 달 전에 했던 농담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는 주제에.

꼭 이럴 때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뗀단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여자는 여자라는 건지, 도저히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니까.

"고생하는  알지만 그래도 자르지 마. 지금이 제일 예뻐."


"……머리가 길면 힘들단 말이에요. 무겁고. 답답하고."

"그래서 여기 오면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잖아."

"그것 말고도 트리트먼트라든지, 빗질이라든지 많아요."

아무래도 길어지는 이야기인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샴푸 고르는 법도 까다롭고……또 드라이도 신경 써야 하고."


아무래도 최근 머리 손질하는 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랑 만나기 전에는 미용실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했던 주제에.

이것저것 말을 거는 게 무섭다고 했었나?

대인공포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처음 만났을 때는……크흡.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만 웃어버렸다.


"서윤아, 우리 처음 만났을  기억해?"

"……기억 안 나요."

"그러지 말고. 정말로?"

"안 난다니까요. 자꾸 물어보지 마요."

그녀는 싫은 기억을 쫓아내려는 것처럼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날아온 머리카락이 휘두른 채찍처럼 얼굴에 와서 감겼다.



"……"

의도한  아니겠지만, 가끔 이렇게 긴 머리카락은 무기가 되기도 한다.

혹은 한 마디만 더 했다간 더한 걸로 맞을 수도 있다는 경고 비슷한 걸지도 모른다.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었던 그녀의  메이크업은 영원히 기억 속에 묻어두기로 하자.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그런 것보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었는지 다급하게 말을 가로챘다.


"좀 전엔 왜 불렀어요? 시킬 일이라도 있어요?"

"……누가 들으면 엄청 부려먹는 줄 알겠다."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걸까.

"됐으니까 와서 이거나 좀 읽어 봐."


"뭔데요……?"


"서윤이가 알아둬야 하는 거."


나는 그녀가 보기 편하도록 의자를 뒤로 당겼다.


상체를 조금 기울인 그녀는 모니터 화면의 글씨를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D/S……계약의 목적과……정의……권리와 의무에 대해……"

한참이나 더듬더듬 읽어내리던 그녀의 고개가 삐그덕거리며 돌아갔다.

그리곤 확신에 찬, 그러나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오빠? 이거 혹시……디엣, 계약서……에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