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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2) (6/43)



〈 6화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2)

나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에 담은 디엣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도착적인 울림을 질겅질겅 씹었다.


최소한 디엣이 무엇인지, 의미 정도는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한다면 꺼낼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동시에 그녀는 긴장과 초조, 불안을 한데 뒤섞은 다음 얇게 펴 바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디, 디, 디엣이라고 하면……그거잖아요. 에스, 엠……그게, 사람들끼리……플레이, 하는."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조금만 진정하자 서윤아. 너무 당황했어."

"지, 진정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충분히 진정했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니까 하는 말이지. 됐으니까  쉬어. 그러다 딸꾹질 하겠다."

하지만 그녀는 심호흡을 하는 대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디엣 계약서……맞죠? 그렇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물어보는 이유는……약간의 현실 부정도 겸하는 듯했다.

덕분에 나는 꽤나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이런 경우엔 긍정도 부정도 상당한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화제가 화제니만큼 어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만약 평소였다면 "그렇다고 하면 어떡할래?"라고 질문을 되돌려주며 주도권을 가져갔겠지만,

그런 식의 대답은 안 그래도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호되게 튕기는 결과밖에 낳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잖아. 서윤이가 알아야 하는 거라고."



결국 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설명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빨리 알아보네?"

"그동안 지겹게 들었으니까……모를……수가 없……잖아……요."



그녀는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버벅대면서 몇 번이나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당장이라도 모니터에 떠오른 글자가 바뀌길 바라는 것처럼.


그게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물 좀 줄까?"

"……네."



아무튼 손이 많이 가는 여자친구라니까.

결국 그녀는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고 난 뒤에야 조금 진정한  했다.



"야. 흐른다.  흐른다."



진정하긴 개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구만.

소매로 슥슥 "우으으." 입가를 닦아준 나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냉정하게 이야기를  수 있는 상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단 말해두는데, 농담하는 거 아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 것 같았다.


"맨날 괴롭히고……심심하면 놀려대고, 가끔씩 진짜로 너무하긴 한데."


"……갑자기 남자친구 디스?"


"최소한 이런 식으로 장난치는 사람은 아니니까……그건 알아요."

그보다 후환이 무서워서라도 이런 장난은 못 치지.

"그리고 만약 장난이었으면……앞으로 일주일은 오빠랑 말도 안 했을 걸요."

"일주일 씩이나……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설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여자친구를 일주일이나 방치했다가 뒷감당 어떻게 하라고."


만약 일주일 동안 집에 안 오겠다는 선언이었다면 엄청 혹했을 것 같지만 말야.


구석에서 가만히 말도 안 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견디기 힘들지.

여자친구와 아내의 차이점은 귀가시간의 유무라던데,


출근하는 것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여자친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동시에 내 여자친구의 거리감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오빠, 자꾸 그렇게 말도 없이 쳐다보는 거……안 하면 안 돼요?"

"여자친구 얼굴도  보게 하면 사귀는 이유가 없어지는데."


"보, 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아……!!"

"알았어. 알았어. 팔 휘두르지 마. 위험하잖아. 어허."

파닥파닥거리는 그녀를 진정시킨 나는 이야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필요를 느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반응이 심심하다고 해야 하나. 얌전하네?"


"……어떤 반응을 생각했는데 그래요."

"좀 더 시끄럽게 꺄악꺄악 호들갑 떨 줄 알았지."


"사실 말만 들어선 별로 실감이 안 나기도 하고……"




거북한 얼굴로 머리를 배배 꼬던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근데 나 오빠 앞에서 시끄럽게  적 없잖아요."


"보통은 그랬을 거라는 거지 뭐."


"……흐응."


"서윤이가 시끄럽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그렇게 나는 적당히 달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마디 늘어놓은 다음,

"실제로 계약서를 보는 건 처음이지? 아닌가? 내가 보여준 적 있었나?"

"없었을……걸요? 처음인 것 같아요. 오빠한테 설명은 많이 들었지만."

"그럼 역시 실감이 안 나서 덤덤한 거야?"


"벼, 별로 덤덤하진 않은데……지금도 엄청 당황하고 있단 말이에요."

앞으로 모은 손이 조금이지만 떨리고 있는 것을 본 나는 짓궂게 물었다.

"당황하는 건 계약 이후까지 상상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저도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으니까?"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서……진정이  돼요."



 말을 듣고 보니……안 그래도 핏기 없는 얼굴이 조금이지만 창백하게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싶어 손을 뻗으려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한순간이라지만 나한테 겁을 먹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잠시 고민하던 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그녀에게 보이도록 손바닥을 펴 보였다.




"서윤아. 손 줘봐."


"손?"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잠시 펼쳐 보인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왜요?"


"됐으니까 어서."



조심스럽게 그 위에 손을 얹었다……라기 보단 의심스럽게 쿡쿡 찔렀다.

"지금 뭐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되냐."

"확인이요."


"뭐를."

"위험할 것 같아서……?"

모처럼 신경 써준 보람도 없이, 이번에는 위험한 사람 취급이었다.


"그래서? 확인해보니 어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 조금 드는  같은데."


"조금만?"

"조금 많이……이이잇."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어떤 위험인데?"


"오, 오빠가……우으윽, 머리를 꾹꾹……잘못했어요오!"



손아귀에 힘을 풀자, 머리를 감싸쥔 그녀는 주저앉아 "흐아앙." 울상을 지었다.


"오, 오늘 머리 예쁘게 하고 왔는데……오빠가 다 망쳐버렸어."

"평소랑 비교해서 별로 달라진 것도 없구만 뭘 그래."

"샴푸 바, 바꿨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개도 아니고, 냄새를 맡아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그보다 샴푸 냄새라는 게 결국 다 거기서 거기 아냐?

구체적으로 뭔가가 달라졌다는 느낌은 못 받았는데.


다음에는 치약 바꿨냐고 물어볼까.




"그, 그리고 머리를 막 그렇게 꾹꾹……여기서 더 쪼그라들면 어떡할 거예요."

"잘 됐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좀만 더 작아져라. 어깨에 태우고 다니게."


"……이젠 완전히 애완동물 취급?"


"조금 전까지 그런 취급을 상상하고 있던  아니었어?"

그러자 서윤이는  말이 없는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상상하고 있던 '계약 이후'라는 건 그런 의미겠지.

중요한 건 그 다음이라고 그녀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은 나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본격적인 플레이는 아직 이르지만, 슬슬 시작할 때가 됐잖아."

"……"


"어떻게 생각해?"


"저기, 그게, 그, 그러니까……햐악?!"

분위기를 틈타 슬그머니 허리에 손을 얹자 약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여름방학이기도 하고, 그렇지? 복학하면 이렇게 같이 못 있으니까."

"오빠……마, 만지는 방법이 저기, 조금 이, 이상한데……"

"계획을 세워서 이것저것 해보기엔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그보다……저, 점점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안 돼?"

"……절대로 안 돼요."




입맛을 다신 나는 순순히 그녀의 엉덩이에서 손을 뗐다.

"어쨌든 뭐, 생각할 시간은 많이 있었을 거라고 봐. 그런 약속이었고."


"……계, 계약을 하고 나면, 그런 거죠? 제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말은 끝까지 해야지."


"제대로 그게, 계약을 맺고……주인님으로 모셔야 한다는……거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질박하긴 했지만 딱히 부정하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


실제로 내가 요구해야 하는 것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조금 석연찮게 느껴진 나는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일단 서윤아,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도 될까?"


"네? 네에엥……물어보세요."


"우린 지금 사귀는 사이잖아. 그렇지?"


묵묵부답.


"……아냐?"

"아, 아니! 그런  아니라……! 갑자기 물어보셔서!"



당황한 그녀는 반대로 이쪽이 깜짝 놀랄 만큼 거세게 손사래를 쳤다.

"사귀는 사이 맞아요. 여자친구고. 고백도 받았고……에헤헤."


"대답은 좀 빨리 해라. 갑자기 뭔가 했네."

"죄송해요오……"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고 놀랐잖아."

"그, 그건 오히려 제가 걱정해야 할 문제 같은데……"



또다시 자신감 없는 성격이 고개를 들었는지, 그녀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아직도 오빠가 왜 저보고 사귀자고 했는지……실감이 안 날 때가 많아서."


"내가 그럴 때 즉효인 방법을 알고 있는 있는데, 어때?"

"……꼬집는  싫어요."

"그럼 실감이 날 때까지 키스나 몇 번 더 할까?"



필사적인 도리도리.


"오늘은 이제 충분……안 돼요. 더 하면 큰일 나요."

"어떻게 되는데? 응? 말해봐."


"오, 오빠한테 못 보여줄 얼굴이 돼요."


"……그것 참, 돈을 내더라도 보고 싶어지는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어쩜 이렇게 가학심을 부추기는 대사만 골라서 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당연히 노렸다고 생각하겠지만……아니라고.

내 여자친구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저러는 거라고.

자기 말이 남자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생각을 못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안 그러실 거죠?"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단 말이다.


그게 오히려 가학심에 불을 당기는 것도 모자라 기름을 끼얹는 행위라는 것을 모른 채.



"휘우우우우……"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종의 사인으로 이해해도 무방했겠지만……참자. 참아야 한다.


여기서 못 참고 쓰러트렸다간 최악의 경우 헤어지는 것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된다.

그래. 고양이라고 생각하자.


그것도 아주 귀찮은 성격의 고양이.


신경 써달라고 귀찮게 굴다가도, 막상 다가가면 훌쩍 떠나버리는 고양이.


억지로 붙잡아서 무릎에 앉혀놓고 쓰다듬었다간 얼굴에 발톱 자국밖에  남겠는가.


"왜 갑자기 한숨을 쉬고 그래요……?"


"어엉?!"


"죄, 죄송해요!"



나는 파다닥 머리를 감싸 안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미안. 미안. 왜 사귀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짜증이 확 나서."

"왜,  사귀는지 모르겠다는  아니라……"

"왜 사귀자고 했는지?"


"네, 네에에에."

"좋아하니까 사귀고 있지. 왜긴 왜야. 그러니까 고백한 거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한 나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제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할 때도 되지 않았냐. 아무튼 소심해가지고."

"갑자기 소리 질러서……엄청 놀랐어요."

"그렇게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머리로 하는 생각과 입으로 나오는 말이 따로 놀아야 한다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만 목소릴 높여도 겁을 먹는 애한테 솔직할 수도 없으니 원.

무엇보다 이렇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라붙어 오니까……참는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그래. 이럴 때 어리광 부려야지. 언제 또 그러겠냐."

"응후후……"

"거 참, 남들한텐 못 보여줄 얼굴이네."



그렇게 입과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한창을 달래고 있으려니,

"……"




어느샌가 슬금슬금 다가온 그녀가 무릎에 턱을 얹었다.


명백하게 뭔가 기대하는 게 있다는 표정이었다.



"너 진짜 만져주는  좋아하네."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주인님이 쓰다듬어주는데……싫어하는 강아지가 있을  없잖아요."



말하고 나서도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좀처럼 이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계약서에 서명도 안  주제에. 머릿속에선 이미 암캐인 거야?"

"……너무 적나라하겐 말하지 마요. 창피하니까."


"뭐 어때서 그래. 사실인데."

"그, 그래도오오……"




생각보다 반응이 약한  봐선 일부러 노리고 꺼낸 말이 확실해 보였다.



"어차피 계약만  맺었다 뿐이지……그동안 계속 주인님이었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래. 서윤이한테는 오빠보다 주인님이 먼저였지."


"그동안 가르쳐주신 것도, 제대로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 모습이 꼭 "잘했죠?"라고 물어보는  같아서……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서윤이가 머리도 좋고 이해가 빨라서 주인 입장에선 편하긴 했어."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거예요……?"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은데? 무리할 필요 없어."

"시, 싫지는 않아요……원래 이렇게 하기로 했던 거니까."

그 말대로, 그녀와 주종 관계를 맺는다는 약속은 한참 전부터 나오던 이야기였다.

물론 노예라고 해도……의미 그대로의 소유물이 아니라 파트너라는 관계지만,


어쨌든 굴복하고, 복종하며, 봉사한다는 것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안전의 보장되어 있고, 일시적이란 걸 제외하면 내게 귀속당한다는 거니까.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동의했고, 훗날을 기약하는 식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근데 오빠한테 고백 받은 것 때문에……그러니까,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나는 짜증스럽게 손가락을 튕겼다.


"여유가 없어서 뭐. 어쨌는데. 말은 끝까지 해라 좀. 자꾸 끊지 말고."

"죄송해요. 그, 에쎔 쪽은……말씀하시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그녀는 면목 없다는 듯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무리도 아니지.

생전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들뜨지 말라는 것도 이상하잖아.

지금은 바보 짓을 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겠지.

"게다가 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용케 그런 결심을 했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막상 눈앞에 닥치면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지."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서윤이와 처음 만났던 곳은 인터넷 채팅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이상한 사이트는 아니다? 평범하게 대화만 즐기는 곳이었어.


날 포함해서, 교육적으로 완벽하게 부적절한 인간들만 모여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적어도 당시 그녀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을 제공할 능력 정도는 있었다.


"여기선 일단 오빠가 서윤이한테 사과해야 하는 흐름인가?"


"……불안하게  그래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니, 가끔 그런 생각을 하거든."

얘는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날 만났을까 하고.



"내가 좀  제대로 했으면 서윤이랑 평범하게 친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

"평범하게……라고 하시면, 어떤?"

"그냥 뭐, 평범한 친구처럼……미안.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구나."


서윤이는 알면 됐다는 것처럼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차피 사과할 정도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야 뭐, 덕분에 이런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당연히."

"것 봐요. 그런데 무슨 사과를 한다고."


"그래도 책임감 정도는 느끼고 있어. 의무 비슷한 것도."


어쨌든 내가 그녀에게 SM을 가르친 것은 단순히 심심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지만……나는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그녀를 가르쳤다.


서윤이 역시 별다른 저항 없이 호기심 위주로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졌다.


목적이랄 것도 없었다. 파트너를 구하고 싶어서 몸이 달았던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그녀에겐 호기심이 있었고, 내겐 지식이 있었다. 그냥 그뿐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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