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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6) (10/43)



〈 10화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6)

"어쨌든, 대충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앞으로는 제발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라."


"……자꾸 바보라고 하지 마요. 그렇게 이상한 소릴  것도 아닌데."

"가끔 이렇게 모자란 티를 내니까 그렇지."

"모, 모자라다고 하지 말라니깐!"


"에쎔도 에쎔이지만, 앞으로 가르칠 게 산더미다 정말."



적어도 싸가지 없다고 욕은 먹을지언정, 멍청하다는 말은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세상 물정을 모를 거면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 무시라도  당해야……젠장.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금방 보호자의 시선으로 돌아가서 문제라니까.


연하랑 사귀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극적인 입장 변화를 감수하고 있는 거야?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대답을."


"……왜 짜증을 내고 그래요."




나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쯧." 혀를 찼다.




"그리고 좀 전에 규칙이 불공평하다고 했던 거 말인데."


"네에엥."


"역시 허락해주면 안  것 같아."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것 같다는 건 뭐에요."


"결과가 뻔히 보이거든. 서윤이가 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보다 분명 실수만  거라고 장담을 넘어 확신을 했던 주제에.


오히려 좀  느슨하게 풀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건 그에 상응하는 책임.

동시에 준수하지 않으면  될 정도의 강제력이 뒤따른다는 거다.


간단히 말해서, 실수로 삐끗했을 때 받아야 할 벌을 어떻게 감당할 건데?




"게다가 여기 적힌 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럼 뭐가 또 있는데요."

"당연히 플레이 중에 지켜야  룰은 따로 배워야지."




일부러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았으니 간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오히려 서윤이에게 있어선 그쪽이 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노예의 의무'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런 규칙 말이다.


좀 전까지 상상하던, 식사나 의복 착용에 대한 명령도 거기에 포함되는 거고.


"물론 앞으로 차차 가르치겠지만 너그러울 거라고 생각하진 마."

"주인님에 대한 예의……라던가?"

"물론 그것도 배워야겠지."


"만약 제대로 못하면 벌 받는 거죠?"


"당연한  물어보고 있어.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면……"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걱정이나 불안이 아닌, 약간의 초조함이 섞인 기대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계약서에 적어두는  낫지 않아요?"


"……기어이 내가 과로로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녀의 말은 얼핏 타당하게 들리는  같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내가 고의로 누락시킨  맞지만……아니, 나쁜 의도는 아니고.

단순히 문서의 분량이 배 이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스포츠도 아니고, 명문화된 규칙이 있을  없잖아.

게다가 플레이의 종류는 좀 많아?

물론 다른 사람의 경우나 조언을 참고할  있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 실제로는 당사자들의 사정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플레이의 규칙이란 목적에 따라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대체로 임시변통인 경우가 많다.

개인의 취향은 물론 당시의 상황이나 조건, 컨디션까지 고려해야 하는 만큼, 딱 잘라서 정해둘  있는 게 아니다.


"그쪽은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 시간이  때 천천히 가르쳐줄게."

"……왠지 급하게 얼버무리려고 하는 느낌."

"그렇다면 뭐. 어쩔 건데. 불만이야?"

"전혀요."

가끔은 뻔뻔하게 나가는 쪽이 잘 먹힐 때도 있다.



"아무튼, 내가 하려는 말은 이해했지?"


"오빠가 나한테 싫증 날 일은 없다고 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게 그런 이야기였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상 반박하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논리적이어서가 아니라 파란이   분명했기 때문에.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그건 그냥 싸우자는 거지 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좀 더 꺼내기 쉬운 말을 골랐다.



"어쨌든, 불만은 그걸로 끝이야?"

"……당장 생각나는  없어요."

"너도 참 어지간하다."

조교를 받을 때마다 싫어도 몸이 익숙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엄성을 버리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공포.

타인에게 온전히 몸을 맡겨야 한다는 원초적인 불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렸다는 후회.
.
.
.
이렇게 알기 쉬운 걱정을 놔두고,

기껏 물어본다는  고작 남자친구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는 거라니.



"다시 한 번 물어보겠는데, 정말로 그거 말곤 무서운 게 없어?"

"……안 돼요?"

"아니, 안 될 거야 없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상식의 범주 안에서 놀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제 와서 걱정이라고 해도……딱히 없어요. 주인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 것치곤  전에 싫증 나면 어떡하냐면서 울기 직전까지 갔던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운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아무 불만이 없다, 이거야?"

"딱히 불만이랄 것도 없고, 그렇게까지 불안하진 않은 느낌이라서?"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한참 전부터 나한테는 주인님이었는데요 뭘."

"어설프게 배운 주제에 뻔한 아부만 늘어가지고."



나는 그녀의 코를 쥐고 흔들었다.


"지, 진짠데에에엥……"

"알아. 거짓말이라곤 안 했잖아."


지금 그녀에게 남자친구랑 주인님 중에 어느 쪽을 더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100퍼센트 망설일 거다.


언젠가 장난 삼아 물어봤을 땐 남친보다 주인님을 우선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고.


물론 당시엔 사귀기는커녕, 주종 관계라고 하기에도 뭣한 사이라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묘한 배신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괜히 대답이나 미루고 말이야."

"대답을 미루다뇨?"


"아까 그랬잖아. 계약서부터 읽어보고 대답하겠다며."



그제야 그녀는 "아."하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설마 30분도 안 돼서 마음이 바뀐 건 아닐 테고."

"그, 그게……"

"읽어보니까 믿어도 될 것 같아?"

어쨌든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애를  건 확실했기에, 나는 조금 기대하며 물었다.

하지만 날 주인님이라고 생각한다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한테만 전부 맡겨놓으려니까……조금 불안해서."


"……아 그러셔."


"무, 물론 믿고 있긴 하거든요?"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확인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먼저 계약서부터 읽어봐야겠다고  거야?"

"꼼꼼하게 읽어봐야 뭐가 잘못됐는지도 알죠. 고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일단 잘못됐다는  전제로 했다는 거지?

"……그치만 오빠, 안 그런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못 미더운 구석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서윤이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제아무리 법적인 효력은 없다지만 약속이나 마찬가지고,

혹시 계약서를 빌미로 나중에 어떤 억지를 부릴지 모르니까.


미덥지 못한 남자친구한테 맡겨두는 것보다야 당연히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쪽이 안전할 테지.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권태기?!"



미안.


아니, 진짜로 미안.




"무, 무섭게 왜 그래요. 이대로 괜찮냐니, 뭐가요?"

"그냥 뭐랄까, 너나 나나 둘 다 바보다 싶어서."


"언제는 나보고 모자라다더니, 오빠도?"

"그 반응도 살짝 열 받는데."

"왜 그래요. 방금 못 미덥다고 한  때문에 그래요?"

역시나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지는 그녀는 정확히 아픈 곳을 찔러왔다.

"뭔데요 진짜. 할  있잖아요.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그런 거 아니야. 별 거 아니니까 넘어가자 좀."

"나 계속 물어볼 텐데, 안 귀찮겠어요?"

"……"

"아니면 사흘 정도 지나면 말해줄 생각이  것 같아요?"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는 꾸며낸 것이 아니다.

 무섭게 들리는 지금의 발언도 협박이나 으름장이 아니다.


하늘이 뒤집혀도 누굴 협박할 만한 위인은 못 되거든.


저건 그러니까……그냥 말 그대로의 의미다.

정말로 72시간을 묵묵히 기다린 다음 다시 물어보겠다는 거다.

그동안 내내 당하고만 살았던 영향인지는 몰라도……집요하다는 수준이 말이지.


평소엔 비교적 담백한 성격이지만, 일단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몰라볼 만큼 집요한 성격이 된다.

"……내가 그렇게  미더웠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결국 여자친구의 자상한 배려를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본심을 토해내야 했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  치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혹시 오빠, 진짜로 풀 죽었어요……?"


"……안 되냐."

"안 된다곤  했잖아요."


"그럼 지금 그 표정은 뭐야."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니까……왠지 신선해서?"



그래 뭐, 여유 있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할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 이상, 달에 한  정도는 풀이 죽거나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상대는 가능하면 여자친구였으면 하는데……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가.

"나중에 싸우게  빌미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심란했을 뿐이야."

그러자 서윤이는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란할 게 뭐가 있어요. 나중에 정말로 싸우게 됐을 때 대화로 잘 해결하면 되는데."


"좀 전까지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네가  말이야?"


"싸운다는  화해의 여지가 있다는 거잖아요. 미움 받는 거랑은 다르죠."




세상엔 관계 수복의 여지 같은 건 남지도 않는 싸움이 있다고 말해볼까 싶었지만……관두기로 했다.


연애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는 아가씨의 환상을 깨부수는 것도 못할 짓 아니겠는가.


게다가 가끔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정론이 가장 바람직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그래. 서윤이 말대로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빠도  그런 것 같으면서 은근 소심하다니까."


"……너한테 소심하단 소릴 듣다니, 나도 볼장  봤구만."

"뭐 어때서 그래요. 저번에도 싱크대 앞에서 한숨 푹푹 쉬었으면서."

"그거, 분명 내가 다시는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텐데?"

그러자 서윤이는 배실배실 웃음을 흘렸다.




"오빠 같은 사람도 평범하게 풀이 죽거나 하는  신기해서……꺄아!"




별안간 와락 끌어안긴 서윤이는 장난기가 다분한 비명을 질렀다.


"아무튼 가끔 보면 너도 내 말은 더럽게 안 듣는다니까."

"이번에도 제발 좀 잊어달라고 막 혼낼 거예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근한 목소리로 떠보는 것처럼 품에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좀 더 적극적인 어프로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대를 이루어주기로 한 나는 그녀의 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라면 어떻게 할래?"

"어떻게 혼내줄 건데요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찬스였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혹시라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과연 어떤 벌을 받게 될지……그녀의 기대가 최고조에 올랐을 때쯤,

손이 닿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허리며 옆구리를 마구 간질이기 시작했다.

"캬항! 아하하핳! 오빠, 잠깐만! 아핳! 간지럽,  돼……!"

"제발 좀 잊어달라고 부탁했으면 말을 들어야지. 응?"



그녀의 입에선 연신 비명-웃음-통곡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이사이 "제발!"이라거나 "그만!" 등등.


누가 봐도 필사적인 호소가 들려왔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닥칠 후환이 무섭다는 이유에서라도 적당히 끝낼 순 없었다.

"여기? 여기? 대체 뭘 믿고 까부는 거야. 간지럼 약하면서. 응? 응?"

"잘못, 잘못했어요! 그만……! 아팟! 거기 민감하단 말이에요!"

"저번에도 똑같이 잘못했다고 했던 건 기억 안 나?"


"그, 그래서 일부러……꺄아아!"

"일부러? 일부러라고 했지, 방금?"

"자, 자꾸 그러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예요?!"

 말을 시작으로, 서윤이 역시 평소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역시 지나친 도발은 복수의 연쇄라는 결과밖엔 낳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히 내 쪽에서 먼저 그만두자는 말은 꺼낼  없었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서윤이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쓰다듬고, 간질이고, 깨물고, 부둥켜 안고 뒹굴며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양쪽 모두 이제 충분하니 슬슬 그만두자는 이야기는 실수로라도 입에 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둘 다 서로에게 다양한 형태로 반격하기 바빴고, 여전히 서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누구 하나 멈춰야 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결국 웃다가 지친 그녀가 호흡곤란을 호소하고, 체력이 바닥난 내가 바닥에 널브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무 놀았나 봐요. 목 아프다. 오빤 괜찮아요?"

"……말 걸지 마라. 오빠 죽었다."



등이며 허리가 두드려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실제로 주먹으로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힘 조절도 안 하고 퍽퍽 때리더만.

어차피 솜주먹이라 만만하게 봤는데……죽겠네.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욕하겠다. 그것도 이런 시간에."



몸을 뒤척이며 투덜거리자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탔다.

"나중에 같이 사과하러 가면 되잖아요."


"……너 혼자 가."


"낯가리는 거 알면서?"

"그럼 안쓰러워서라도 용서해주겠지."


"여자친구를 막 팔아먹고 그러면 안 돼요."


맥이 풀린 목소리로 노곤노곤하게 한담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윤이는 너무 지쳐서 웃을 기운도 없는지, 딸꾹질하는 것처럼 나른하게 몸을 들썩였다.

배 위에 엎드려서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아무래도 좋아.


나는 팔을 뻗어서 고롱고롱거리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평소였다면 당황한 나머지 허우적거렸을 그녀도 순순히 몸을 맡겼다.

"이제 쓸데없는 걱정 안 해요?"

"……왠지 전부 바보 같이 느껴졌어."



아마 내 위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무게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냥 될 대로 되란 기분밖에 안 든다."


"좋다 그거.  대로 되랏!"



물론 여전히 양쪽 모두 요령 좋게 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든 그 생각은 바뀌지 않을 테고,

가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기도 하면서


언젠가 적당한 시점에서 타협하게  테지만……뭐 어때.

세상만사 뭐든 적당히 순응하고 지내는 게 중요한 법 아니겠어.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거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슬슬 대답을 들려주면 안 될까?"

"에엥? 이제 와서 그거 물어보는 거예요?"


"가능한 하나부터 열까지 확실하게 해두고 싶거든."

서윤이는 배 위에서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으응."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곤 조금이지만 명백히 장난기 어린 얼굴로 응수했다.



"……역시  되겠어요."

"이번엔 또 어디가 문제인데 그래."


"간단하게 허락해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지쳐있던 나는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언제는 불만이라곤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가, 가장 중요한  빠졌단 말이에요."


"그래그래. 알았어. 뭔데? 뭐가 부족한데?"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무언가 꿍얼거렸다.

답답하게 굴지 말라며 재촉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관두자.


분명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으니 망설이는 거겠지.


괜히 윽박질러봤자 딸꾹질밖에 더 하겠냐.

"……에휴."



아무리 반격을 위해서였다지만, 조금 전까지 적극적으로 안겨들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다시 평소의 소심 모드로 돌아온 여자친구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렇게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별로 중요한 건 아닌데, 딱 하나 부탁이 있어요."


간신히 마음을 굳힌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여, 여자친구 쪽도 제대로 사랑해준다고 약속해주세요."


"여자친구 쪽?"

"파트너 말고 여자친구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은데."

"소, 소홀하면  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고작 그게 부탁이야?"


"오빠는 고작이라고 할지 몰라도,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란 말이에요."

서윤이는 그렇게 말한 다음, 말을 꺼내는데 필요했던 시간만큼이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를 짓누르던 한 사람만큼의 무게가 덜어지자 순식간에 해방감 비슷한 것이 몰려왔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왼손이  떨어졌다.

그것을 무척 사랑스러운 것이나 되는 것처럼 응시하던 그녀는,



"쪽."




고개를 숙여 손목에 입을 맞췄다.

"둘  제대로 사랑해준다면 저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될 대로 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요?"


"앞으로도 엄청나게 서윤이 페이스에 휘둘리게  것 같거든."

하지만 그것을 후회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오빠, 얼굴이 좀 많이 가깝지 않아요?"

"구두 약속으로 끝내는 것도 뭣하잖아."


"그,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해."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일단 저지른 다음에 반성하지 뭐.



"내 안의 양심도 슬슬 괜찮다고 말하는 중이고."

"그거 진짜 양심 맞아요……?"


"뭐든 간에."


"양심이라면 말려야 할 텐데."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 벗기기 힘들잖아."

"저, 적어도 침대로 가서……여기서 벗기면, 정마아아알……!!"

서윤이 말처럼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건 낭비겠지.


어차피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진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설마 그동안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즐겁고 유쾌하길 바란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방학이 끝날 즈음엔 우리도 좀  그럴듯한 사이로 보이겠지.

나는 묘한 고양감을 느끼며, 조르는 것처럼 달싹거리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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