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시작을 준비하는 태도 (1)
한참이나 초조하게 같은 자리를 서성거리던 나는 다시금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고함이라도 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야말로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건 근거 없는 희망이다.
벌써 수 차례나 똑같은 좌절을 겪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앞서 실패했던 시도와 마찬가지로, 나는 또다시 희망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서윤아────아직 멀었어? 슬슬 기다리다 죽을 것 같은데."
"자, 자꾸 갈아입는 중에 말 걸지 마요!"
그러자 문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정말!"
"……몇 번이나 말한 시점에서 이미 '조금'이 아니잖아."
나는 어차피 들릴 리도 없겠지만, 작은 소리로 악담을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데────?"
"오빠가 재촉하는 만큼!!"
결국 더 이상 물어볼 의욕을 잃은 난 벽에 쿵쿵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실망이라거나 좌절처럼 고상한 정신활동의 결과는 아니었다.
자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심심했기 때문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 앞에서 사람은 단순해진다.
타일 사이사이에 핀 곰팡이를 관찰하고, 수건의 올을 셀 정도로.
"……더워. 더워. 덥다고. 더워."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깊숙이 달라붙는 열기는 도통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더위가 한풀 꺾인 시간이라지만, 오후 내내 달궈진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렇게 좁고 폐쇄된 공간이라면 사람 한 명분의 호흡만으로도 꽉꽉 들어차기 마련이다.
게다가 천장에선 후끈한 수증기가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바닥의 타일은 젖어서 미끈미끈거렸다.
"……"
그리고 정확히 이 시점에서, 나는 내 영혼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당장 눈앞에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가 나타나서,
"여기서 내보내주는 대가로 네 영혼을 받아가겠다."라고 한다면,
과연 "시발 콜!"을 외치며 쿨거래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의외로 가능 쪽으로 마음의 천칭이 기우는 것을 보며 더욱 더 비참해졌지만.
"뭐든 좋으니 내보내줘……"
어째서 나는 빈손으로 화장실에 틀어박힌 걸까.
하다못해 전공서적이라도 들고 올걸.
샴푸 뒷면의 성분 표시 같은 건 벌써 다 읽었고.
여자가 준비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을 텐데.
"서윤아아아아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님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봐도 대답은 없었다.
지금쯤 그녀는 첫 플레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든 몸의 준비든 말이다.
그것도 에어컨을 틀어놓고! 시원한 곳에서!
주인님은 화장실에서 더위에 지쳐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가만 두나 봐라. 진짜. 후회할 거다. 정말이야."
상당히 동어반복적인 내용을 중얼거리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로 인생과 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원망이 그것이었다.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지만, 내가 사는 곳은 평범한 원룸이다.
가구는 붙박이에, 기껏해야 화장실이 딸린 그런 방 말이다.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는데 10초도 안 걸리고,
"만약 달린다면……"
튀어나간 순간 벽에 얼굴을 처박고 코가 깨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어디에 앉아있든 구석구석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
바꿔 말하면, 옷을 갈아입을 만한 장소 따윈 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진짜 취직하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이사 간다."
빈틈없이 눈을 가리겠다.
벽을 보고 서있겠다.
못 움직이게 멍석을 말아라.
내놓는 아이디어마다 족족 기각된 이상, 둘 중 하나가 화장실로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선 망설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원망을 듣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물에 젖은 타일을 밟으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차마 여자친구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방법도 없는 채로,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열기와 습기에 짓눌려 억겹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어어어."
외출을 준비하는 여자친구를 현관에서 기다린 경험이 있다면 알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더럽게도 안 간다는 걸.
기다리는 시간도 행복하다는 건 매스미디어의 거짓부렁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들어본 적도 없는 문과들의 농간이라는 거다.
왜냐고? 만약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오후 3시부터 빡이 칠 거거든.
약속시간은 30분 전이었으니까!!
빛도 1초면 지구를 7.5바퀴 도는데,
고작 옷 갈아입는데 뭐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야악!
두서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기에 용의 눈동자를 그리는 모양새로 분노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직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이제 나와도 돼요."
"……그래."
나는 시기적절하게 말을 걸어와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물론 좀 더 기다렸다고 해서 정말로 화를 내진 않았을 거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선 사람을 자극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밍 좋게 들려온 노크 소리는 변명의 구실로 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좀만 더 기다리게 했으면 위험했을 텐데 운 좋았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종류의 구실 말이다.
언제 어느 때든 간에 자기합리화는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니까.
"……거기 앉아서 뭐하는 거예요?"
"미안. 더워서 좀 어지러웠나 봐."
덕분에 나는 살짝 켕기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준비가 오래 걸려서."
"아냐. 지금은 멀쩡해. 괜찮아졌어."
"당장 시원한 거 가져올게요!"
나는 주방으로 도망치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 그래도……"
"됐으니까 좀 더 자세히 보여줘."
당황한 그녀는 "읏!" 곧장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손목을 붙잡힌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 했다.
결국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그녀는,
"……너무 빤히 보진 마세요."
최소한의 반항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건 당사자가 가장 잘 알겠지.
"처음엔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잖아?"
"……가, 감사합니다."
힘겹게 대답한 그녀는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았다.
평소엔 다리를 드러내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니 뭐,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언제나 집에 올 땐 노출 따윈 1mg도 없는 복장이고.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목덜미나 손목 정도려나.
날도 더운데 좀 더 짧게 입어보라는 권유는 씨알도 안 먹혔었지.
"평소엔 절대로 못 보는 복장이라 그런가, 신선한데?"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노출이 싫어? 그럼 보이지만 않으면 되지? 라는 설득에 넘어간 그녀는.
"그, 그치만 이거 짧은 옷보다 더 부끄러워요."
완전히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까만 레깅스를 입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모처럼 함께 백화점까지 가서 골라온 신상이다.
기껏해야 스타킹 친척 주제에 왜 그리 비싼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입혀보니 나름대로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다는 건 확실했다.
자그마한 몸집 탓에 머릿속으로 그리던 비율은 안 나왔지만……뭐 어때.
"게다가 속옷도……좀 비쳐 보이는 것 같고."
"괜찮아.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 보여."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 대사 괜찮네. 나중에 써먹어 봐."
적당히 대꾸한 나는 쪼그려 앉아 좀 더 가까이에서 감상을 시작했다.
"확실히 매장에서 봤던 것보단 얇네. 바깥에선 못 입겠다."
"……어차피 집에서도 입을 생각 없어요."
"죽을래? 입어. 이게 얼마짜린데."
"창피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굳이 검은색을 고른 거잖아."
라이너 같은 걸 쓰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속옷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꽤나 좋은 포인트였다.
게다가 원체 살집이 없는 몸이라 타이트한 옷을 입으니 생각보다 각선미가 살아나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
한창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감상하던 나는 딱딱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엔 당장이라도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을 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짜증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수치심, 굴욕과 기타 등등의 감정으로 인해서 말이다.
당장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겠다며 혀를 깨물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물론 십분 이해는 한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시선을 받은 적은 없었으니……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밝은 곳에서 우두커니 선 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적은 없었다고 해야겠지.
"움직이는 건 어때. 불편하진 않아?"
"……괜찮은 것 같아요."
"일단은 스포츠 웨어니까 뭐."
"사이즈도 딱 맞아서……꺄악?!"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얼마나 잘 늘어나는지 궁금해서 당겨봤을 뿐인데.
아무리 놀랐다곤 해도 냅다 걷어찰 것까진 없잖아.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가 갑자기 만지는 바람에……!"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 안 하냐."
"……죄송해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억울한 듯 했다.
"그래도 내 잘못 아니에요."
"그런 것치곤 정확하게 정강이를 노리던데."
"노린 거 아니에요! 나중에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농담이었는데 생각보다 겁먹은 대답이 돌아와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담을 느끼는 듯 했다.
"그래 뭐, 아직 시간이 있으니 일단 좀 앉을까?"
나는 손짓으로 옆에 있던-침대에 앉는 건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장만해야 했던 쿠션을 가리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보는 쪽이 답답해질 만큼 신중한 자세로 엉덩이를 붙였다.
아무래도 다리가 벌어지는 걸 신경 쓰는 듯 했다.
결국 한참 궁리하던 그녀는,
"……여기 보지 마요."
조금의 간격도 없이 무릎을 붙인 뒤 비스듬히 자세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진정이 안 되는지 자꾸만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옷 늘어나겠다. 그것도 나름 새로 산 건데."
"어떻게 앉아도 다리가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옛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커다란 베개 하나를 던져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황급히 끌어안았다.
끌어안는다기 보다 베개 뒤에 숨었다고 표현하는 쪽이 정확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원하는 대로 노출이 없는 옷을 사줬는데 반응이 영 시원찮다?"
"……이렇게 달라붙는 옷은 처음 입어본단 말이에요."
"평소에 서윤이가 뭘 입고 지내는지 궁금해지는데."
표면적으로만 따지면 나보다도 노출이 적은데 말이야.
설마 집에서도 완전무장으로 꽁꽁 싸매고 있진 않겠지.
"평소라뇨?
"혼자 있을 때 말이야."
"파자마나 헐렁한 바지 같은 건데요."
역시나 예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오빠가 노출만 없으면 되겠냐고 했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스타킹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으니 괜찮다고 말한 건 너잖아."
"스, 스타킹만 신고 있으면 그냥 변태잖아요!"
흐으으음?
"……그렇다고 나중에 정말 스타킹만 신어보라고 하면 울 거예요."
"이젠 말하지 않아도 척척이네. 마음에 들어."
"나도 이젠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알아요."
"그럼 방금 내가 서윤이한테 물어보려던 것도 한 번 맞춰볼래?"
지그시 날 쳐다보던 그녀는 눈이 맞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나 마나 야한 거겠죠 뭐."
"아니? 오늘 오빠랑 쇼핑 다녀온 감상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잠시 멍청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으으으으!"
베개에 얼굴을 파묻더니 짓눌린 신음을 흘렸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한 그녀에게 짓궂게 물었다.
"데이트 끝난 다음에 오늘 어땠냐고 물어보는 게 야한 거야?"
"……언제부터 그런 거 물어보는 성격이었다고 그래요."
"꼭 물어봐야 대답하는 여친이 생기고 나서부터."
그것만큼은 서윤이도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말을 안 해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나도 싫어서 대답 안 하는 거 아니에요."
"알고 있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잖아."
본체 성능은 문제없는데 출력장치가 고장 났다고 해야 하나.
생각이 너무 많다 보니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소심한 성격 탓에 필터도 여럿 달려 있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말을 꺼내는 건 언제나 가장 적절한 상황이 지나간 후다.
사람에 따라선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긴 하지만."
"그럼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요. 심술이에요?"
"직접 말해주는 편이 기쁠 때도 있는 거야."
"……평소엔 괴롭히기만 하면서 이럴 때만 치사하게."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재밌었어?"
"엄청 재밌었어요. 맛있는 것도 먹었고."
"거기 튀김 괜찮다고 했잖아. 서윤이가 좋아할 것 같더라고."
그 뒤로도 우리는 평범한 커플이 데이트 후에 나눌 법한 대화.
길에서 만났던 강아지나, 식당에서 있었던 일.
근처에 새로 생긴 프렌차이즈 매장,
최근 SNS에서 유행하는 인테리어 소품 등.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로 꽤 오랫동안 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본론을 꺼내기 전 가벼운 잡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옷을……사주셨는……데."
우리 둘 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은 빠르게 찾아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자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잠시 입안이 깔깔해지는 것 같은 침묵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거 아무 의미도 없이 사준 건 아니다."
"……알아요. 움직이기 편한 옷이 필요해서 산 거잖아요."
"서윤이는 평소에 답답한 옷밖에 안 입잖아."
나는 그녀가 한 구석에 잘 개어둔 옷가지를 힐끗 보았다.
취향이나 스타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벗기기 힘든 옷인 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 선물인 건 확실하니까. 잘 어울리기도 하고."
"오, 오해 같은 거 안 해요. 오빠한테는 뭘 받아도 기뻤을 걸요."
"그렇게 말해주는 여자친구라서 다행이야."
그러자 그녀는 해냈다는 듯,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마음의 준비는 대충 끝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솔직히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할 줄은 몰랐어요."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준비할 게 있으니까."
"언제는 둘이서 합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더니."
서윤이는 툴툴거리며 지난 일주일 동안 자신이 얼마나 고민하고 가슴을 졸였는지 띄엄띄엄 늘어놓았다.
반면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기다렸다는 느낌도 없었던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준비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시간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고 뭐고……이젠 아무 생각도 안 든단 말이에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어딜 봐서 다행이란 거예요."
"최소한 어깨에 힘은 확실하게 빠졌잖아."
서윤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돼요? 언제는 리스크니 뭐니 하면서 잔뜩 겁 주더니."
물론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는 편이 사고 예방이 도움이 되지만……이런 경우엔 글쎄.
처음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보여준 반응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육지로 낚아올려진 물고기의 반응을 완벽하게 재현해 보였다.
과장 조금 보태서, 숨이나 제대로 쉬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사람 얼굴이 그렇게까지 창백해지는 걸 봤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걸."
그동안 몇 번인가 언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반응이었으니 원.
덕분에 플레이의 진행에만 신경 쓰고 있던 나는 꽤 급해졌다.
이대로라면 계획이 시작하기도 전에 침몰할 지경이었다.
"싫은데 말도 못하고 꾹 참다가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
"……그 정도로 미련하진 않아요."
"실전의 긴장감을 얕보면 안 돼."
결국 충분히 시간을 들여 가르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자세한 내용을 들어서 알고 있다면 예행연습이 되니까.
플레이 종류와 내용, 순서와 목적.
그녀에게 주어질 역할.
지켜야 할 것과 조심해야 할 것,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약속까지.
가르치는 쪽의 역량이 부족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문제라고 한다면, 별로 가르칠 게 없었다는 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