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시작을 준비하는 태도 (5)
"그래그래. 기분은 알겠지만 너무 그렇게 서두르진 말자."
"……두 시간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두 시간이나 버틸 체력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이래.
"우리 서윤이, 아직까진 여유가 넘치나 봐?"
무심하게 대꾸한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달래려는 건지, 겁을 주려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렸지만 뭐.
적어도 칭얼거리는 암캐를 조용하게 만들 정도로는 효과적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금방 다른 건 신경도 안 쓰이게 될 거야."
"……조용히 할게요."
서윤이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뒤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내 말을 경고 비슷한 것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주머니에서 작은 뭉치를 꺼내드는 것을 본 그녀는 나직한 탄성을 내질렀다.
감탄보다는 우려가, 걱정과 근심보다는 기대가 더 많이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금 전의 경고 아닌 경고가 효과를 발휘하긴 했는지,
서윤이는 입이 근질거리는 얼굴로 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고개를 기웃거렸다.
결국 더 이상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을 붙인 건 내 쪽이었다.
"이게 뭔지 그렇게 궁금해?"
"뭔지는 알아요."
"그래?"
"강아지 산책할 때 주인님이 손에 쥐는 줄이잖아요."
"맞아.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도 알고 있어?"
"몰라요. 뭐라고 하는데요?"
나는 씩 웃었다.
"사실 나도 몰라."
그러자 그녀의 눈썹 위로 당황-의아함-의혹이 차례대로 스치고 지나갔다.
"뭐에요, 그게. 설마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거예요?"
"서윤이는 알고 있을까 해서 물어본 거지 뭐."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샀어요 그럼."
"몰라. 그냥 목줄이라고 검색하니까 나오던데?"
능청스럽게 대꾸한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이것도 인터넷에서 주문한 거예요?"
"뭐, 그렇지."
둘둘 감아놨던 탓에 이리저리 꼬여버린 줄을 푸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다소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정확한 명칭은 나도 모르지만, 흔히 리드 줄이라고 부르는 그거다.
개를 산책시킬 때 개목걸이에 매달아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쓰는 끈 말이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괜찮더라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바로 샀지."
"까만색이라 무난해서 고른 거죠?"
"그래도 잘 골랐지?"
"그렇긴 한데……얼마 주고 샀어요?"
이어폰도 그렇지만, 뭐든 주머니 속에 넣어두면 왜 이렇게 꼬이는 걸까.
"얼마 주고 샀어요?"
"……사랑해."
"알아요. 그래서 얼마에요?"
"배송비 별도로 3만 7천 5백원."
다행히 서윤이는 더 이상 가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 삼지 못할 정도로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을 뿐이다.
"……크흠."
귓가에 실시간으로 주인의 위엄이 뭉텅뭉텅 깎여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추후 필요할 변명거리를 만드느라 머리를 굴리는 것과 동시에, 겨냥하는 것처럼 서윤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목줄을 채울 땐 언제나 키에 맞춰 길이를 조정해야 한다.
길이가 너무 길면 구속감이 떨어지고, 반대로 짧으면 거동이 힘들다.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 적당한 저항을 느끼게 만드는 정도가 가장 좋지만,
"서윤아, 잠깐 일어서 볼래?"
눈대중만으로 정확한 길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일일이 비교해가며 조정해야 했다.
서윤이는 귀를 쫑긋거리는 것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양손으로 리드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본 나는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의 활동을 보장하면서도 묶여있다는 실감을 주는 건 대충 신장의 2/3 정도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작은 키에 맞추다 보니 생각보다 짧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더 여유를 두는 게 좋을까……생각도 해봤지만,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아까부터 서윤이가 지루한 기색도 없이 내 손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시간, 모자랄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 저런 소릴 듣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좀 더 마음이 편한 상태였다면 훨씬 빨리 끝났을 텐데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숙여 봐."
서윤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지만, 순순히 허리를 굽혔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초커는 어디까지나 액세서리지, 목줄이 아니다.
애초에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강도가 약하다.
때문에 고리에 줄을 걸기 전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진짜 목줄처럼 다뤘다간 망가지거나, 가능성은 낮지만 다칠 수도 있잖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싸구려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조심해야지.
"역시 너무 세게 잡아당기면 안 될 것 같네."
"설마 그렇게 약할까요?"
"뭐, 진짜만큼 튼튼하진 않겠지."
손가락으로 초커의 고리를 두어 번 잡아당겨본 나는 못 미덥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무심코 힘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야 된다?"
"조금 아픈 정도는 참을 수 있는데……알았어요. 바로 말씀드릴게요."
"알았으면 됐어. 고개나 좀 더 들어봐."
인상을 한 번 찌푸리자 곧장 고분고분해진 그녀는 무척이나 협조적이었다.
세상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속담도 있지만,
스스로 방울을 달기 편하도록 도와주는 고양이는 어떨까.
서윤이는 혹시라도 삐뚤어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두 손으로 목줄을 받친 채 얌전히 기다렸다.
"……근데 눈은 왜 감은 거야?"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서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눈까지 꼭 감은 채로 말이다.
"좋아. 다 됐다."
"……됐어요?"
"뭐, 직접 봐봐."
그제야 서윤이는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나는 보란 것처럼 손잡이를 흔들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서윤이는 대답 대신 이리저리 흔들리는 까만 목줄을 모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평소엔 그렇게 알기 쉬운 주제에……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눈동자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내려야 했다.
설마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상대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건 딱히 그녀만의 일은 아니다.
단지 주인이라는 입장인 이상, 불안하더라도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준비한 선물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은 해야지?"
그리고 내가 주인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만큼이나, 그녀 역시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평소라면 모를까, 당장 면전에서 침묵을 지키는 행동은 묵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쨌거나 주인을 무시한다는 건 커다란 잘못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좋은 분위기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던 나로선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 사실을 빨리 알아차렸으면 했기 때문에,
나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심쩍은 기색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서윤아?"
"있잖아요, 주인님."
하지만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던 내게 그녀가 돌려준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지금 저 주인님 취향이에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두 번 말하지도 않고 대답해달라는 눈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던진 공이 되돌아온 기분으로, 수습할 책임을 떠맡은 건 내 쪽이었다.
"취향이냐고 하면……뭐, 거의 98퍼센트 정도 취향 한복판이지."
"나머지 2퍼센트는요?"
"글쎄, 좀 더 야한 표정을 지어보면?"
서윤이는 쑥스럽다는 것처럼 목을 매만졌다.
"지금도 얼굴 엄청 빨개졌을 것 같은데……부족해요?"
"한참 부족하니까 하는 말이겠지?"
"야한 표정을 어떻게 짓는지 모르겠어요."
"모르면 배워야지. 주인님 앞에서 뭐라는 거야."
장난스럽게 손을 뻗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가슴을 가렸다.
다행히 농담을 받아줄 정도로는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예뻐. 잘 어울려."
"……마음에 드세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서윤이한테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으니."
"목줄이 잘 어울린다는 것도 살짝 복잡한 기분."
"그런 것치곤 기뻐 보이는데?"
"당연히, 예쁘다는데……싫을 리가 없잖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더웠는지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벌써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목에 닿는 감촉이 낯설어요."
"그야 뭐, 당연히 혼자 있을 때랑은 느낌이 다르겠지."
"이렇게 다를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아까는 두근두근하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달라?"
"굉장히 두근두근하고, 오싹오싹하고……또 엄청나게 야한 느낌."
잠시 진정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나는 우선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서윤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기대하는 눈치로 다시 무릎을 꿇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묻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목줄을 쥔 주인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암캐라는 알기 쉬운 구도가 만들어졌으니까.
"이럴 때 보면 서윤이도 진짜 쉬운 년인데 말이야."
"……주인님 앞에서만 그러는 거예요."
"당연한 소릴 뭐 그렇게 자랑스럽게 하고 그러냐."
나는 심술궂은 소릴 하며 몇 번 목줄을 잡아당겼다.
당길 때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들썩였다.
"……저어, 주인님?"
"신경 쓰지 마. 대충 가늠해보는 거니까."
서윤이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불평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꼼질거리거나,
당기는 힘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낄 땐 목을 내밀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조, 좀 더 세게 당기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런 소린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괜찮아요."
"그렇다면야 뭐, 사양 않고."
거리낄 게 없었던 나는 빠듯할 때까지 목줄을 잡아당겼다.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흐윽!"
그녀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당기는 방향으로 순순히 끌려왔다.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상당한 힘 조절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몇 번 더 간다. 자세 잡아. 넘어지지 말고."
"자, 잠깐만……하윽!"
서윤이는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연습이 목적이었던 나는 매번 조금씩 가하는 힘을 다르게 주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하아, 하아……"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가쁜 숨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시퉁한 눈으로 그녀와 목줄을 번갈아 보았다.
몇 번 휘두르니 1m 남짓한 길이는 슬슬 손에 익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힘 조절이 난관인 이상, 오늘은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듯 했다.
괜히 흥분이나 짜증으로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목줄을 당겼다간 다칠 수도 있으니까.
"뭐, 대충 이 정도겠네. 적당히 연습은 된 것 같다. 고생했어."
"네, 네에에……감사합니다, 주인님."
"이 정도로 괴롭거나 하진 않지?"
"괜찮은 것 같아요오."
"근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황홀한 나머지 끈적하게 녹아버린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숨을 삼켰다.
"어, 얼굴이 왜요?"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해봐."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나는 재차 목줄을 잡아당겼다.
"두 번 물어보게 만들 거야?"
"바, 바라는 거어어……"
"말해."
헐떡이던 그녀는 가슴을 누르며 힘겹게 대답했다.
"그런 거 없어요. 정말이에요."
"대놓고 거짓말을 하시겠다?"
"거, 거짓말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냥, 좀 더 해주셨으면 좋겠다……하고."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을 텐데 분명."
"주, 주인님이……목줄, 당겨주시는 거요,"
역시나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마,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목줄이 당겨질 때마다……여기가 꾸욱, 하고 조여드는 것 같아서."
"이런 걸로 흥분하는 걸 보니, 너도 어쩔 수 없는 암컷인가 보다."
"흐, 흥분했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그 표정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서윤이는 저릿한 표정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거울이라도 보여줄까?"
"……아니에요."
"안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겠어?"
"아마 굉장히 야, 야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요."
가쁜 호흡 사이로 꺼낸 대답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쥐어짜내는 것 같았다.
"아까 주인님이 한참 부족하다고……말씀하셨는데."
"맞아. 지금 엄청 야한 표정이야."
"……주인님 취향이에요?"
"너도 참 어지간하다. 고작 물어보는 게 그거야?"
잠시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누르고 있던 서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텐 주인님한테 사랑받는 게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주제 파악 잘 하는 암캐를 둬서 기뻐해야 하는 건지 원."
"……머, 멍멍."
"시킨 적도 없는데 짖고 말이야. 그렇게 좋아?"
"이렇게 되고 나니까, 평소보다 훨씬 참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녀는 사랑스러운 것이나 되는 양 목줄을 손 위에서 어루만졌다.
"왠지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평소보다 더 주인님이랑 이어진 기분이 들어서……에헤헤."
"그러고 보니 우리 서윤이가 마조히스트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
"아, 아픈 게 좋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니긴 뭘. 보통은 이런 짓을 당해도, 괴롭기만 할, 텐데. 안 그래?"
나는 일부러 단어 사이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과 함께 목줄을 잡아당겼다.
그럴 때마다 쓰러지는 것처럼 몸을 비틀거린 서윤이는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픈 게 싫은 것치곤 굉장히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인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주인님한테 이런 식으로 다뤄지는 게 기뻐서……"
"그런 소릴 하면서 마조히스트가 아니라고 할 생각이야?"
어처구니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자, 서윤이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만큼 절 믿어주신다는 거니까, 괴로운 만큼 행복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로선 꽤 심하게 다룰 작정이었는데, 서윤이는 의외로 마음에 들었나 봐?"
"마,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뭐랄까, 특별하게 사랑받는 것 같아서요."
"서윤이는 심한 짓을 당하고 있으면 사랑받는다는 실감이 들어?"
그녀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모르는 사람한테 심한 짓은 못 하잖아요."
"……잘 아는 사람한테는 해도 되고?"
"친구끼리는 심한 장난도 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글쎄, 그거랑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좀 곤란한데."
설명할 길이 막막했던 나는 주인이란 입장도 잊은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남자 잘못 만났다간 큰일 날 성격이었다.
아니 뭐,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심한 짓을 당해야만 사랑받는다는 걸 느낀다니……상당하네.
심지어 어렴풋하게나마 이유도 짐작할 수 있어서 난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서윤이는 도리어 설명이 부족해서 내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주인님은 저한테 심한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표현은 좀 고르는 게 어때?"
"……네?"
"그 부분만 들으면 난 꼼짝없이 인간 말종이 되는 거잖아."
"그, 그런 게 아니라……! 신뢰, 라고 해야 하나. 믿고 있다는 의미로?"
"그래그래. 대충 이해했어. 그만큼 서윤이를 믿어준다는 게 기쁘다는 거지?"
어쨌든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는 에쎄머로선 그리 틀리지 않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플레이에 동의한다는 건 몸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믿고 있다는 거니까.
SM에서의 믿음이란 결국 서로 간의 약속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 지켜질 거라는 믿음.
또 아무리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상대가 멋대로 굴지 않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각오는 했지만, 가르칠 게 산더미다 정말."
하지만 그런 상호 신뢰의 근거는 결국 상대의 인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 부분을 뒤집어버리면 나중에 아픈 꼴을 겪게 되는 건 서윤이 본인일 거다.
심한 짓을 당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하는 거라니, 말도 안 되잖아.
아무래도 그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가르칠 필요가 있을 듯 했다.
물론 당장은 주인인 이상 플레이의 흐름을 깨트릴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해야 했지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지켜봐야 하는 남자친구로선 목 안쪽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